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8 - 428. 마지막 정비 (10)
다음날, 오전 5시 40분.
어제 일찍 잠이 든 만큼 꼭두새벽에 눈을 뜬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엘리, 최미소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사실 어제 잠이 일찍 들은 까닭에 눈을 빨리 뜬 건 아니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뜰 시간이 되어 일어난 것에 가까웠다.
부스럭- 부스럭-
그런 서로를 잠시 바라본 우리는 이내 묵묵히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밤 사이에 하도 뒤척거린 탓에 잔뜩 주름이 져있는 이불을 단정하게 피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간단히 배를 채울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지수가 자리에 앉으려다가 말고 도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있는 듯 졸린 눈을 살살 비비면서.
"응, 갔다 와."
어디 가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러 나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일 테니까. 애초에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다.
"언니, 나도 같이 가···."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던 예린이 흐느적거리면서 일어났다. 아이의 말에 걸음을 멈춘 지수는 얼른 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쿵 덜그럭-
"······?"
무언가 묵직한 것이 문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의아한 기색으로 시야를 아래로 내린 그녀들과 고개를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린 내게 보이는 건 어떤 상자의 끄트머리였다.
"뭐야? 뭐 있어?"
내가 무어라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한세아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 맞다! 장비! 조이 할아버지가 장비 만들어줬을 거에요!"
"장비요?"
"네, 어제 설명을 해줬어야 했는데 깜빡 기절해버려서···. 아무튼 저희 보호 장비를 한번 보시더니 개인 장비들을 만들어 준다고 했었거든요."
어제 피로에 기절한 이후 생긴 작은 새집을 손으로 쓱쓱 누르고, 멋쩍게 웃으면서 답하는 한세아. 그녀는 어제 난쟁이 조이가 우리를 위해 새벽에 장비를 만들어서 가져다 둔 것 같다고 말했다.
보호 장비가 변변치 않은 것도 사실이고, 있는 것마저도 내구도가 많이 떨어진 상황이기에 새로운 장비가 생긴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개인 장비라고 함은 각 사람에게 맞는 치수가 따로 필요할 텐데 우리는 따로 치수를 잰 적이 없지 않은가.
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런 점을 물어보았을 때, 한세아가 뜬금없이 포옹하는 것으로 말이다.
사람을 안는 걸 좋아하는 그녀이다 보니 정확한 치수까지는 몰라도 어림잡은 치수를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일단 저랑 예린이는 나갔다가 올게요. 아저씨, 이 상자 좀 옮겨줄 수 있어? 그, 좀 급해서···."
"어어, 내가 옮길 테니까 어서 다녀와."
나는 허벅지를 슬며시 비비적거리는 지수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지수와 예린이 방을 나선 후, 나는 아직도 착 달라붙어 있는 한세아를 데리고 문 밖에 주르륵 놓여진 박스들을 방 안으로 옮겼다.
상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해당 장비를 착용하는 사람을 헷갈리지 않게 이름이 적힌 상자가 인원수에 맞게 놓여져 있었으니까.
난쟁이 조이가 아니, 조이뿐만이 아닌 칸, 탄, 르한을 포함한 난쟁이들은 과로를 넘어 몸을 혹사하다시피 장비를 만들었고, 그 장비의 가짓수에는 마찬가지로 우리 것뿐만이 아닌 군인들이 사용할 장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노고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나는 가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제한 시간, 그것도 이틀이 채 안되는 단시간 내에 일을 끝마쳤어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이러고 작전까지 참여한다니 말 다했지.'
나와 한세아는 우선 상자는 그대로 두고, 세안을 간단하게 마친 다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최미소와 엘리를 마저 도왔다.
작전이 있는 아침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건 없었다. 어제 끓여 둔 콩나물국과 밥에 통조림을 곁들여 먹을 뿐이었다. 힘 쓰는 날이라고 괜히 묵직하게 챙겨 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않나.
얼추 준비가 끝나고 지수와 예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한세아를 보며 속으로 단어를 조합했고, 입으로 결과물을 내놓았다.
"세아씨, 몸 괜찮은 거 맞죠?"
"네! 완전 괜찮은데요? 왜요?"
"어제 많이 힘들어 보인 것도 있고···."
내가 말을 흐리며 그녀의 복부를 흘낏거리자 시선의 의미를 곧장 눈치챈 한세아. 그녀는 내 팔뚝을 찰싹 때리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쉿! 이 부분은 저희 이미 결론 내렸잖아요. 조금 더 지켜보는 게 맞다구요. 아직 확정이 된 것도 아닌데 여기 남아 있으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지금 제가 빠지면 그만큼 현우씨가 힘들어지잖아요. 저는 그거 싫어요. 진짜로, 싫어요."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 해주십쇼. 되도록이면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걸로요."
솔직히 매일 새벽마다 알을 낳지 않는 걸로 임신은 거의 확정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저 속으로 한숨을 삼킬 뿐이었다.
"알았어요. 어차피 제가 다룰 무기는 후방에 있는 게 맞기도 하구요."
살짝 답을 망설인 한세아는 이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배를 톡톡치다가 이내 어루만지는 손길로 바꾸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듯한 손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수와 예린이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겠다는 걸 확실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이 매우 푸르렀다는 말과 함께 시작된 아침 식사는 새벽 공기에 차갑게 식은 속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군인들은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더라. 우리가 씻고 올라가면 바로 출발할 것 같았어."
"준비를 마친 군인 아저씨들은 이미 노들섬으로 움직였대요! 선발대라고 했나. 아무튼요!"
바깥을 나간 김에 진행 상황을 보고 온 지수와 예린은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 이미 절반 이상의 전력이 노들섬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에 나, 한세아, 엘리는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그래, 우리도 서두르는 편이 좋겠네. 조이가 만들어준 장비 착용하고 바로 위로 올라가자."
"네!"
***
"지수야, 어때? 움직임에 방해가 되진 않지?"
제일 먼저 장비 착용을 완료한 지수를 보며 한세아가 한 말이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지수는 현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네, 언니. 이거 생각보다 편한데요? 다리 관절부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요. 익숙해지면 그닥 신경도 안 쓰일 것 같고요."
지수는 낯선 형태의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착용법이 어렵지는 않았다. 낯선 형태라는 것이 완전 처음 보는 형태의 장비가 아니고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소설로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모험가 같은 자들이 착용하는 장비라고 할 수 있었다.
얇게 핀 철판을 고정시키는 가죽 끈으로 몸에 고정시키는 형식. 면적은 좁지만, 철판 뒷면에 보이지 않게 수정이 심어져 있어서 급소 부위를 확실하게 보호해주는 장비였다.
예린은 지수와 달리 좀 더 두꺼운 장비를 착용한 모양새였다. 거의 온 몸을 덮다시피 한 그 장비는 난쟁이 르한이 손을 보던 카멜레온 변종의 소재로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내구도를 높이는 소재로 개량한 그것은 온전히 예린을 위한 장비였다.
처음 우리는 아이의 이름이 적힌 장비 상자가 있긴 했어도 예린을 최미소와 함께 벙커에 두고 가려고 했으나, 아이는 고집스레 따라간다며 의견을 표출했었다.
그냥 위험한 것도 아니고 매우 위험한 곳이기에 절대로 안된다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말렸지만 결국 그 끝에는 따라오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예린이 주장한 의견인 군인들과 난쟁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까닭이다. 그 의견의 근거는 정령들이었다. 정확히는 눈에 띄게 수가 불어난 정령들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정령들이 예린의 부름에 우수수 쏟아진 것이다.
- 다들 모여···!
반지로 부르지도 않고, 단순히 모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하나, 둘씩 차례로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공간을 꽉 채울 만큼 녀석들이 아이의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다시 돌아온 정령들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정령들의 기본적인 모습이 동물이었으니 그 기준으로 따지면,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를 건너뛰고 한번에 성년기로 성장한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엘리의 추측과 달리 성장기를 거치느라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외부에서 위협이 가해짐에 따라 정령들도 그에 맞춰 체급을 올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나.
'···저, 정령이 아니라 깡패 아니야? 왜 이렇게 화가 잔뜩 나있어···.'
그 광경을 보고 엘리가 멍한 얼굴을 한 채 바보같이 중얼거리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귀엽던 아기 동물의 형상에서 성체 동물의 형상으로 바뀐 정령들이 으르렁거리니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주먹만한 크기를 넘어서 작게는 사람 상체, 크게는 커다란 호랑이 정도의 체구를 가진 수십의 정령들이 빤히 바라보는데 우리가 뭘 어찌할 수 있었겠나.
가만히 두면 무력 시위라도 벌일 기세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