Chapter 427 - 427. 마지막 정비 (9)
짧은 대화가 끝난 후 나와 최미소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방에 내려앉은 고요한 침묵. 그래도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귓가에 조용히 들리는 숨소리가 마음을 안정케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자는 지안이, 예린, 엘리를 보살피고 있는 최미소와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끼익-
"나 왔어···. 아고, 힘들다."
힘없이 열리는 문과 함께 지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볼과 옷에 묻은 흙먼지는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고 왔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애들은 다 자고···, 세아 언니는 아직 안 왔나 보네?"
으그극,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키던 지수가 방을 둘러보면서 한 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짐을 대신 들어 주며 답했다.
"어, 네가 먼저 왔어. 중간에 못 만났어?"
"나는 그냥 바로 여기로 왔지. 시간이 시간이라 이미 방으로 간 줄 알았거든. 아직 방에 안 온 줄 알았으면 언니한테 갔다가 올 걸 그랬네."
"아니야. 시간이 더 걸리나 보지. 힘들지? 거기 앉아 있어. 설거지는 대신 해 줄게."
나는 최미소가 가져다준 밥이 들어 있던 통을 세면대 겸 싱크대에 두었다. 잔반이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는 말끔하게 비워진 도시락 통이라 비워낼 것도 없었다. 나중에 간단히 세척만 하면 될 듯했다.
"그나저나 오늘 훈련은 어땠어? 오늘이 마지막 훈련이잖아."
"어느 때처럼 잘했지. 열심히 했고. 근데 오늘 벙커 사람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싱숭생숭한 기분이라 뒷맛이 영 시원하지가 않아."
최미소가 건넨 젖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간단하게 씻어내는 지수. 그녀는 아이들이 깰까 싶어 조용한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저씨는?"
"뭐가?"
"오늘 어땠냐는 말이야."
"나도 너랑 똑같지. 하루 종일 싱숭생숭하고, 심란하고, 답답하고···. 아무래도 내일 있을 작전 때문에 그런 거겠지. 너나,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전부."
나는 통에 묻은 기름기를 제거하기 쉽게 세제를 푼 물에 통을 담가두었다. 그 위에 꼭지를 틀어 물을 좀 더 많이 담기게 만들었다.
토토통···
살짝 연 수도꼭지로 약하게 터져 나오는 수압.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릇에 부딪치면서 물방울들을 사방으로 비산한다.
여러 파문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그 모습은 현재 벙커 사람들의 심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숨을 죽인 벙커의 분위기는 답답함이 무엇인지 사람들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꾸욱-
얼추 그릇의 반 정도가 물에 잠긴 것을 본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게.
"역시 그런 거겠지? 벌써 이런 느낌이 들면 안 된다는 건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속이 자꾸 간질거렸다니까. 뭔가 이제 진짜로 내일이 되면 모든 게 결정이 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심장이 쿵쿵거렸었어. 그게 기대감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늘 만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말을 지수도 동일하게 내뱉었다. 내일이 되면 결정이 난다는 말이었다.
결정. 결판.
둘 다 어떤 무언가가 끝을 맺는다는 단어다.
가장 단순하게 선택지를 만들면 두 개다. 우리가 살든가, 세계수가 끝내 살든가.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끝장나야 결정 혹은 결판이 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고.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인가, 혹은 그렇게 만들겠다는 확신인가.
'······당연히 후자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물음이야.'
지수도 같은 결론을 내린 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도끼만 마구 휘둘렀어. 그렇게 하면 잡생각이 조금이라도 날아갈 것 같아서. 아, 맞다. 그 대머리 아저씨가 훈련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 사람 마체테 진짜 잘 쓰더라. 칼을 막 자기 머리카락처럼 막 나가게 쓴다니까?"
손날을 세워 슉 슈숙 하면서 독고수리의 흉내를 내는 지수. 그녀는 솔직히 그 사람이 매번 중얼거리는 말인 '선이 보인다'라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고 했다. 단순히 칼이 허공을 베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베는 것 같았다는 말과 함께.
"······."
"······지수야, 그거 실력 칭찬하는 거 맞지?"
나와 최미소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핸들을 확 꺾는 지수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감탄을 했어도 그렇지 머리카락처럼 막 나간다는 말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럼! 그만큼 실력이 대단했다는 이야기··· 인데. 내가 말을 잘못했나? 그 사람한테 똑같이 말해 주니까 뭔가 울먹거리는 표정을 짓기는 했는데. 에이, 몰라! 아무튼 결과는 뭐 오늘도 훈련을 잘 마쳤다는 거지!"
지수는 귀를 쫑긋거리면서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댔다. 그녀는 최미소에게 챙겨 준 밥 맛있게 잘 먹었다며 감사를 표했고, 최미소는 잘 먹은 것 같아 되려 자신이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아 참, 아저씨. 그거 이제 잘 쓸 수 있어?"
"그거? 아아, 이거?"
정확하게 뭐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수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은 건 또 다른 입자의 활용법이었다.
나는 소매를 살짝 걷어 지수에게 팔목을 보여 주었다. 겉으로 드러난 팔목의 피부층에 푸른 입자로 이루어진 선이 새겨져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입자를 이동 중에 활성화시켜 피부 겉면에 일종의 장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예전부터 알고 있는 방법이긴 했으나,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이능이 제대로 발현이 안 되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된 활용법이었다.
아르마딜로 변종이 몸에 두르던 장막을 지켜본 덕분일까. 그동안 누적된 경험이 이능으로 성장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변종처럼 피부에 둘러진 장막은 비약적인 신체 방어력의 상승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이 같은 활용법을 알려주자 지수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장막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고.
"나도 아저씨처럼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데, 그 정도는 아직 안 되네."
"따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급할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늘어난 거잖아."
나는 자기 팔목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금 내가 보여 준 것을 재현하기 위해 입자를 팔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파직-
스파크가 약하게 튀며 어설픈 장막이 만들어졌다. 허나,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외부의 공격 탓이 아니었다. 그녀 자기 몸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역으로 장막을 깨트린 것이었다.
그 모습은 장막과 스파크의 상성이 서로 맞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수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불편한 기색으로 꼬리를 의자에 탁탁 쳤다.
바로 그때.
"으아아···."
지수의 탁탁거리는 꼬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신음을 내고, 퀭하게 변한 눈가를 가진 사람은 바로 한세아였다.
"세아씨!"
그런 한세아의 모습을 본 나는 급히 그녀에게 다가 갔다.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보고만 있다가 넘어지는 걸 구경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수도 같이 일어나 한세아가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건네받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 가방이아니기에 검은색 케이스는 일단 방구석에 치워 두었다.
나는 바로 내 쪽으로 폭 쓰러지는 한세아를 받아 냈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몸이 내 몸에 의지해 무게를 실었다.
"세아씨, 괜찮아요? 좀 늦는다 싶었더니 왜 이렇게 무리를 했어요? 아무리 내일 작전이 있어도 그렇지···."
"흐흫···. 만들었어요. 진짜 비장의 무기."
그러나 한세아는 괜찮냐는 내 물음에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기력이 다한 와중에도 이것만큼은 보여 주어야겠다는 듯 허리춤에 걸린 파우치에서 작은 푸른 수정을 꺼내 든 것이다.
"······수정?"
"그냥 수정이 아니예요. 잘 봐요. 꼭 총알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손가락 정도의 길이나 끝부분이 뾰족하다. 생김새만 보면 외견 자체는 총알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다.
한세아가 내 몸에 더 기대며 말을 이었다.
"조이 할아버지랑 힘을 합쳐서 만들었어요···."
그녀는 이 수정탄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강화탄이며, 오로지 입자의 반발력으로만 쏘아지기 때문에 탄두와 탄피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비록 시간 부족과 제작이 매우 힘든 관계로 파괴력 실험은 하지 못하고 겨우 한 발을 만들 수 있었지만,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건 확신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걸로 다 죽여 버릴···."
그리고 그 중얼거림이 끝난 직후, 한세아는 내게 기댄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기력을 전부 쏟아 정신을 놓을 정도로 고된 하루를 보내었던 모양이다.
"잔다. 진짜 자."
지수가 옅은 숨소리를 내는 한세아를 보며 내린 진단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지수야. 미소씨, 거기 이불 좀 펴주십쇼. 지금 괜히 깨우는 것보다 이대로 재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어서 눕혀요."
나는 축 늘어진 한세아를 제대로 안아 들고 침대에 바르게 눕혔다. 고르게 쉬는 숨에 오르락내리락하는가슴팍이 이어진다.
이윽고.
"아저씨, 지금 샤워실 개방했을 텐데 우리도 얼른 씻고 오늘은 일찍 잘까?"
"그래, 그러자. 예린이랑 엘리는 깨워서 데려가고."
나와 최미소는 지수의 제안에 동의하며 예린과 엘리를 깨웠고, 샤워실로 이동했다. 답답함을 일순간 가시게 만드는 차가운 물로 몸을 단정하게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풀썩-
각자 자리에 누워 위를 바라보았다. 전등이 꺼져 어둠에 잠긴 천장이 보인다. 이내 그 천장은 눈꺼풀을 감자 더욱 진한 어둠으로 가려졌다.
어쩌면, 벙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는 밤.
오늘 밤은 유독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