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4 - 444. 55 (4)
난쟁이 칸이 일러준 길을 따라 홀을 향해 걸어갔고, 중간중간 다른 정보들도 습득할 수 있었다. 연구물의 성과를 기록하기 위한 보고서들이 복도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수호자 실험, 가속과 반발 패널. 그리고 문.
제 2연구소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실험들. 그 끝은 전부 폐기라는 결과로 동일했다. 내 누나에 대한 이야기가 간접적으로나마 나오기도 했다. 허나, 별 소득은 없었다.
단순히 누가 그랬다더라, 누구라면 그렇게 했겠지, 라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칸이 말했던 대로 연구동에서 멀쩡한 장비들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다른 무엇보다 내 머리를 잠식한 건 하나의 의문.
여태까지 우리가 씨앗을 함부로 다뤘기에 씨앗이 결국 폭주하고 말았고, 그 결과로 세상이 이렇게 변한 줄 알았었는데. 엘트라의 음성 기록을 들어 보면 그게 아닌 듯 했던 것이다.
단순히 이 음성 기록들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씨앗이든 무엇이든 재앙이라 불리는 것에게 오염되면 그 본질을 잃어 버린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다.
개체의 변이가 아닌 재앙으로의 재탄생이라니. 그렇다면 내가 눈을 뜬 직후에 들었던 속삭임들은 폭주한 세계수가 아닌 세계수를 잡아먹은 재앙이 내는 소리였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세계수를 불태운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재앙이기에 더욱 불태워야만 했다. 결국에는 본질을 잃어 버린 세계수를, 폭주하는 재앙을 막아야 하니 말이다.
어느덧 나는 각종 장비가 설치된 홀에 도달해 있었다. 전자 장비 특유의 가동음이 귓가에 어렴풋이 들린다.
어렸을 적 뉴스에서나 보았던 NASA 관제 센터와 흡사한 디자인을 가진 홀은 전면부의 격벽과 연결된 형태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디스플레이, 기다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모니터들, 넘어진 의자, 눅눅해진 종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키보드와 머그컵, 찢어져 솜이 튀어나온 방석.
그리고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는 화면들.
대부분의 장비가 엉망으로 방치된 풍경이 보인다.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스윽-
먼지가 내려앉아 화면이 가려진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먼지가 밀려나는 것과 동시에 관측 장비가 내게 어떤 진척도를 보여 주었다.
[현재 행성 테라포밍 진척도: 87%]
<대$%#! ···조정 중> <@#분포 ···조정 중> <^기장# ···조정 중> <@#@소 ···완료됨> <**^탄& ···조정 중> <······> <수질%!# ···완료됨>
"···87퍼센트."
나는 화면에 뜬 숫자를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화면이 깨지고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한 듯 글자가 제대로 표기되지 않았지만, 이 화면이 내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오염된 세계수가 지구를 얼마나 바꾸었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
나는 곧바로 시선을 떼고 다른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지금 내가 봐야 하는 건 무엇을 조정하는 것인지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고 있는 화면이 아니라 증폭기 상태를 보여주는 모니터였으니까.
상태를 확인해야 증폭기를 터트리든 가동시키는 버튼을 찾아서 누르든 하지 않겠나.
옆에 있는 모니터의 먼지를 쓸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기기는 멀쩡하지만 프로그램이 오류가 났는지 기록이 띄엄띄엄 저장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근무자의 기록 혹은 따분함을 달래기 위한 잡담 노트일까. 날짜 별로 일기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2020년 12월 16일] 와 이게 대체 무슨 일? 팀을 마구 해제시키더니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로켓 쏘느라 맨날 돈 없다고 쪼아대더니 이런 프로젝트는 또 언제 시작한 거야. 갑자기 보너스라고 돈도 막 주고.
돈이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네. 원래 다음달에 그만두려고 했지만, 일단은 보류!
[2021년 1월 3일]
에휴, 진이 빠진다. 진이 빠져. 뭔 놈의 보안 서약이 이렇게 많은 건지 손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네. 그래도 눈호강은 실컷 해서 좋았다. 내 서른 생에 그렇게 잘생긴 사람들은 첨 봤단 말이지.
진짜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인가? 그럼 진짜 외계인? 지구 바깥의 외계인들이 지구 사람들과 똑같은 아니, 똑같지는 않고. 아무튼 거의 유사한 외형을 하고 있다고 알려지면 학계가 완전 뒤집어지겠지? 벌써 유튜브에 뜰 영상 제목들 생각나네. 세계가 충격 어쩌구 미국이 호소하고 저쩌구!
처음에는 솔직히 몰카인 줄 알았는데, 나 같은 말단에게 몰카를 할 리는 없고 무슨 이상한 반짝이까지 보여주니 믿을 수밖에 없었지. 그 빛을 쬐니 <기록 파기됨> -도리 아니겠어?
아직는 신종 사이비 같은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아무렴 뭐 어때.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안 아프니까 그냥 신세계네 신세계야.
[2021년 1월 9일]
시끄럽다.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시끄러움이 여기에 대신 담겼으면 좋겠다. 아침부터 뭔 연구를 이렇게 요란하게 하는 거야. 이제 막 출근한 사람 배려 좀 해 달라고. 오후에는 총까지 쏜다던데 이래도 되는 거 맞나?
여기 한국 아니야? 이상하네, 한국 맞는데···. 총은 또 어디서 구해 온 걸까. 정부 쪽 사람이 주고 갔나? 모르겠다~ 골렘이고 뭐고 저쪽 연구동 소란이 끝날 때까지 월급 루팡하면서 커피나 마셔야겠다~ [2021년 1월 15일]
오늘은 너무 바쁘다! 이거 쓸 시간도 없어! 난쟁이들이랑 잘생긴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거 봐야 해!
[2021년 1월 16일]
<기록 파기됨> [2021년 1월 18일]
세계수의 씨앗을 연구하던 동료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상하네. 이틀 전만 해도 여기에 뼈를 묻을 거라며 주정까지 심하게 부렸으면서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관둔 거지? 진짜 무슨 일 생겼나? 톡이라도 보면 답장 좀 해주지. 사람 서운하게.
나는 여기 절대로 안 그만둘 거야. 영화 속에서나 보던 사람들을 보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할 수도 있는 데다가 월급까지 빠방하게 받는데 여길 왜 그만둬? 난 진짜 뼈를 묻는다. 보안 서약이 좀 많긴 하지만 그게 뭔 대수야. 통장 잔고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2021년 1월 23일]
<기록 파기됨> [2021년 1월 26일]
<기록 파기됨> [2021년 2월 27일]
요즘 연구소 분위기가 좋지 않다. 사실 우리 팀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진짜 살벌한 기류가 흐르는 곳은 다른 프로젝트 팀이다.
도중에 발생한 심각한 오류 때문에 일시적으로 연구를 전면 중단해서 그런 거겠지? 우리 팀은 이대로 쭉 갔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메이벨이 다 해결해 줄 거야!
[2021년 3월 2일]
농담이 아니라 오늘 연구소는 진짜 뭔가 이상하다. 동료한테 몰래 물어보니 연구소장님이 실험을 재개해야 한다고 난동을 피웠다고 한다. 이럴 때 메이벨은 어디 간 건지 보이지도 않고···. 빨리 나타나서 연구소장님을 말려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갈수록 소장님 상태가 이상해지던데, 퇴사 안하시려나? 일단 오늘은 쥐 죽은 듯이 지내야겠다. 불통 튀는 건 사절이라고.
[2021년 3월 3일]
<기록 파기됨> [2021년 3월 6일]
<기록 파기됨> [2021년 3월 10일]
<기록 파기됨> [2021년 4월 3일]
···엘트라, 왜 저를 두고 나간 거예요. 무섭단 말이예요···. 차라리 저도-<기록 파기됨>.
[2021년 4월 6일]
나는 여기 있어도 메이벨에게 도움이 안 돼. 이렇게 된 이상 나는···.
[2021년 4월 7일]
살고 싶다. 살고 싶지만. 미안, 메이벨. 혼자 도망쳐서 미안해. 진짜로 미안.
<2021년 4월 7일부로 계정 삭제됨- 해당 보안 등급으로 이 이상 기록 불가>
"······."
나는 홀의 구석, 그림자에 잠겨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잔뜩 헤진 상태의 가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시선이 더 위로 올라가 가운의 주인을 확인하기 전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걸 볼 시각은 없었다.
황급히 다음 모니터를 살펴보았고, 다행히 이번에는 증폭기 상태를 보여주는 모니터였기에 귀한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증폭기: 안정화 → 비활성화 상태]
※ 원격으로 활성화 불가능. 해당 장치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최고 관리자 승인 및 접근 필요.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증폭기가 안정화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정보였다. 비록 현재는 비활성화 상태라고는 하지만 다시 활성화시키면 그만인 일이 아니던가.
'···누나.'
홀에도 누나의 흔적이 없으니 누나는 분명 증폭기가 있는 곳에 있을 거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리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깜빡깜빡
옆자리의 모니터의 화면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화면은 계속 점멸되고 있는 중이었다.
톡톡
나는 그 화면이 깜빡거릴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뭔가 규칙을 가지고 깜빡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스 부호인가?'
예전에 누나가 군대에서 이런 건 안 배우냐며 조잘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덕분에 화면의 이상함을 감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너무 희미해서 신호를 알아보기에는 머릿속에 신호와 매치되는 단어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도 아닌데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 희미한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가며 신호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느껴지는 직감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규칙을 찾은 결과는 이러했다.
· · · · ? · · ? · · · ? · · · ? · ·
나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