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0 - 430. 마지막 정비 (12)
신아현과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밤을 보낸 천막이 텅 비워진 걸 보니 선발대와 함께 먼저 출발한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선발대로서 노들섬에 미리 가 있는 상황이거나 후암동 일대 괴물들의 동태를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는 거겠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한 느낌을 주는 벙커 위 지상의 풍경을 하나씩 지나치고, 마침내 나,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가 탑승할 차량 앞에 도착했을 때.
"오늘 다시 돌아오실 텐데 너무 긴 인사를 하기는 좀 그렇죠?"
최미소가 걸음을 멈췄다. 가벼운 어투로 말한 그녀는 덩달아 걸음을 잠시 멈춘 우리를 보다가 한 사람, 한 사람 안아주기 시작했다.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 순으로 포옹을 통해 배웅을 하던 최미소는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멈칫거리는 나를 보았고, 그녀들에게 그랬듯이 망설임 없이 가볍게 안아주며 입을 열었다. 시선은 이제 떠날 우리를 향한 채였다.
"어서 가요. 갔다가 몸 성히 돌아와요. 오늘 저녁은 제가 거하게 차려놓을게요."
"기대하고 있어도 되죠?"
"그럼요. 말만 해요. 창고를 싹 다 뒤엎더라도 찾아서 만들어줄 테니까."
싸늘한 아침 공기에 차갑게 식었던 몸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와 굳게 믿고 있다는 말에 우리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픽 웃을 수 있었다.
"언니! 저는 갈비탕이 먹고 싶어요! 아니면 저번에 먹었던 꼬리곰탕!"
저녁이 되려면 멀었건만, 이미 먹고 싶은걸 정해 놓았던 것인지 흐느적거리는 물결 비늘을 흔들며 외치는 예린이었다. 아이는 벌써 군침이 도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참 한결같이 식탐이 강한 아이의 모습에 최미소도 미약한 웃음을 머금었다. 눈빛만큼은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린에게 가지 말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미 수십 차례나 말렸던 최미소는 자신이 아무리 말해도 아이가 우리를 따라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는 그녀는 내게 꼭 붙어 있던 아이에게 그저 조심하라는 말을 건넬 뿐이었다.
"···그래, 언니가 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
"네! 그··· 뭐였지? 아, 탕이 식기 전에 돌아올게요!"
"술이 식기 전에, 겠지."
짐짓 엄숙하게 말하는 예린과 킥킥 웃으면서 태클을 거는 지수였다. 언니는 응용도 모르냐며 티격태격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어느덧 시각이 오전 7시에 다다라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원! 차량에 탑승하라!"
연대장이 외쳤다. 그는 후발대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차량에 발을 걸친 상태였다. 후발대 출발 시간이 된 것이다.
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군인들도 하나, 둘씩 차량에 탑승하기 시작했고, 한 사람이 탈 때마다 병력 수송 차량이 흔들렸다. 그들이 탄 차량은 연대장이 탄 차량과 동일한 종류였다.
지휘 차량에 속하는 레토나나 험비는 멀쩡하게 굴러가는 것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군인들이 어떤 차량이 탑승하는지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우리도 차량에 탑승해야만 했으니까.
"미소씨, 이제 들어 가십쇼. 날이 찹니다. 어서요."
"···알았어요."
차량이 벙커를 떠나는 것까지만 보고 들어가겠다는 최미소를 억지로 내려보낸 우리는 곧장 보조 발판을 밟고 위로 올라탔다.
부르르릉···
운전병이 시동을 걸자 트럭이 달달 떨린다. 마치 그 모습이 곧 있을 작전에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긴장한 건 나이지만 말이다.
두돈반의 수송칸에는 11자로 이루어진 좌우 좌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석 가운데에 길게 늘어진 잔여 물자도 같이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운송 트럭도 몇 대 없다 보니 자투리 칸을 활용한 모양이다.
그 탓에 공간이 매우 비좁았으나, 불평은 나오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출발 전 엔진 예열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운전병이 창문을 통해 건네준 무전기에서 전달되는 목소리와 함께 박지영이 우리의 뒤를 이어 차량에 탑승한 까닭이다.
구급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는 나, 지수, 한세아, 엘리를 보다가 물결 비늘을 푹 뒤집어쓴 예린이 보이자 순간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예린이 데려가도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됐습니다."
"아니, 그래도 애인데······."
두고 가면 어떻게든 따라올 아이라 차라리 지금 데려가는 것이 낫다는 내 말에 뭐라 말을 잇지 못 하는 박지영. 그런 그녀의 시선을 끈 건 예린이었다.
같은 질문에 많이 시달린 아이는 자신도 같이 싸울 수 있다는 대답 대신 직접 증명이라도 하듯 정령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크르릉···]
밤사이에 돌아온 성체급 정령이 운송칸을 꽉 채우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나오자마자 잔뜩 화가 나있는 정령을 보자 말문을 잃어 버린 표정을 지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두 돼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이렇게 숨을 테니까요!"
합! 소리를 내며 물결 비늘을 푹 뒤집어쓴 예린은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카멜레온 변종의 능력으로 주변과 동화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비록 나와 박지영이 보았던 때의 장비에서 바뀐 건 그다지 없었지만, 단순히 은신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쓸 만했다.
"그러게.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예린아, 눈앞에서 보니까 많이 흉흉한데, 이제 치워줄래?"
박지영은 예린의 손짓에 정령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전조도 없이 나타난 지라 꽤 놀랐던 모양이다.
"볼수록 진짜 신기하긴 하네. 근데 볼수록 진짜 애매하기도 하고. 적의 능력을 우리가 쓰게 되면 약해지는 게 국룰인가?"
"그래도 난전 중에는 이 정도만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아쉽다는 거죠. 원본 능력 그대로면 괴물들 혼을 아주 그냥 쏙 빼낼 수 있었을 텐데."
흐릿한 잔상만 남기고 숨은 예린을 보며 지수와 한세아가 나눈 대화였다.
나는 장비 성능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지수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보다가 숨을 돌리고 있는 박지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박지영씨, 괜찮습니까?"
"네? 뭐가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 어제 이거 좀 챙기다가 잠을 좀 설쳤거든요. 아무튼 걱정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예요."
그녀는 최명철을 구조할 때 사용할 물품들이 담긴 가방을 보여 주었다. 임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되려 걱정되는 건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박지영의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와 대화하고 있으나, 불안한 듯 떨리는 꼬리를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 나갈 틈은 더 이상 없었다.
- 치지직··· 1번 차량 준비되는대로 진형에 맞춰서 이동 시작할 것. 이상.
엔진의 예열을 끝마친 차량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으니까.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벽을 벗어나는 만큼 대화보다는 주변 경계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윽고.
"최대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거 튼튼한 거 빼면 시체거든요."
"부탁하겠습니다."
"옙!"
운전병의 대답과 함께 우리가 탄 두돈반도 개방된 장벽 사이를 통과해 지나갔고, 곧바로 울퉁불퉁한 도로의 표면이 느껴졌다.
휘이이잉···
운송 칸에 추락 방지용으로 설치된 나무판자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조금은 더 따뜻하게 변한 햇빛을 느낄 새도 없이.
부르르릉···
끼리리릭···
그리고 우리 앞뒤로 전차와 장갑차, 다른 군인들이 탄 두돈반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52 국제금융로 48>
서로의 속도에 맞춰 서서히 전진하는 차량들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가교가 설치된 노들섬이었다. 그보다 더 정확히는 올림픽 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은 여의도 섬 내부이기에 길거리를 배회하는 나무 인간들이나 변종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것들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무성한 수풀과 넝쿨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로 좌우로 길게 늘어진 건물들이 초록으로 보일 정도로 뒤덮은 넝쿨, 한때 가로수였던 나무가 기이하게 성장해 아스팔트 도로와 건물 벽면에 파고든 모습, 연이은 지진과 관리를 받지 못한 탓에 쩍쩍 갈라진 도로의 표면, 외벽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던 고층 건물들이 뼈대만 남아 흉하게 변한 풍경, 불에 탄 차량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타이어, 사람 대신 인도 위를 점거한 건물 간판들.
이러한 것들이 여의도 바깥 올림픽 대로로 넘어갈 때까지 반복되어 눈에 담기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여의도를 가득 채운 빌딩들의 숲을 벗어난 순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던 시야에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탁 트인 주변의 풍경, 도로 위에 엉망으로 세워진 차량들, 버스에 의해 뜯겨진 가드 레일, 이질적으로 뚝 끊겨 있는 1호선의 철도 노선.
그리고 노들섬을 가로지르는 한강 대교였다. 이 한강 대교도 한강 철교와 마찬가지로 길이 모조리 끊겨 있었다.
멀쩡한 건 오직 한강의 잔잔한 수면 중앙에 있는 노들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