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6 - 436. 돌파 (3)
"···괜히 말하라고 했나? 확실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네. 그래도 뭐, 당장 걱정할 건 없지 않겠어?"
지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전방으로 향했다. 엘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제대로 진전되고 있는 중인 광경이 보인다.
처음에 우려했던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 형상의 구조물들도 신아현이 하늘에서 떨어트린 폭탄에 맞아 형체를 잃어버렸고, 별다른 위험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엘리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만큼 근처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니, 굳이 따지면 침묵이나 적막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정도로 조용하지는 않았다.
이질적으로 중간이 똑 부러진 고층 아파트,
구름다리처럼 아파트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 거목,
거목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림자와 함께 철도를 전부 휘감은 질긴 넝쿨들,
끊어질 듯 말 듯 대롱거리는 전신주,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 포자 덩어리,
여정의 끝이 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하나, 둘씩 끊어져 있는 선로들, 빌딩에 처박힌 헬기와 전투기의 잔해, 불에 타 녹아내린 화물 열차,
고가 도로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철도 자갈밭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일부 차량들, 렌즈가 깨진 신호등, 폭삭 주저앉은 빌라 단지, 도로를 장식한 유리 파편들.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 우리가 상대해야하는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까닭이다.
부르르릉!
끼리리리리- [끼에에에에엑!]
시끄러운 전차와 장갑차의 엔진음과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차량을 밀치고 깔아뭉개는 각종 소리에 이끌린 그것들은 거슬리는 소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없애고 싶다는 듯 앞다투어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팔을 앞으로 내밀고, 이리저리 휘적거리면서.
- 아아, 여기는 1번 전차. 전방에 악성 변이자 다수 발견! 바로 교전 시작하겠습니다!
수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작전대로 곧장 대응을 시작한 전차와 장갑차. 흑표는 K-21의 보조를 받아 속도를 유지한 채로 포신을 고정시켰다.
고작 나무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포탄을 쏘는 건 과잉 화력이기에 대신 나선 건 포탑 상단부에 위치한 K-6 사수였다. 그는 총구를 전방으로 향한 상태 그대로 사격 버튼을 엄지로 눌렀다.
투투투퉁!
나무 인간들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공간을 묵직한 사격음이 꿰뚫었다. 대지를 때리는 탄은 이내 파바박, 튀는 자갈들과 함께 선두의 나무 인간들을 뒤로 넘어트렸다.
[끄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일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뒤는 여전히 빠른 속력으로 전진하고 있던 흑표와 장갑차가 거리를 좁혀 순식간에 궤도로 깔아뭉갰으니까.
"······."
K-6 사수는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 탄약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콰드득! 콰지직!
우그그극!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한 궤도와 두꺼운 군용 타이어에 의해 나무 인간들의 사지가 부러진다. 불쾌한 소리를 내며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있는 그것들은 곤죽이 되어 자갈밭에 기다란 자국을 남겼다.
딱- 딱- 딱-
사지가 성치도 않은 주제에 간혹 머리만 남아 이를 부딪치고 있는 나무 인간들은,
쿵!
지이익-
꼬리에 꼬리를 물어 뒤따라 이동하고 있던 군용 차량에 의해 마무리가 되었다. 그나마 두 팔이 남아 기동 중인 전차를 붙잡기 위해 팔을 뻗던 나무 인간들이나 어떻게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놈이나 결과는 똑같았다.
어떤 상태의 나무 인간들이 있든 간에 상관없이 육중한 군용 차량에 부딪혀 자갈밭을 형편없이 나뒹굴었다는 것으로 말이다. 수십의 나무 인간들이 덤벼 들었으나, 놈들이 변종이 아닌 이상 전차 앞에서는 무력했다.
대기 중이던 군인들이 나설 것도 없이 전차와 다른 차량에 의해 인정사정없이 갈려 나가는 나무 인간들은 끈적한 검붉은 선만을 겨우 남길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다. 요란한 엔진음을 내는 전차들을 앞세워 들어가면 그 소음에 이끌린 괴물들이 나온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않나.
하지만.
'······달려드는 수가 너무 적어.'
저항이 너무 약했다. 아무리 유인 장치의 여파가 남아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는데 달려드는 게 고작 나무 인간들뿐이라니.
최선두에서 나무 인간들의 파도를 역으로 밀어내고 있는 전차 조종수나, K-6 사수도 알 것이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들은 변종들의 영역에 끼지도 못한 쭉정이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탄약을 최대한 아낀다는 판단을 내린 거겠지.
세계수 주변 일대의 변종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고 하나, 그건 그 변종들이 서로 힘을 합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순히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 변종들은 우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제 동족을 강제로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 설 터다.
경고에 가까웠던 엘리의 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뇐 나, 아직 나설 차례가 되지 않아 도끼와 총기를 꽉 붙잡고 있는 지수와 한세아, 비늘 망토 속에 숨어 긴장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예린, 다짐이라도 하듯 활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엘리.
우리는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긴장감을 최대로 올려 사소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게 경계를 했지만,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삼각지 고가도로 밑을 지나 선로 위 나무 인간들과 작은 포자 덩어리들을 밀어버리며 남영역 승강장을 그대로 통과했을 때.
···펑!
가져온 폭탄이 전부 바닥이 난 듯 폭음이 멈췄다. 일정한 경로로 움직이고 있던 까악이가 하늘 위에서 뱅뱅 맴도는 걸 보니 그럴 가능성이 커졌고, 이어서 신아현이 무전으로 직접 말해준 덕분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 치지직··· 폭탄 전부 썼어요! 저는 위에서 대기-치지직-하면서 무슨 일 생기면 말해드릴게요!
"신아현씨, 지상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의 무전이 끝난 직후, 바로 버튼을 눌러 무전을 날렸다. 아무리 주변 지형이 대부분 주저앉은 상태라 해도 하늘에서 보는 것만큼은 못할 테니까.
- 현우씨에요? 치직··· 지상은 뭐, 미쳤죠. 정신이 없어서 이제서야 말하는 건데 이것들 괴성을 지르기는 해도 폭탄을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받아낸다니까요? 고도를 낮추면 잡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위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어요.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움직임이 이상하다던가, 그런 것들이요."
- 음, 지금 탱크들 주변으로 나무 인간들이 몰리고 있다는 건 저보다 더 잘 아실 테고···. 서울역에는 이상하게 괴물들이 별로 없어요.
대부분은 제가 폭탄을 떨어트린 후암동에 몰려 있어요. 거기 완전 지형이 갈아 엎어져 있던데요? 어제보다 더요. 군데군데 간신히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있기는 한데, 이런 곳에서 그 최명철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도망 다닌 건지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십쇼."
- 넵! 물론이죠! 걱정마세요!
"······."
나는 무전을 종료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향한 채였다.
폭탄을 몸으로 받아낸다는 건 필시 변종을 이르는 말일 터다. 그러한 변종들이 일부러 요란하게 침입한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건 역시 무언가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되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이전부터 보였던 거대한 세계수이겠지. 변종들이 본능보다 명령을 따르고 있는 이상, 당초 계획인 소음으로 놈들을 일부나마 이끌어내서 소탕을 한다는 작전은 이미 틀려 먹었다.
우리와 군인들은 점점 몸으로 느껴지고 있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한 채로 계속 전진했고, 마침내 전력을 일부 분산시킬 서울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병력 손실없이 이곳까지 단숨에 도달한 건 분명 큰 성과이건만, 우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 작전대로 여기서 저격반과 탄은 진형에서 이탈하라. 후방 지원을 맡을 박격포 분대도 스퀘어 건물 근처에서 자리를 잡도록. 본대가 교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상.
- 알겠습니다! 저격반과 후방 지원 병력은 이대로 진형에서 이탈해 조속히 스퀘어 건물에 자리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담담하게 울리는 연대장의 지시에 속도를 살짝 높여 후미에서 이탈하는 군용 트럭 2대. 그 차량은 본대의 전차가 길을 터준 서울역 승강장을 지나 우측의 한강 대로로 쭉 빠졌다.
남산에 자란 거대한 세계수의 그림자에 반쯤 잡아 먹혀 음울한 분위기가 건물 외벽을 타고 흐르는 스퀘어 건물, 붉은 벽돌 위에 징그러운 초록 핏줄이 꿈틀거리는 잔해, 건물 위에 자리잡은 거목의 뿌리가 으스러트리듯이 뼈대를 옭아매고 있는 철골, 나무 거인의 무력화를 위해 후방에서 포탄과 저격으로 지원할 병력이 향하는 폐허.
바로 그곳이 도시와 숲, 인간과 괴물의 영역을 나누는 일종의 경계선인 것과 동시에 험난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스타트 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