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43화 (444/497)

Chapter 443 - 443. 59 (3)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일까.

"···후우."

영상이 끝나자마자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벽면 디스플레이의 빛 대신 빈자리를 채운 보조등의 희미한 빛을 보며 몸을 돌렸다. 그렇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졸린 사의 로고가 나타나며 끝나는 영상. 방금 내가 본 영상은 입자 기술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혁신 그 자체인 정화 기술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런 영상은 아마 자칭 높으신 분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제작된 거겠지.

공간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복도를 꽤 걸었다고 생각했건만, 칸이 말한 홀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아직 보조등이 밝히지 못해 어두컴컴한 공간이 보일 뿐이었다.

아니, 복도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어떤 기기가 경계 중인 내 시야에 문득 들어왔으니 어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녹음기?'

이제는 거의 사장된 MP3와 유사한 디자인을 가진 그 기기에는 매우 작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일종의 기록 장치, 그런 류의 기기로 보인다는 추측을 품은 채로 떨어져 있는 기기를 주워 들었다.

혹시나 작동이 되나 싶어 아무 버튼이나 눌러본 것과 동시에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기 내부에 저장된 음성 파일이 버튼을 누름에 따라 자동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꺼져 있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저장된 파일이 주르륵 나열되는 것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였다.

「#음성 기록-3 여성: 엘트라, 이 보고서 내용이요. 그 깡통이 스스로 능력을 터득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엘트라: 보고서에는 사실만 적혀 있다네. 내가 직접 주석까지 달아주지 않았나. 그리고 깡통이라고 부르지 말게. 엄연히 가디언이라는 프로젝트 명이 있거늘.

여성: 깡통이라 부르는 게 왜요? 이게 깡통이 아니면 뭐라구. (무언가 단단한 것을 두드리는 소리)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요. 중요한 건 우리가 오늘 발현된 그 기능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이게 말이 되는 거에요?

엘트라: (종이 뭉치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 흠, 아무래도 코어 때문이겠지. 코어는 입자 기술의 집약체이니까. 좀 더 나아진다는 입자의 특성상 그 프로토타입이 자체적으로 뭔가를 깨닫는 것도 영 말이 안되는 건 아닐세.

여성: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요.

엘트라: (코웃음치는 소리) 조금? 말은 바로 해야지. 매우, 위험한 거다. 그러니 내가 첨부한 내용대로 골렘에 관련된 실험은 일시적으로 중단해.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되니.

여성: 진짜요? (주변에 다른 사람도 있었던 것인지 약하게 들리는 환호성 소리) 안 그래도 게이트 프로젝트 때문에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잘 됐네요. 알았어요. 이 프로젝트는 일단 여기서 중지할게요.」

방금 전에 내가 본 골렘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파일은 재생 시간이 다 되어 뚝 끊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재생할 수 있는 파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저벅저벅-

나는 여전히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앞으로 움직였고, 다음 파일을 재생하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딸깍-

조금은 뻑뻑한 감이 있는 버튼이 눌리자 기기에 저장된 목소리가 곧장 튀어나온다.

「#음성 기록?7 엘트라: (잡음과 함께 들리는 요란한 돌풍 소리) 이런 젠장! 에너지 공급 중지해! 연결 해제하라니까!

남성: 아니! 에너지 주입 상태 유지해! 맙소사, 진짜 문이 열리다니! 이건 혁명이야!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이 기술은 인류를 한 단계- 아니, 수십 단계를 진보시킬 거다!

엘트라: 당장!! 연결 해제하라니까!! (뒤엉키며 싸우는 소리, 기기가 부서지는 소리) 여성: 네, 네!! (두려움에 빠진 목소리, 이내 잦아드는 바람 소리)」 한순간 복도를 크게 울린 고함 소리들은 당시 상황이 꽤나 심각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록도 매우 짧았다. 중간에 몸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니, 어쩌면 버튼이 잘못 눌린 걸 수도 있었다.

「#음성 기록-8 엘트라: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소리, 어이없어하는 목소리) 자네, 지금 뭐하나?

여성: (우물쭈물하는 목소리) 아니, 팀장님 화 좀 식히시라구···. 바람 보내고··· 있는데요. 이렇게 손짓으로 파닥파닥만 해줘도 패널을 통과하면 선풍기 약풍 수준으로 변하잖아요. 어때요. 시원하시죠?

엘트라: (한숨 소리) 그 행동을 보니 가라앉으려던 화도 다시 솟는 기분이야. 가속 패널을 그런 식으로 쓰지 말게. 그보다 그걸 왜 여기까지 가져온 건가? 어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놔!

여성: 아잇, 진짜 쩨쩨하게. 아파보여서 약도 발라줬구만.(투덜거리는 목소리, 이내 문이 닫히는 달칵 소리) 」

이번에는 가속 패널이라는 장비가 언급되는 기록이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 외형 정보가 나오지 않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가속이라는 단어 뜻대로 통과시킨 물체를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장비인 듯했다.

「#음성 기록-17 남성: (환희에 찬 외침) 우리가 괴물이라고? 아니!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입은 것이다!

엘트라: ···틀렸어. 오염이 이미 온 몸에 퍼진 상태야. 더 늦기 전에 소각해야 해.

남성: 한낱 하찮은 인간이! 위대하신 어머니의 가죽을 뒤집어 쓴다니 그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엘트라: 보안팀!! 뭐하고 있나! 빨리 제압해!

남성: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나는 하찮은 너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그런 나를 감히 이렇게- 끄아아악! 지구를, 정화해야만···!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 엘트라: ······어째서 오염이 발생한 거지? 대체 어째서? (황급히 달리면서 외치는 소리) 메이벨!! 씨앗의 파편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음성 기록은 엘트라가 다급하게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끝났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었나 보다. 오염이 발생했다는 걸 보니 예상치 못한 검은 입자가 사고의 원인이었겠지.

[#음성 기록-3]

[#음성 기록-4]

[#음성 기록-5]

[#음성 기록-6]

[·········]

[#음성 기록-17]

다른 기록도 들어보기 위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테이프가 휘감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류 발생으로 다음 파일이 재생되지 않았다. 파일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결국 재생되는 건 거의 마지막 페이지, 그것도 끝자락에 있는 기록이었다.

「#음성 기록-19 여성: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연구 개체 폐기, 문을 여는 매개체인 세계수의 씨앗이 오염된 것을 발견, 해당 개체는 즉시 봉인 절차로 이행, 게이트 프로젝트 전면 중단···. (보고서가 테이블에 던져지는 작은 소리) 요즘 되는 일이 없네요. 안 그래요, 엘트라? 솔직히 고향이 그립잖아요.

엘트라: (한숨 소리)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이 그립기는 하지. 허나, 그건 내 욕심에 불과한 일이고 이 별에 매우 해가 되는 일이야. 어머니의 씨앗에 재앙의 파편이 발견된 순간,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어머니라 부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여성: (무언가 마실 것을 홀짝이는 소리)

엘트라: 문을 넘어왔을 때부터 오염이 되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얼마든지 재앙으로 화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제서야? 어째서 하필 지금 오염이 발견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군. (옅은 침음 소리)

여성: 변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다는 말은 아니죠?

엘트라: 아니, 자네 생각이 맞아. 휴면 상태인 재앙이 활성화되면 본래 씨앗이 가지고 있던 본질은 완전히 뒤틀리니까.

돌연변이화가 아닌 새로운 본질을 가진 것으로 재탄생하는 거야. 질병의 영역이 아닌 저주의 영역. 그러니 이제 우리가 어머니라 부르는 존재의 잔재는 하나도 남지 않았겠지. 참으로 죄스러운 일이다. 고향을 잃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겨우 남긴 유산마저 봉인해야 하는 지경이라니.

여성: 기운 내요. 오염이 발견된 건 분리된 3개의 씨앗 파편 중 1개라고 하잖아요. 나머지 파편 2개가 모자라면 그 어머니라는 분도···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부활이라고 하는 게 맞나? 아무튼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은 전부 봉인 절차에 들어갔지만 나중에라도요.

엘트라: 위로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이번에는 자네가 틀렸군. 요즘 들어 연구소 내부에 자질구레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알고 있나?

여성: (의자가 당겨지는 소리) 갑자기? 뭐 알긴 알죠. 당장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원인 미상의 폭발이 일어났니 뭐니 해서 방송 나왔잖아요. 저번 소동과 달리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 다행인 일이구요.

엘트라: 내 감이지만 방금 발생한 그 원인 미상의 폭발은 오염된 씨앗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네. ···그때 그 소동처럼.

여성: (애써 피식 웃는 소리) 감이라면서 틀림없다는 말은 또 뭐에요?

엘트라: 그만큼 확신한다는 말일세.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방식인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해. 요즘 들어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는 원인이 오염된 씨앗 파편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내가 직접 나머지 두 개의 씨앗 파편도 멀리 떨어트려서 봉인해야 한다고 청원한 것도 그 때문이야. 분리된 씨앗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려는 성질과 서로의 상태를 공유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성: 아···.

엘트라: 우리는 통제불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서는 안되고, 통제가능한 실험만 진행해야 해. 분리된 씨앗의 공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반드시. 누군가의 실수로 터전이 파괴되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거든. 씨앗이 없다고 해도 입자 기술 연구는 지속할 수 있으니 언젠가는 어머니가 뿌리를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겠지. 그래,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여성: ···그래서 매번 그렇게 기록을 남기는 거에요? 여기 연구소장님처럼?

엘트라: 맞아. 그게 내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이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근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를 따라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아무튼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프로젝트부터는 좀 더 격리된 공간에서, 좀 더 엄격한 관리 하에 진행되어야겠지.

여성: (질색하는 목소리) 어휴, 여기서 좀 더 격리된 공간은 산 밑이 아니라 바다 밑 밖에 없다구요. 좀 봐주세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적합자 찾는 것도 다 물 건너갔겠네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오는 그 사람 제 취향이었는데.

엘트라: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가 순간 멎는다) ······자네 친구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여성: 그게 왜요? 어차피 좋은 소식으로 이어질 일도 없는데 감상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 남자 보러 갈 때마다 메이벨 걔가 눈치를 얼마나 주는지 알아요?

엘트라: (떨떠름한 어조) 글쎄. 이건 내 생각인데 그건 메이벨, 그녀가 문제가 아니라 자네가 문제인 것 같군.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서 커피를 내밀면 누구라도 질색할 테니.

여성: (한숨 소리) 이상하네. 저 어디 못났어요? 아닌데···, 이렇게 하면 절반은 넘어오던데···.

엘트라: (한숨 소리) 제발 자중 좀 하게···.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자네, 내 프로젝트에 자원한 것도 우리 팀원들 얼굴 보고 들어온 건 아니지?

여성: 어···, 맞을 걸요? 한 절반 정도?

엘트라: 맙소사. 어쩐지 시도 때도 없이 커피를 건네더라니.

여성: 우리 팀장님 건 제 마음을 더 담았어요! 달죠?

엘트라: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지. 다음부터는 마일드 말고, 화이트 골드로 타오게. 나는 그게 좀 더 입맛에 맞더군.

여성: (어색한 웃음 소리) 커피 믹스인 거 언제부터 알았어요?

엘트라: 처음부터. 누구 덕에 매일 마시고 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여성: 커피 머신이 있는 건 알지만 제가 기계는 잘 못 다뤄서···. 그래도 믹스 맛있잖아요. 그쵸? 저는 머신으로 뽑은 것보다 믹스가 더 좋던데.

엘트라: 나도 믹스가 낫기는 한데···. 자네는 보면 볼수록 대체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자네 취향은 잘 알았으니 이제 농땡이 그만 피우고 내 방에서 나가게. 근무 시간에 또 이상한 일기장 쓰다가 걸리면 이번에는 진짜로 감봉할 테니까.

여성: 네네~, 다음에는 화이트 골드로 타올게요! (문이 열리고, 이내 닫히는 소리)」

재생 종료.

더 이상 재생되는 음성 파일은 없었다.

그리고.

'복도의 방들을 지나면 그 끝에는 갑자기 확 넓어지는 홀이 나올 거야. 그곳에 증폭기를 관리하는 각종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을 거다.'

칸이 말했던 홀이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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