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8 - 448. 32 (8)
"···개 같은 깡통 새끼."
나는 어느새 입안에 차오른 핏물을 모아 퉤 뱉었다. 충격파의 힘이 내장까지 미쳤는지 뱉은 핏물에는 작은 덩어리들이 보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5분이라고 했던가. 가동 한계 시간이 끝나면 바로 자폭한다고 했으니 실상은 그보다 더 적은 시간이 남았다고 보는 게 맞겠지.
타탓- 타타탓!
속으로 남은 시간을 가늠한 나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힘이 풀린 다리가 바닥과 맞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저앉을 뻔했지만, 어떻게든 힘을 주어 내달렸다.
그렇게 골렘이 있는 곳으로, 놈이 접근을 불허하는 증폭기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도끼 자루를 꽉 쥔 채로.
끼리릭-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놈의 내부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골렘이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들리는 소리였다. 공격 유형을 바꾼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이전에 썼던 충격파를 그대로 쓸 모양이다.
이제는 완전히 적색 빛으로 변한 골렘의 안면부가 내 움직임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건 놈이 팔을 뻗은 방향과 동일했다.
거리를 좁히니 알 수 있었던 사실 하나. 그건 내 예상보다 놈의 장갑이 성치 않다는 것이었다. 최대치의 전력으로 방출한 충격파가 나뿐만이 아닌 스스로에게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끼, 기기긱···
그렇지 않아도 불완전했던 골렘의 프레임이 죽어 가는 비명을 토해내는 게 그 증거였다.
"흐읍···!"
곧 닥쳐올 충격에 대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얼마 안 있어서 모조리 빠져나올 숨이지만, 지금 숨을 담아 둬야 폐가 찢어지는 고통을 그나마 덜 느낄 수 있었다.
충격파가 쏘아지기 직전, 내가 자세를 확 낮춘 것과 동시에.
쩌어엉!
놈이 쏘아내려던 충격파는 간신히 나를 비껴 나가 애꿎은 바닥을 두들겼고, 내 망치 머리는 골렘의 약점을 보호하던 상체 장갑을 제대로 강타했다.
지잉 울리는 감각이 망치, 팔, 몸, 다리, 다시 팔을 타고 흘렀다. 비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충격파가 근처에 있는 내 몸을 휩쓸었으며 속이 진탕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흩어지려는 의식. 그것을 간신히 붙잡아 눈이 감기지 못하게 막았다.
필사적으로 뜨고 있는 내 시야에 보이는 건,
쩌저적!
조금 전까지 내가 딛고 있던 바닥에 수없이 많이 새겨진 금.
후두둑!
충격파와 함께 휘둘러진 놈의 주먹에 맞은 팔이 줄줄 흘리는 피.
후웅···!
중력이 거꾸로 적용이 된 듯 허공에 떠오른 여러 잔해들.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자가 부족해서 장막이 뚫린 게 아니었다. 나와 부딪힐수록 골렘 또한 내 장막을 뚫을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토록 짧은 순간에 말이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오는 초조함과 골렘의 상체 장갑을 부수려면 몇 번 더 격돌을 이어가야 한다는 상황에서 오는 아득함이 내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한번 부딪힐 때마다 내 힘의 부족함을 느낀다. 어떻게든 팔을 휘둘러 놈의 장갑을 부술 때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꺼져, 이 깡통 새끼야···!"
나는 이번에도 밀리지 않고 되려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허리를 뒤틀어 휘두르는 무기에 무게를 싣는 건 덤이었다.
부우웅!
쩌-엉!
망치 머리로 화한 도끼날이 골렘의 장막, 장갑, 프레임을 한 번에 두드렸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연달아 휘둘러진 망치 머리에 의해 상체 장갑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떨린다.
[공격 유형 변경]
골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는 건 아니었다. 놈은 자신에게 파고든 나를 일시적으로 밀어내기 위해 모방한 땅울림을 운용했다.
콰드득!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석벽들이 더 이상의 접근을 불허하겠다는 것처럼 바닥에서 솟구쳤다. 마구잡이로 치솟은 그 벽들은 서로 뒤엉키며 나와 골렘 사이에 틈을 만들어냈다.
허나, 단순히 그뿐이었다. 결국 놈이 모방한 기술은 내게서 비롯된 것. 땅울림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내 앞을 메운 벽에 화답하듯이 땅울림을 운용했다. 내가 힘을 모은 곳은 현재 내가 있는 위치의 바닥과 들고 있는 무기였다.
벽을 세워 주변을 막는다고 해도 길이 아예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주변이 벽으로 가로막혔다면 위를 통해서 가면 될 일이다.
바닥에서 치솟은 또 다른 벽이 내 몸을 위로 올린다. 붕 뜨는 감각, 한순간에 높아지는 시야, 방울방울 흩날리는 핏물, 서서히 올려지는 골렘의 고개, 바닥을 짚은 놈의 팔이 위로 향하는 모습 따위들이 시야에 보인다.
그리고 중력에 붙잡혀 떨어지는 감각이 곧장 느껴졌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무게를 실어 더욱 빠르게 아래로 추락했다.
[공격 유형━]
골렘이 무어라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망치 머리를 더 크게 키워 놈을 박살 내는 것에 주력할 따름이었다.
파바바박-!
골렘이 만든 벽에서 가시들이 솟구친다. 순식간에 위로 뻗어지는 수많은 가시들이 노리는 건 나였다. 회피하지 않는다면 저 가시들에게 몸이 꿰일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3분 남짓. 허공에서 피할 곳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안전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으아아아!"
양팔을, 도끼 자루를 쥐고 있는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린다. 태산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무게감에 금방이라도 무기를 놓칠 것처럼 손이 떨렸다.
어느새 망치 머리는 골렘의 체구만큼이나 커진 상태. 그런 커다란 망치로 놈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다는 무식한 공격이었으나, 이것만큼 효과적인 공격은 없었다.
하물며 강화탄이 장전된 권총이 충격파에 휩쓸며 다시는 쓰지 못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지금이라면 특히 그러했다.
콰드득!
내가 미리 바닥에 뿌려 둔 땅울림이 덫이 되어 골렘을 붙잡았다. 와이어처럼 엮어 질기게 만들었으나, 오래 붙잡아두지는 못할 터.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부-우우웅!
망치 머리가 허공을 가른다. 아니, 가르는 것이 아닌 해당 공간에 있는 공기를 전부 밀어내면서 아래로 전진하고 있었다.
파가각!
아래로 휘둘러지는 망치 머리에 맞은 가시들이 모조리 부러진다. 날카롭게 위로 치솟았던 기세와 달리 허망하게 부러지는 가시들은 나를 죽인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 파편만큼은 남아 내 몸 이곳저곳에 박혀 들어갔다.
쩌-어어어엉!
그렇게 가시를 전부 박살 낸 망치 머리는 이내 내가 노린 목표에 닿았고, 굉음을 일으켰다. 대형 망치와 골렘 사이에 있던 공기가 그대로 터져 나가며 난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쩌저적-!
···쿠웅!
무식한 공격을 더 버티지 못한 상체 장갑이 무너져 내렸다. 위에서 내려치는 중량을 이기지 못한 골렘의 외골격과 프레임도 인정사정 없이 꺾여 본체의 자세를 무너트렸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합금강 장갑의 파편들과 골렘이 뒤로 넘어가면서 위로 들어 올려지는 잔해가 눈을 따갑게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뜬 상태 그대로, 다음 목표를 노렸다.
훤하게 드러난 날 것의 상체 프레임. 그 속에 보관되어 골렘이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동력원, 코어를 말이다.
상체 장갑을 터트린 대형 망치 머리는 힘을 잃고 부서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손이 남아 있지 않은가.
···콰직!
나는 손을 뻗어 과부하로 인해 붉어진 수정을 붙잡았다. 내 손에 붙잡힌 수정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부서졌다.
[주 도, 동력원, 소실··· 침입자 저, 저지 불, 가······]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려던 골렘이 행동을 멈추고, 끈이 길게 늘어진 테이프가 재생되는 것처럼 꼬인 음성이 들린 건 거의 동시였다. 동력원이 사라지니 작동을 멈춘 것이다.
"헉···, 허억···."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시야를 가리는 땀을 훔쳤다. 혹시 몰라 코어를 더 잘게 부수고, 다시 기동하더라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프레임을 비틀면서.
이 프로토타입의 깡통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대체 얼마나 쏟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체력이 바닥 나 있었다. 무전기로 전해지는 음성은 더 격해졌으면 격해졌지, 결코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지상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더 빨리 증폭기를 활성화시켜야 했다.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억누른 채로 바닥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최우선 명령 강제 이행. 나, 는. 여기를. 지, 킨다.]
코어가 부서져 확실하게 가동이 정지되었던 골렘이 뚝뚝 끊기는 음성을 내뱉었다.
파카캉!
-푸욱!
그리고 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복부를 관통한 것이 느껴진다. 놈 또한 나름 필사적이라는 것일까. 코어가 깨지고 나서도 기어코 움직인 그것이 나를 공격했다.
코어가 부서진 탓에 자폭을 쓸 수 없어 단말마 대신 내지른 최후의 공격. 그건 골렘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전방위로 가시를 뽑아내는 공격이었다.
"···커헉···."
상황 파악이 바로 되지 않아 느껴지지 않았던 고통이 상황 인지와 동시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침입자를 배제하겠다는 듯 주변을 뒤덮은 가시들이 보인다.
보관소 내부를 전부 뒤덮은 그 가시의 밭은 내 복부뿐만이 아니라 팔, 다리, 어깨, 가슴 가리지 않고 모조리 꿰뚫었다.
[크르르르릉······]
소지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한 반지에서 튀어나온 성체급 정령이 가시를 물고 늘어진 모습이 보인다.
내가 머리를 꿰뚫리지 않는 건 순전히 이 정령 덕분이었다.
급소를 노리고 솟구치는 가시의 궤도를 온몸으로 비틀어 나를 살린 정령은 결코 무사하지 못한 상태. 나 대신 몸으로 받아 낸 가시가 여럿이기에 정령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은 정령은 결국 강제로 소멸되고 말았다. 소멸되기 직전까지도 가시를 물고 늘어지던 정령이 사라지자 내 몸을 관통한 철 가시의 무게가 더 적나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깡통 새끼가······."
그제야 의식이 흐려졌다. 쏟아지는 피가 가시를 타고 뚝뚝 흘렀다. 힘없이 주저앉고 싶어도 몸을 붙잡은 가시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참으로 우스운 꼴이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주저앉는 곳이 희망 바로 앞이라니. 그것도 인간이 만든 도구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는 꼴이라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흐릿해진 시야로 빛을 잃은 증폭기를 바라보았다.
「실패했어」 증폭기 주변으로 모든 시설과 장비가 부서진 풍경이 보인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미안」
그리고 이제서야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증폭기 내부에 들어 있는 것, 엘리가 그러했듯이 수정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 그 사람은 바로 그토록 내가 찾았던 누나였다. 그녀는 편하게 잠든 것이 아닌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가 무겁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건지 가시에 막혀 숨을 쉬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핏물이 들끓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숨이 막혔다.
다리가 무겁다.
허벅지를 관통한 가시의 무게일까. 아니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무겁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심장이 아프다.
과도하게 입자를 운용한 탓에 씨앗의 파편이 나 대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필사적인 펌프질을 통해 피를 몸에 공급하려고 하지만 그 피는 이내 내 몸에 뚫린 구멍으로 샐 뿐이었다.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앞으로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런 내 의지와 달리 몸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이 야속했다.
- 피해 보고 계속하라!
-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 이번만 넘기면 결착을 낼 수 있다! 그러니 결사 항전하라!!
- 이번이 마지막 전투다!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누나는.'
- 조금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현우가 활로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부디 그 전까지만이라도···! 증폭기만 가동된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단 말이다!!
'실패하지 않았어.'
- 이런 빌어먹을! 이현우!! 들리나!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콰아앙-치지지직!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몸이 망가지니 환청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일까. 나는 내게 들렸던 환청에게 뒤늦은 답을 전했다. 시선은 수정 안의 누나를 향한 채였다.
'아직 더 움직일 수 있어. 거의 다 왔잖아.'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팔을 관통한 가시를 뽑아냈다.
찌지직···
가시에 엉켜있던 근육과 피부가 밀려나며 끔찍한 고통을 전했다. 피가 뭉텅이로 쏟아졌지만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았다.
아직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렇게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커헉···."
내가 이렇게 안 죽고 살아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이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체감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에 기대어 나는 가시를 뒤로 보내고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고통을 받아들여 조금이라도 더 정신을 깨게 했다.
몸을 고정시키는 가시를 빼낸 건 이제 팔 하나. 다음은 걷기 위한 다리를 빼낼 차례였다.
멍한 정신 속에서, 의식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은 나는 기계적으로 행동을 반복했다. 나를 옥죄던 가시를 전부 뿌리칠 때까지.
'조금만 더···!'
악문 이 사이로 피가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고작 한 발자국을 걷기 위해서 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은 끝이 없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할 수록 그 고통은 점점 더 커졌다.
「꺄하하하하! 이리로 오라, 나의 아이야!」
- 치지직! 뱀! 후방에서 칠흑의 뱀이 접근 중! 괴물이 옵니다···!!
- 아아아악! 증폭기는! 증폭기는 아직 멀었나···! 서둘러라!
- 2번, 3번 전차 대파! 어? 사, 살려-치지지직!
악의가 웃는 소리와 군인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거인만으로도 벅찬데 칼카타를 죽인 그 뱀마저 합류했다는 소식은 지상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끔 만들었다.
인간은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언제나 약자에 가까웠다.
우리가 다른 생물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전체 역사에서 보면 한 톨도 되지 않는 시간에 불과하다.
우리를 우월하게,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칭할 정도로 오만하게 만들어 준 것은 도구, 지능. 그리고 축적되는 지식.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을 보라.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도구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를 위대하게, 우월하게 만들어 준 도구는 한순간에 무력화되어 넝쿨에 의해 부식되거나 부서져만 가고 있었다.
우리를 인간으로서 남아 있게 해준 지능과 경험에 의해 새롭게 쌓이는 지식은 그나마 이런 세상에서도 우리가 생존할 수 있게끔 만들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세상은 다시 한번 급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겨우 쌓아온 지식이, 손에 쥔 도구가 또다시 소용이 없어지고 있단 말이다.
우리는 이제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역사는 거꾸로 돌아 우리를 최상위 포식자에서 한낱 피식자로 강등시켰다.
처절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나는 지금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내게 남은 것은 망가진 이 몸뿐.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답을 찾아 이곳에 도달했다.
우리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건, 인간을 발전시키는 건, 인간이 오만한 짐승으로써 자리매긺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었던 건 대단한 도구도, 잘난 지식도, 다른 무엇도 아닌 앞으로 걷는 그 한 발자국이다.
보잘것 없는 인간이 한 단계 높게 올라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 한 걸음.
나는 오롯이 내 의지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그 의지로 발을 내디뎠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누나, 데리러 왔어."
그리고 흐릿한 시야 너머에 있는 빛을 붙잡았다. 그토록 바랐던 희망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녀를.
······.
······.
······.
[···최고 관리자 승인 확인]
잃어 버렸던 빛이 되돌아오면서 수정에 시동이 걸렸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에게 맡기라는 것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푸른빛이 뿜어진다.
[반경 5km 내 대규모 오염 물질 감지]
[지금부터 해당 일대의 오염 정화를 실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