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2 - 432. 마지막 정비 (14)
노들섬.
녹음으로 전부 뒤덮여 섬이 아니라 버드나무가 강 한가운데에 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변모한 이곳은 한때 복합문화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물론, 현재는 짙은 녹음 사이로 엉망으로 갈라진 건물 외벽이 그 흔적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있을 뿐, 예전의 단정했던 디자인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 대교를 기준으로 섬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진 가로수들이 변형을 일으킨 탓이 제일 컸다. 뿌리와 가지를 사방으로 뻗은 그것들이 중앙 건물들을 모조리 집어삼켰으니 말이다.
허벅지 높이를 가뿐하게 넘어서는 억센 수풀과 지지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넝쿨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들 또한 변형된 나무들처럼 지상을 전부 뒤덮고 있었으니까.
노들섬 중심부, 그러니까 그나마 수풀이 덜 침범한 4차선 도로 위 한 켠에는 나무 인간들의 사체가 쌓여 있었고, 커다란 탄피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어제 이곳에 도착한 난쟁이들의 호위 병력이 머물면서 건물 내부의 나무 인간들을 정리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흩어진 탄피들은 어제 발생한 탄피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탄피가 황동색이 아닌 잔뜩 녹이 쓴 검은색에 가까웠던 것이다.
총성도 들리지 않았으니 지금 보이는 탄피들은 어제가 아닌 훨씬 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좀 더 많은 군인들이 전차와 장갑차들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의 흙을 끈적한 체액으로 검붉게 물들이는 사체들을 경계하면서.
확인 사살까지 마친 듯 나무 인간들의 머리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을 통과한 바람이 내 쪽으로 향하자 역한 피 냄새가 맡아진다.
"박 중사, 밤사이에 특이 사항은 없었나?"
차량에서 내리고 그러한 풍경을 눈에 담던 연대장이 한 말이었다. 이어서 그는 넝쿨에 잠식된 건물 내부에서 나오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이 꽤 고단했는지 흙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예! 노들섬 내부의 악성 변이자들은 무사히 제거 완료했고, 부상자는 없습니다! 선발대도 무사히 도착했으며 현재는 작전 참여자 전인원이 노들섬에 모여 있는 상태입니다!"
중사 박종수가 올린 보고는 연대장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더 물어본 까닭은 보고가 없었던 그 사이의 간격에 무언가 특이 사항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고에 이제 남은 일은 2차 가교를 건너 위로 내달리는 것뿐이다.
"탄약 소모는?"
"사방으로 퍼지는 총성이 위의 괴물들을 경계 시킬까 염려해 화기는 쓰지 않았습니다. 우려 했던 변종이 없었던 덕분에 근접무기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수도 예상보다 많지 않아 장갑차로 밀어 버리니 상대하는 게 수월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마지막 작전 점검을 한 후, 바로 다음 작전을 속행할 거야."
"알겠습니다!"
박종수는 연대장의 말에 답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향한 곳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장비 상태를 점검하는 군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제 노들섬에 도착한 난쟁이 호위 병력, 오늘 벙커에서 출발한 선발대와 내가 포함된 후발대. 그렇게 노들섬에 모이게 된 인원은 총 84명.
벙커 총원이 300명가량에서 습격이 있었던 이후 270명 이하까지 떨어졌고, 거기서 3분의 1을 약간 넘는 정도의 인원이 마지막 작전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순수 군인은 아니었다. 84명 중에서 처음부터 군인인 사람들은 50명이었고, 나머지 34명은 벙커 사람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자원해 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대부분은 젊은 남성이었으나, 드문드문 여성들도 포진해 있었다. 작전 중요도에 비해 모인 인원이 많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허나, 지금 벙커에 남은 사람들이 노인, 어린아이 혹은 신체 결손으로 인해 싸우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걸 감안 한다면, 싸울 수 있는 인원이 거의 다 나왔다고 보면 되었다.
애초에 우리가 괴물들을 수로 압도할 수 없는 이상, 하나둘 정도 늘어 봤자 별반 차이도 없지 않겠나.
그러니 벙커를 지키고 있을 최소한의 인원이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대부분의 병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괴물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어떻게 할래? 내릴래? 아니면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래? 곧 다시 출발할 것 같긴 한데."
나는 아직 수송칸에 앉아 있는 지수, 한세아, 예린, 엘리를 보며 말했다. 박지영은 차량이 정차하자마자 바깥으로 튀어나갔기 때문에 지금 자리에 없었다. 호들갑을 떤 것이 많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저는 나갈래요! 오빠는요?"
가장 먼저 손을 든 건 예린이었다. 아이는 내내 입고 있던 물결 비늘 장비가 꽤 무거웠는지 벗어던진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힘들어도 입고 있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장비의 무게를 알고 있는 나는 그 말을 애써 참았다.
"나는 칸에게 가 보려고."
"그럼 오빠 따라갈래요."
"지수랑 세아씨는?"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나도 아저씨 따라가지 뭐.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아서."
"저는 여기 있을게요.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기는 하지만 이거 조정해 놔야 하거든요. 셋이서 다녀오세요."
꼬리를 흔들며 일어난 지수와 검은 총기 케이스를 가리키며 고개를 젓는 한세아. 둘 다 무기를 챙겼다는 건 동일하지만 방향성이 달랐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무전하십쇼."
"넵.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이 해치우면 그만이라며 살짝 웃으면서 말한 한세아는 어서 다녀오라는 손짓을 했다. 전투 조끼 탄창 파우치가 튀어나온 부분이 유독 도드라진다.
엘리는 명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한때 어머니라 불렸던 세계수를 공격하러 가는 길이니 마음이 복잡하기도 하겠지.
이윽고, 나, 지수, 예린은 수송칸에서 내려 자잘한 돌 부스러기들이 널린 바닥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바로 어느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난쟁이들이 있는 곳을 힘들게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있는 위치를 지수가 뛰어난 청각으로 곧장 눈치챈 까닭이다.
···깡! ···깡! ···깡!
지수뿐만이 아니라 나와 예린의 귀에도 들릴 정도의 소리가 울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난쟁이들이 뭔지는 몰라도 뭔가를 손보고 있나 보다.
자박- 자박- 부스스- 부스스···
아스팔트 도로의 파편과 육중한 전차 궤도에 짓눌려 몸을 눕힌 수풀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방금 전 박종수가 향한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군인들과 함께 K4 고속유탄기관총, 81mm 박격포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위 장비들은 아르마딜로 변종이 장벽을 공격했을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던 장비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용할 수 없었던 장비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K4 고속유탄기관총은 하필이면 그때 중요 부품을 수리중이기도 했고, 81mm 박격포는 설치 자체는 되어 있었으나 박격포탄이 보관되는 탄약고가 무지막지한 토사에 깔려 버리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상시 매뉴얼대로 탄약고로 이동한 일부 군인들이 안에 갇혀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도 한참을 그곳에 갇혀 있었어야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물량이 많지 않은 유탄을 강제로 아낀 덕분에 지금 큰 전력이 되어 준다는 점일까. 장벽이 뚫리기 직전까지 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그 위기를 이겨 내지 않았나.
기관총 옆에 40mm 유탄이 들어 있는 탄통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수와 예린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휴, 확실히 걸으니까 좀 낫네."
"언니, 허리 아파?"
"응? 아니, 허리가 아픈 건 아니고 좀 뻐근하네. 트럭 승차감 지옥이었잖아. 너는 아니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언니가 아픈 건 나이가- 아니, 아니야. 도로! 나이가 든 도로가 울퉁불퉁해져서! 말을 잘못-끄아아앙···!"
폴짝폴짝 뛰며 건재함을 알린 예린이 다급하게 고개를 휙휙 저으며 뒷말을 수정했지만, 아이는 결국 지수에게 잡혀 버둥버둥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린아, 언니야. 까불면 안 되지. 요즘 사춘기가 왔나? 자꾸 까불까불하네."
"항복! 내가 졌소! 오빠! 헬프! 도움···!"
예린이 다급하게 외치며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통에 나는 도끼눈을 뜨고 있는 지수를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예린이 너무 괴롭히지마."
"아저씨! 얘가 먼저-히얏?!"
내가 붕붕 움직이며 불만을 토해내는 꼬리를 붙잡아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자, 다행히 몸을 바싹 굳히고 바로 예린을 풀어 주는 지수였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란 것에 가까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흐읏···. 아저씨, 거기 말고 좀 더 위에···."
예린을 구했다는 결과는 같지 않은가. 지수 본인도 은근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응, 거기···. 이왕 건드린 거 제대로 만져 달라고. 애매하게 만지면 불만만 쌓여서 몸이 괜히 불편해진단 말이야."
"······."
봐라. 겨우 숨을 돌린 예린이 그런 언니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도 지수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저 본인이 직접 손의 위치와 강도를 조절해가며 내게 몸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만족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기에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나저나 참, 뭐라고 해야 하나.'
노들섬에 내려앉은 분위기가 묵직한 것이 한순간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수의 꼬리는 만지작거리는 맛이 있었다. 사실상 꼬리를 만지는 건 나도 좋고, 지수도 좋은 행위였던 것이다.
날이 쌀쌀하게 변함에 따라 꼬리 털이 한층 복슬복슬해진 게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