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45화 (446/497)

Chapter 445 - 445. 51 (5)

· ·    · · ? ·  · ?  · ·  · ? · ·  ·  ? · ·

I failed.

나는 실패했다.

이것이 점멸하는 모니터가 내게 알려주는 말이었다. 얻어걸린 신호인 것치고는 너무 공교로운 말이지 않은가.

"···아니야."

나는 애써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증폭기가 있는 곳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내 몸을 잠식해가는 불안감이 점점 더 커져 가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허나,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이 현실화되고 있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지금 연구소 내부가 엉망인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은커녕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누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실패로 인한 결과물일리가 없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증폭기가 안정화 상태라고 하고 연구소 내부도 조금 엉망이 되었을 뿐, 전력과 장비가 살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래, 우리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나는 쉴 새 없이 깜빡이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증폭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홀을 지나쳤고, 곧장 'ㄱ'자 복도를 향해 달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를 말들을 쉴 새 없이 속으로 되뇌면서.

지금까지 사방을 경계하면서 움직였던 것과 달리 홀을 지나고 나서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주변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 순간에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하던가.

최대한 빠르게 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주변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편, 시간이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단 한 가지만을 바랐다. 부디 그 실패했다, 라는 말이 누나가 남긴 말이 아니기를.

복도 중간중간 규칙적인 간격으로 설치된 격벽들은 내가 부수거나 다른 장치로 올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올라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움직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올라간 상태에서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다. 그렇다는 말은 강제로 열린 것이 아닌 누군가의 의지로 문이 열렸다는 말이겠지.

이윽고.

- 치지직···

칸이 말한 'ㄱ'자로 꺾이는 복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무전기에서 잡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움직일수록 그 잡음은 점점 더 커졌다. 무전이 다시 연결될 기미가 보이는 것이다.

- 강화탄 치지지직- 재사격 가능-치직-까지 앞으로 10초! 버텨요!

- 다들 들었지! 10초만 더 버텨봐라! 그럼 다시 한 번 더 숨을 돌릴 수 있어!

- 으아아-치직-아악! 밀리지 마!!

- 화염 방사기-치지직- 뭐 해! 저기 벽 넘어오잖아! 가서 막아!!

조금씩 이어지던 잡음은 순식간에 격한 무전으로 바뀌었다. 매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들이 내가 지나가는 복도에 울린다.

변종들의 괴성과 섞인 그 고함이 복도를 울릴 때마다 지하가 흔들렸다. 고함이 아닌 지상에서 터지는 폭발 탓이었다. 어쩌면 나무뿌리가 움직이는 탓일 수도 있었다.

쿠르르릉···

바닥을 내딛는 발에 전해지는 진동이 다리를 타고 내 몸을 흔든다. 쭉 뻗어진 복도를 달리는 건 나 혼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도, 장비도 없었다. 그러니 넘어지지 않게 내가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두둑-

천장에 붙어 있던 흙먼지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흙과 돌 부스러기들이 나를 툭툭 건드린다. 눈을 따갑게 만드는 그것들을 나는 그저 거칠게 닦아낼 따름이었다.

그리고.

'홀을 지나 안쪽으로 더 파고들어 가면 'ㄱ'자 코너가 나올 텐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지나온 격벽과 달리 매우 두껍고 커다란 문이 있을 거다.'

나는 마침내 연구소 정문보다 훨씬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문이었다. 칸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의 힘으로 부수지 못할 정도로 보였다.

문이 폐쇄되었다는 걸 알리는 적색 램프와 고정 장치가 다른 곳과 달리 마모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문이 조금 찌그러져 있기는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 인증 없이는 절대로 통과하지 못한다는 문. 하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그 말은 반대로 보안 인증만 할 수 있다면 통과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나는 연구소 정문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보안 장치에 손을 올렸다. 괜스레 떨리는 손을 쥐었다 피면서.

[접근 권한 확인 중]

무기질적인 음성이 나오고, 보안 장치에서 빛이 흘러나와 나를 스캔한다. 램프의 적색 빛이 돌아가며 장치가 가동 중인 것을 알렸다.

[보안문 개폐 가능 권한 소지를 확인. 문을 개방하시겠습니까?]

"···개방."

[음성 명령 확인. 문 개방합니다]

어지럽게 돌아가던 램프의 적색 불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문을 단단히 고정시키던 장치가 풀리며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크그그긍- 끼이익···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고막을 날카롭게 찢는 소리가 섞인다. 벽과 문의 틈이 점점 벌어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자세를 낮춰 문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보안문의 특성상 최대한 빨리 들어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내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문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이 순간에도, 지상에서는 변종들과 싸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을 텐데. 그러니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보안문 밑을 기어 증폭기 보관소 내부로 무사히 진입한 순간.

[침입자 인식]

내가 본 것은 살아 있는 누나가 아니라, 무기질적인 시선을 보내는 골렘이었다.

*** 사각형 구조를 가진 증폭기 보관소. 이곳은 눈에 띄게 파괴되어 있었다.

돔 형태의 유리 온실.

온실은 유리를 지지해주는 철 기둥 말고 전부 깨져서 무너져 내렸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온실 속 흙에 퇴비 대신 뿌려져 있었다. 내부를 미약하게나마 밝히고 있는 천장의 빛에 의해 그날카로움은 배가 되었다.

그 온실 속에서 자라는 식물.

증폭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용도인 식물인 것일까. 지상의 오염된 식물이 기어코 지하까지 내려와 뿌리를 내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이름 모를 식물이 보관소 내부를 뒤덮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벽면을 타고 자란 넝쿨들 밑에는 작은 종 형태의 꽃이 자라 있기도 했다. 은방울꽃이었다.

바닥을 뒤덮은 여러 잔해들.

천장에 붙어 있던 타일이나 철근들이 토사와 함께 무너져 내려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그 잔해들이 떨어진 충격에 의해 바닥에 수많은 금이 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보관소 한 켠을 차지한 커다란 수정.

한눈에 보자마자 저것이 증폭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구잡이로 떨어진 잔해 들을 막기 위함인지 수정 표면에 장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장막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 수정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비활성화 상태이기 때문이겠지.

보관소 중앙에 자리를 잡은 골렘.

불완전한 형태를 가진 그것은 보관소 내부로 들어온 나를 적대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내부로 들어왔을 뿐이지만, 나를 적대한다는 건 내부로 들어온 모든 것을 적대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형태는 조금 다르긴 해도 전체적인 외형은 내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보고서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하니 골렘이 확실할 것이고.

눈을 바삐 움직여 누나의 흔적을 찾았으나 보이는 건 점차 내게 다가오고 있는 그것과 비활성화 상태의 증폭기뿐이었다.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항상 그녀가 입고 있던 흰색 가운조차도.

[침입자를 배제합니다]

수호자 프로젝트, 프로토타입의 골렘. 놈은 자신이 내뱉은 말처럼 나를 배제하기 위함인지 거대한 한쪽 팔을 들었다.

"누나!! 있으면 대답해!!"

답답한 마음에 그리 외치며 눈을 여기저기 굴려보아도, 여전히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증폭기가 있는 위치를 골렘이 가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증폭기를 활성화시키려면 놈을 제압해야 할 듯했다. 멈춰 보라고 외쳐보아도 골렘은 적대적인 행동을 지속하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없는데···!'

속으로 그리 소리쳐보지만 돌아오는 건 골렘이 자기 팔을 바닥에 내려치는 모습이었다.

콰-아앙!

주먹이 바닥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유형의 충격파가 내게 쏘아졌다.

"······!"

허공을 일렁거리게 만들 정도로 강한 힘에 나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충격파는 내 뒤에 있던 보안문을 대신 강타했다.

터엉-!

굉음과 함께 문이 구겨졌다. 그토록 거대하고 두꺼운 문이었는데, 놈이 날린 충격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문이 움푹 파이며 구겨지는 형상은 첫 번째 연구동의 문이 부서진 형태와 거의 동일했다.

후웅!

문을 두드려서 단숨에 망가트리고도 힘이 남은 충격파가 옆으로 퍼진다. 사방으로 터지는 돌부스러기들이 내 몸을 날렸다.

우당탕!

"콜록! 콜록! 이런 씹···!"

충격파의 힘으로 옆으로 날아가듯이 굴러간 나는 폐부를 잠식한 흙먼지에 기침을 토했다.

쿵!

내가 둔중한 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놈이 지척까지 접근한 이후였다.

골렘이 거대한쪽 팔을 다시금 든다.

빠르게 움직이는 내 시선에 보이는 건 내 등 뒤에 있는 벽.

이어서 내린 판단은 벽을 등진 상태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

충격파가 벽면을 만나면 주변으로 퍼지는 걸 몸소 깨달았으니 나는 최대한 트인 공간에서 싸워야만 했다. 구석에 몰리는 순간, 놈이 쏘는 충격파가 내 몸을 뒤흔들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안 그래도 힘든 싸움이 더 힘들어지고 말겠지.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런 행동은 골렘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이리저리 튕기는 힘에 속절없이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침입자 접근 확인. 공격 유형 변경]

그리 말한 놈은 바닥을 내려치는 것에서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것으로 자세를 바꿨다. 골렘의 팔 내부에서 끼기긱, 거리는 소리가 나며 놈의 주먹이 말아졌다.

콰가가가각!

나는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땅 울림으로 내 발밑에 벽을 세웠고, 골렘의 주변으로는 가시를 솟구치게 만들었다. 나를 위로 밀어내는 벽과 놈의 장갑을 두드리는 가시들이 조금이라도 놈의 자세를 무너트리기 바랐기에 한 행동이었다.

콰아아앙!

쩌저적!

나를 짓이기기 위해 앞으로 뻗어지는 놈의 주먹이 나 대신 자리를 차지한 벽을 부수며 전진하다가 막힌다. 그러나 바닥에서 솟구친 가시들은 여러 합금으로 이루어진 장갑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공격 유형 변경]

주먹을 핀 골렘이 석벽을 부수고 이어서 한 말. 그것의 시선이 허공에 떠오른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놈의 갑옷 내부에서 들려오는 끼리릭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퍼-엉!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엉망으로 부서진 석벽이 충격파에 의해 말 그대로 터져 나간다. 석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비산한다.

파바바박!

양팔을 교차해 얼굴을 보호했고, 그 직후 돌 파편들이 내 몸을 둔탁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슨 힘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것인지는 몰라도 충격파를 직격으로 맞게 되면 내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단순히 빗겨 맞기만 하고 있건만, 속절없이 밀리고 있지 않은가. 다짜고짜 나를 침입자라 칭하며 공격해오는 모습은 한눈에 봐도 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분명 지금 나를 공격하는 놈이 연구소 내부를 엉망으로 만든 주범이리라.

'대체 뭘 만들어 낸 거야···!'

허공에 뜬 와중에 놈을 상대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찰나, 자신을 공격한 가시를 순간적으로 바라본 놈의 시선이 빠르게 점멸했다. 내부에서 연산 처리를 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새로운 기술 인식과 학습 완료. 모방 시작]

"···뭐?!"

믿기 어려운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고, 그와 동시에.

[재현]

바닥에서 가시가 솟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