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2 - 442. 59 (2)
저벅- 저벅-
나는 위에서 추가로 떨어지는 잔해가 있을까 싶어 주의를 기울이면서 격벽 앞으로 움직였다. 불길하게 여닫히고 있는 격벽이 꺼림칙하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여기를 지나가야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건만.
···끼리릭-쿵 ···끼리릭
여기저기 구겨지고 찢어진 격벽을 힘을 주어 미니 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바로 넘어가는 걸 보니 애초부터 내구도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쿵! ···쿵! ······쿵!
두꺼운 철문이 넘어가면서 난 소리가 뒤로 이어진 복도에 길게 울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일자형 복도를 타고 울리는 소리는 이내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팟!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움직임을 인식한 센서가 추가 보조등을 켰다. 내가 앞으로 가야하는 길이 여기라는 듯 순차적으로 복도를 따라 켜지는 보조등에 의해 해당 길목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격벽 너머는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복도보다 더 엉망이었다.
뜯어진 천장 타일에서 흘러나온 각종 전선과 케이블.
벽에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각종 배선 다발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전력이 아직 살아있는 덕분일까. 피복이 벗겨진 전선들 사이에서 스파크 튀는 소리가 간혹 들려온다.
벽면에 설치된 보조등과 벽면 디스플레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불빛, 무언가 재생되고 있는 화면에 따라 미약하게 들리는 고장 난 스피커의 잡음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디스플레이의 상태는 좀 더 나은 것인지 다채로운 색상이 움직이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우웅,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돌무더기와 흙더미.
한방 쏟아진 이후로 아무도 이 길목을 지나다닌 적이 없는 듯했다. 뿌옇게 바닥 표면을 덮고 있는 흙먼지가 처음에 쌓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누나."
그 풍경을 본 나는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내 예상과 달리 이곳에서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내 한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낸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은가.
다시금 이어진 기다란 복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합금으로 이루어진 문들이 보일 텐데, 이 또한 둘러볼 필요는 없다. 애초에 방이 몇 개 있지도 않고, 안에 들어있는 것도 대부분 망가져서 얻을 것이 없을 거야.'
칸이 말했던 합금으로 이루어진 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부에서 뭔가 터지기라도 한 듯 잔뜩 구겨진 형태의 문이었다.
"······?"
그 문을 보니 위화감이 강해진다. 외부의 공격에 의해 벽이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현재 보이는 광경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행해진 공격에 의해 시설이 부서진 듯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든 것이다.
딸깍-
나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뜯겨져 나간 연구실, 혹은 연구동 일부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방 내부는 완전히 망가진 것인지 불이 들어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손전등을 켤 수밖에 없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한번은 확인하고 넘어가야 후방이 안전할 것 같기에 한 행동이었다. 아직까지 나무 인간이나 다른 변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으나, 혹시 모르는 일 아니던가. 눈으로 한번 빠르게 훑어보는 정도는 지나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
내부는 무언가를 연구 중이었는지, 아니면 제작을 하는 중이었는지 몰라도 잡다한 설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과거에 그랬을 것 같다는 추측이다. 지금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살이 난 상태였으니까.
커다란 공간 내부에 자리잡은 기계식 고정 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각종 부품의 잔해, 사방으로 밀려난 테이블과 의자들, 깨진 머그컵, 잔뜩 구겨진 파일철, 눅눅하게 녹아있는 보고서 종이.
그리고 벽에 기대져 있는 형상의 흰색 가운. 아니, 백골.
"······!"
손전등의 둥근 불빛에 들어온 것을 목격한 나는 흠칫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골에게 접근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마지막으로 비춰본 문 근처 벽에 백골로 변한 누군가의 시신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문 근처에 있었던 것일까.
큰 부상을 입어 여기까지만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일까.
복부가 뻥 뚫린 가운을 덮고 있는 백골 근처에는 보고서처럼 보이는 파일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일단 그것을 챙긴 뒤, 다시 바깥으로 나와 이동을 재개했다.
여기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이동하면서 봐도 충분했다. 글씨가 눅눅한 습기 탓에 번진 상태였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알아볼 수는 있는 정도였다.
「프로젝트 코드네임: 가디언 프로젝트 일련번호: WTGD-0001 연구 총책임자: 엘트라 실험 목적: 성역을 지키는 골렘을 만들기 위한 실험이다.
실험 전 기록: 체구 3m에 달하는 아스트라제 프레임과 코어, 합금강 장갑으로 이루어진 해당 개체는 프로토타입으로서 향후 양산을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실험 후 기록: 가혹한 조건에서 실험을 진행한 결과, 눈에 띄는 특성이 드러났다.
ㆍ이 개체는 피아 식별 능력이 미숙하다. 목적 혹은 임무를 하달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구분하지 않고, 전부 배제한다.
ㆍ해당 개체의 장갑은 물리적인 타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골렘, 통칭 가디언으로 명명된 이 개체를 이루고 있는 소재는 우리의 잃어버린 고향, 아스트라의 물질이다. 현재는 이 특수 소재가 충격을 흡수한다고 판단되었다. 입자 기술을 통한 공격은 유효하다.
ㆍ추가적인 실험을 통해 개체는 총기류의 타격에도 피해를 회복하는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기능이었으나,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피해를 수복하기 위해 입자를 사용하는 기술을 스스로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 이는 나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이어질 소지가 충분하다. 안전을 위해 해당 개체를 완전한 상태로 두지 말 것.
ㆍ해당 개체는 어디까지나 프로토타입, 실험용 개체로서 우리의 제어 하에 놓기 위해 약점인 코어를━━ 붉은━━관련 내용은 후술한다.」
"···뭐야."
이동하면서 보고서 내용을 정신없이 읽어 내리던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중간 부분부터 내용이 뚝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양을 떠올려보면 이 뒤를 잇는 내용이 적힌 페이지가 나와야 하는데,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나온 글씨가 대신 나왔다.
아무리 종이를 뒤집어 봐도 내가 볼 수 있는 내용은 그게 끝. 결국 나는 내가 본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골렘이라고?'
연구동 내부에는 골렘으로 보이는 잔해는 딱히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내부에서 가해진 충격에 의해 문이 뜯겨 나갔으니 그 골렘이라는 게 문을 부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그렇다면 그 골렘은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건 내가 알 수 없었다. 꾸준히 앞으로 이동하면서도 보이는 거라곤 돌 부스러기나 깨진 유리 조각뿐이었으니까.
'총 책임자가 엘트라?'
엘트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동일한 이름. 내 기억이 맞다면, 의왕시 생존자 캠프에서 조우한 그는 엘리와 같은 특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연구동에 죽어 있는 그 시신은 누구였을까. 이 또한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먼지에 의해 누렇게 변한 가운에는 그 사람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 백골을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은 딱 하나. 바로 성인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나를 안도케 했다. 적어도 그 시신이 누나가 아니라는 이야기나 다름 없지 않은가.
계속해서 복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바로 그때.
팟!
벽면 디스플레이에 환한 빛이 들어오며 어떤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기다란 스크래치가 새겨져 있을 뿐, 화면에는 이상이 없는 모양이다.
영상이 재생되면서 스피커가 잡음과 함께 소리를 토해냈지만, 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광고에 가까운 영상을 홀린 듯이 바라볼 따름이었다.
[더 이상의 아픔은 없습니다]
병원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온다. 차트를 들고 있는 의사가 환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가족 혹은 지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뒤편으로 화창하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장면이 전환된다. 이번에는 어느 골목길이다. 천식을 앓는 사람일까. 호흡기를 입에 대고 숨을 천천히 들이키는 그 사람은 다음 장면에서 서랍에 호흡기를 넣어두고 있었다. 뻥 뚫린 산책로에서 숨이 차도록 달리기도 했다. 마치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병을 전부 떨쳐냈다는 듯이.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합니다]
사람을 홀리는 푸른 입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허공에 수놓아지는 장면이 나온다. 무기질적인 도시의 모습이 아닌 녹음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도시가 보인다.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는 가족들과 깨끗한 물을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 졸린]
모든 장면이 지나가고 졸린사 로고가 떠오른다. 그 로고마저 사라지자 영상 재생 시간이 끝난 듯 디스플레이의 빛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내가 서 있는 복도도 다시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