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8 - 438. 돌파 (5)
푸화아악!
포연처럼 검은 입자를 사방으로 뿌려대며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쏘아진 검은 가시들. 그 가시들은 수십, 수백 개로 쪼개져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바뀌어 온 하늘을 뒤덮었다.
[까아아아악!]
하늘 위를 빙빙 맴돌고 있던 신아현과 까마귀가 기겁하며 격한 날갯짓을 통해 몸을 뒤로 물렸으나, 검은 가시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뒤로 물러나도 그 공간이 하늘인 이상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없었으니까.
"꺄아아악!"
결국 수십의 가시가 몸에 박힌 까악이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신아현의 비명 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꼬리 모터가 고장 난 헬기처럼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는 까마귀는 이내 약한 흙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이런 씹···!'
높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친 까마귀와 신아현이 걱정되었지만, 내게는 그 걱정을 이어 나갈 여유가 없었다. 오염된 세계수로부터 퍼진 검은 파장이, 그것의 속삭임이 지상에도 여파를 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속삭임을 제대로 들은 건 나 혼자. 허나, 잔향처럼 남은 그 잔재가 지상의 사람들을 휩쓴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량을 정차시킨 운전병들이나 수송칸에 탑승한 군인들이 머리를 붙잡으며 고통을 호소한다.
"정신 놓지마!! 일어나서 총을 들어라!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셈이냐!"
그들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적한 검은 입자를 쉽게 떨쳐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나, 지수, 예린, 엘리, 한세아는 상태가 조금 나았다. 체내에 보유하는 푸른 입자로, 정령과 바람의 가호로 검은 입자를 상쇄시킨 덕분이었다. 만약 한세아가 날개로 하늘을 떠 있는 상태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눈을 떴을 때인 예전과 달리 속삭임을 들었다고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유에 의해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릉
세계수와 지상에 박힌 나뭇가지들로부터 뿜어진 검은 입자가 하늘로 향하자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후둑- 후두둑-
쏴아아아아아···
한 방울씩 간을 보듯 떨어지던 검은 비는 눈 깜빡할 새에 장대비로 변했다. 투명한 빗물이 아닌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비가 잔해를 타고 흐른다.
날카로운 잔해의 단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죽어 쓰러진 괴물들에게 닿는다. 찢어지고 터진 부상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 사체를 강제로 조종하는 듯한 꿈틀거림이 이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끄르륵···]
이미 죽은 괴물에게 한 번 더 강제로 숨을 불어넣는 검은 비에 의해 괴물이 되살아난다. 그러한 현상은 이 괴물 한 마리에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변종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군인들이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죽은 그것들이 일제히 몸을 꿈틀거리며 빈자리가 생겼던 후방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끼에에에에에엑!]
부상이 치유된 것도 아닌 주제에, 눈알이 빠져 있거나, 머리가 그대로 터져 있거나, 사지가 엉망으로 꺾인 주제에 공기를 뒤흔드는 포효를 내지르는 변종들. 그 괴성은 우리에게 있어 전조였다.
우리 앞으로 더 큰 난관이 가로막을 것이라는 전조. 혹은 그런 사실.
검은 비를 맞은 나무 인간들과 각종 변종들의 기세가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에 길을 뚫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겨우 비등비등했던 기세가 한 번에 우리를 넘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정말 신이라는 말이야? 대체 어떻게···."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에 모두가 당황했다. 승기를 잡은 괴물들을 제외한 모두가.
"신이 아니예요! 저건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요!"
엘리가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을 향해 외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한번 떨어진 사기는 도통 회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인지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전방의 세계수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이 더욱 불리해지는 탓에 일부러 하늘이 매우 푸르렀을 때 작전을 시작한 것인데, 비를 강제로 내리게 할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동안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갖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비가 단순히 수분과 습기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검은 입자가 한가득 담겨 있다면 더욱 그러했다.
- 치지지직··· 1번 전차 기동 불능! 엔진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검은 나뭇가지의 장벽을 뚫기 위해 전진했으나, 결국 장벽을 밀어내지 못한 최선두의 전차가 다급한 음성으로 엔진의 이상을 알렸다.
전차의 후미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들이받은 탓에 엔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쏴아아아아아-
'아니면 이 비가 문제겠지.'
머리카락과 옷을 흠뻑 적시고, 볼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촉감은 지금 내리는 비가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어느 쪽이든 간에 전황이 더욱 불리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히 달리던 2번, 3번 전차도 크게 다른 상황이 아니었다. 그 전차들에게서도 다급한 무전이 전해진다.
- 여기! 이 괴물 새끼 좀 떨어트려 봐! 빨리! 이러다- 치지지직-!
전차의 힘에 속절없이 밀리기만 하던 변종들이, 나무 인간 변종이 검은 비가 강화시킨 괴력으로 엔진의 힘을 이겨 내기 시작한 것이다.
[끄르아아아악!]
끼리리리리릭!
쉴 새 없이 궤도가 돌아가며 끈적한 체액이 뿌려진 땅을 마구 긁어댄다. 전차들은 차체를 붙잡은 변종들을 떨쳐 내기 위해 포탑을 움직이면서 기총으로 공격해보기도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투두두두두!
끼긱- 끼기긱-
오히려 자신들을 툭툭 건드리는 기다란 포신이 거슬린다는 듯 포신을 붙잡아 포탑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차체와 포탑을 이어주는 연결부에서 고막을 날카롭게 찢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휘어지는 소리가 난다.
퉁퉁퉁퉁퉁!
급한 대로 전차를 보조하던 보병 장갑차가 점점 전차를 들기 시작한 변종들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비가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강한 저지력을 보여주던 40mm 기관포는 내는 소리에 비해 효과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저 껍질에 생채기를 겨우 냈을 뿐.
[키아아아아악!]
어차피 지금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변종 특유의 장갑과 질긴 근섬유로 버텨 내는 나무 인간 변종이었다.
- 이런 미친 괴물 새끼들이···! 조금만 더 버텨! 뒤로 넘어가면 진짜 좆된다고!
결국 원거리 지원사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보병 장갑차와 군인들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충각. 육중한 무게를 가진 장갑차로 변종들 다시 한 번 더 들이받는 것이었다. 탄이 통하지 않는다면 들이받아서라도 피해를 누적시키겠다는 의지였다.
- 알았으니까 뭐라도 해 봐!!
부르르르릉!
전차의 차체를 이리저리 돌리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무전과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가는 장갑차. 한층 불안해진 엔진음을 내며 앞으로 내달리는 장갑차는 이내 고집스레 전차를 붙들고 있던 변종을 들이받았다.
···콰앙!
퉁퉁퉁퉁퉁퉁!
차체의 구겨진 표면과 변종의 껍질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충격에 사방으로 비산한다. 한순간에 확 밀려난 빗물 사이사이에는 전차를 놓친 변종의 모습이 섞였다.
끼리리리릭!
겨우 괴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전차는 다급하게 지상을 긁으며 후진했다. 전차가 들릴 정도의 괴력에 여기저기 찢기거나 찌그러진 장갑들이 흉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궤도가 탈락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궤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떨림에 그것마저 머지않아 보이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차가 아직 기동할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해야만 했다.
[끄아아아━!]
투-쾅!
다시 잡으면 그만이라는 괴성을 내지르는 변종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뒤로 물러나던 전차가 발사한 포탄이었다. 지근거리에서 포탄이 격발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인간 변종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간다.
이어서 난쟁이들이 땅에서 솟구치게 한 가시에 의해 온몸이 꿰뚫린 변종은 예전이었다면 죽었을 공격에도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비가 놈을 죽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타타타타탕!
뒤따라 오던 두돈반에 탑승한 군인들이 사격으로 전신을 두들겼어도 놈은 죽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런 씨발! 안 뒤지잖아!!"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건만, 한순간에 불리해진 전황.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호목인 나무 거인마저 활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육중한 발걸음 소리로 자기 존재를 모두에게 드러낸 나무 거인이 지상의 사람들을 응시한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성은 군인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지금 들리는 이 괴성이, 간발의 차로 차량을 놓친 놈들의 손이, 자신을 뒤덮는 검은 그림자가 최대한 자신들을 보지 않았으면 했기에.
쾅! 콰쾅! 퍼엉!
후방에서 박격포 지원이 지속해서 이루어졌지만, 나무 거인은 포격의 충격을 굳건히 버티며 앞으로 움직였다. 간혹 날아오는 저격은 손을 들어 간단히 막았다.
[구오오오오오오!]
장대비를 옆으로 밀어낼 만큼 커다란 포효와 함께 나무 인간들을 깔아뭉개며 전진하던 전차와 군용 차량들은 황급히 기어를 바꿔 후진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앞으로 나서면서 짓밟았던 것이 우리라면, 이제 우리가 역으로 짓밟힐 차례가 찾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