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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429화 (430/497)

Chapter 429 - 429. 마지막 정비 (11)

어린 정령들은 보이지 않고, 급성장을 이룬 성체급 정령들이 방의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게 된 시점에, 예전의 그 귀엽고 멍한 정령들은 사라지고 날카롭고 강한 인상으로 바뀐 정령들의 모습에, 결국 예린도 따라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계속 말하는 거지만, 예린이 너는 후방에서만 있어야 해. 그 장비를 푹 뒤집어써서 최대한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란 말이야. 알았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미 따라오는 걸로 결론이 났고, 조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예린의 장비를 변종의 소재로 만든 걸 주었는데 내가 여기서 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알았어요!"

보는 사람을 잔뜩 걱정하게 만들었으면서 대답은 참 잘하는 예린이었다.

재차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이번에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정에서 나왔을 당시의 복장을 다시 입은 상태였다. 어깨에 비스듬히 메여져 있는 활을 제외한다면 딱히 바뀐 부분은 없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엘리의 장비가 그다지 바뀌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입고 있는 장비의 소재가 잃어 버린 그녀의 고향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세아가 조이의 말을 떠올리며 말해주기를, 지구의 소재와 그곳의 소재의 특성들이 입자 반응도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나는 덕분에 엘리의 장비를 살짝만 손 봐도 우리가 추가적으로 덧대어 입은 장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바람을 타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특성상 덕지덕지 장비를 부착하는 건 몸에 맞지 않는다고 하니 엘리는 며칠 만에 다시 입은 자기 옷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지막으로 한세아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보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비행을 하다가 긴급 착륙시 발목의 부상을 막아주는 신발, 무릎 관절부를 보호해주는 장비, 흉부의 흔들림을 막아주는 철판을 덧대고 여분의 탄창이 가득 끼워진 전투 조끼. 그리고 몸을 추가적으로 보호해주는 외투까지.

입자로 몸 자체를 강화시킬 수 있기에 지수처럼 간단한 보호구만 장비한 나도, 그녀들도 전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이건 날씨가 싸늘하게 변해서 입는 단순한 외투가 아니었다.

난쟁이 조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만든 일종의 방어구였다. 수정으로 짜낸 특수 섬유가 옷 내부에 들어 있어서 적의 공격을 흘려내는 얇은 장막이 만들어지는 장비였다.

다만, 그 정도는 나무 인간들의 힘에 한정되었다. 그 이상의 힘으로 내려치는 변종들의 공격을 막아주지는 못한다고.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엘리는 변종들의 공격을 우직하게 맞대거나 흘리는 건 하책이며 아예 닿지도 않게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나무 인간들의 손아귀를 외투를 걸치는 것만으로 막아진다면 전투가 훨씬 편해지지 않겠는가.

다른 군인들에게도 특수 섬유로 만든 장비를 착용하면 좋을 테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수정의 양이 한정되어 있어서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는 한세아의 설명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를 세게 안았다가 풀어 주었다.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자꾸 앞에서 사람을 자극하는데.

"···엑? 힣?"

뜬금없이 이루어진 포옹과 순간 조여지는 몸에 바보 같은 추임새를 잇따라 넣는 한세아. 그녀는 처음에 당황한 눈치였으나, 이내 아무렴 좋다는 듯 내 팔에 매달렸다.

"······갑자기 둘이서 지금 뭐-."

나는 어이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수도 한번 안아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입을 막아 얌전히 만든 사이에 어제 한세아가 가져온 검은 케이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세아씨, 저 안에 든 거 총이죠?"

"아, 네! 맞아요. 저번에 조이 할아버지가 선물로 준다고 한 게 저거였어요."

한세아는 벽면에 기대진 총기 케이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케이스 잠금을 풀어 내부의 보관되고 있던 총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저격총 맞아? 뭔가 둔하게 생겼네."

지수가 총기를 보자마자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게, 케이스의 총기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물 저격총이었기 때문이다.

삼각대와 스코프가 달려 있다는 점을 빼면, 최명철이 보여 주었던 가느다란 느낌을 주는 K-14의 총구의 크기 자체가 눈에 띄게 달랐다. 무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미군 기지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원래는 자신이 개량한 저격총을 주려고 했다가 강화탄 문제점 때문에 이걸로 바꿔 준 거라고 하더라구요."

위력이 강한 강화탄이 가지는 문제점. 그건 사격 시에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벙커에 존재하는 저격총 대부분은 볼트 액션식으로 직접 노리쇠를 후퇴 전진해야 탄피가 배출되는 탓에 강화탄의 사용 방식과 맞지 않았다고.

그래서 조이가 눈을 돌린 건 반자동인 이 저격총이었나 보다.

"총열도 빠르게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당장 해결이 안 되고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 해서 좀 아쉽긴 한데. 뭐, 이 정도만 해도 어디겠어요. 그렇죠?"

강화탄의 열기를 해소하고 그 영향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해서는 사격과 동시에 탄피가 배출되어야 했다. 한세아는 그래야 한 발이라도 더 쏠 수 있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냥 좋아할 따름이었다.

'···권총으로 쏴도 그렇게 강했는데, 이걸로 쏘면 총이 터지는 거 아니야?'

일반적인 소총탄과 달리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탄환을 보니 든 생각이었다.

"장비 다 입었으면 이제 나갑시다."

나는 한세아에게 그렇다 답하며 그녀에게 건네받은 권총과 권총집을 착용했다. 주 무기는 여전히 근접 무기인 도끼를 사용하겠지만 급할 때 대처할 수 있게 원거리 무기 하나 정도는 장비하는 게 맞으니까.

언제까지고 도끼가 닿지 않는 곳을 보기만 할 수 없는 노릇이고. 탄창을 가득 채운 건 한세아가 만든 강화탄이니 위급 상황에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다.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35분. 벙커에서 노들섬으로 출발하는 시각이 7시라는 걸 감안 한다면 이제 슬슬 위로 올라가서 대기하는 것이 맞았다.

"같이 가요. 비록 끝까지 따라가주지는 못하지만 배웅은 해주고 싶어요."

그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최미소가 한 말을 끝으로 장비를 갖춘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엘리는 연대장과 군인이 있을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

해조차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인 지상.

휘이이···

그곳에서 새벽 한기를 품은 바람이 흉한 건물을 휘감으면서 돌아다닌다. 깨진 유리창, 휘어진 철골, 곰팡이가 잔뜩 핀 사무용 의자, 이슬이 맺힌 풀, 바닥에 가라앉은 먼지들 사이도 같이.

오소소 일어나는 싸늘한 바람. 그러한 바람이 지상으로 올라간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해준 것이었다.

다음으로 우리 시야에 들어온 건 아직은 어둑한 사위 곳곳에서 여러 사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미약한 햇빛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건 작전을 위해 벙커에서 벗어날 예정인 후발대 군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공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뒤에 늘어선 전차와 장갑차들, 위용을 뽐내는 전차들의 장갑 표면에 맺힌 이슬들, 난쟁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만든 장비를 착용한 군인들.

가지 말라며 붙잡는 사람들,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해 군데군데 찌그러진 전차와 장갑차들, 몇 대 되지도 않는 전차들의 장갑 표면에 묻은 검댕이들,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마음을 다잡는 군인들.

같은 풍경, 다른 감상을 주는 그런 상반되는 광경 속에서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엘리, 최미소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주변 풍경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그런 내 시야를 채운 건 군인과 만삭인 여성이었다.

"말려도 갈 거지? 하긴 그렇겠지. 내가 지금까지 안 말린 것도 아니니까."

서로를 말없이 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성이 한 말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유지하고 있었다.

"···응, 미안."

"됐어. 고개 숙이지 마. 나 오빠가 그런 표정 짓는 거 싫어. 그냥···, 그냥 어떻게든 돌아오기만 해. 아기 이름은 같이 지어야 할 거 아니야."

"······혜영아. 이거 가지고 있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군인이 여성에게 내민 건 두 개의 인식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김지민이라는 이름과 군번이 새겨진 인식표와 함께 내밀어진 반지 하나가 여성의 눈에 비쳐졌다.

"씨이···. 왜 하필 지금이야···. 이러면 못 돌아오는 영화가 수두룩하단 말이야···."

"그러게. 좀 더 일찍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사과하지 말라고 했잖아. 괜한 소리 말고 얌전히 입술이나 대."

김지민이라는 군인이 결국 울음을 터트린 여성을 달래는 것을 끝으로 나는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서로 많은 말을 나누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말없이 통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명확한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다들 무사 귀환을, 집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구름 한 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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