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9 - 449. 메이벨 (1)
[지금부터 오염 정화를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그 음성과 함께 푸른 수정이 빛무리를 위로 쏘아보내기 시작했다. 지하의 천장을 넘어서 지상의 하늘을 향해서.
<연구소 내부 시설 파손 확인, 현재 자재 부족으로 시설 복구 불가> <장비 이상 확인, 현재 인원 부족으로 장비 수리 불가> <장막 이상 확인, 장막 최우선 복구 중> <거대 질량을 가진 오염체 감지, 영역 정상화와 동시에 제압 실시> <정화 구역 지속적 확장 예정, 현재 코어 활성화 최대치> <······> <오염 처리율 20%···30%···35%···>
연구소와 연결되어 있는 증폭기가 시설의 현재 상태를 진단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증폭기 옆에 딸린 디스플레이에 표시되고 있었다. 코어 최대치를 위해 시설을 리셋한다는 소리가 들린 직후, 연구소 내부가 깜깜하게 물들었다가 장비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증폭기, 가동 완료."
나는 지하 연구소 천장을 뚫고 뻗어지는 푸른빛을 보며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 누구보다 이곳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지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애초에 푸른빛이 지상으로 쏘아지고 있으니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을 듯했지만 말이다.
버튼을 떼자 무전기가 곧장 불을 뿜었다. 희망에 기대어, 희망이 보여 기세를 회복한 인간의 외침이었다.
- 수고-치지직-했습니다!
- 다들 빨리 움직여! 치지직! 괴물 새끼들한테-치직- 한방 먹여줄 절호의 기회다!!
- 하나포 장전 완료!
- 둘포도 장전 완료!!
- 전차도 아직 기동 가능합니다! 적재된 탄약 상태도 양호!
-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무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이제 마지막 명령이야. ···쏴라!
이어서 들리는 건 포탄이 격발되는 소리, 총화기가 불을 내뿜는 소리, 기세를 잃어버린 변종들의 괴성 소리, 육중한 질량체가 쓰러지는 소리, 궤도 돌아가는 소리, 격한 엔진 소리, 질척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탄피가 떨어지는 소리, 이길 수 있다는 외침.
여러 소리가 뒤섞이며 혼란스러웠지만, 이전과 달리 절망감이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우리 인간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승패를 벌써부터 논하기에는 일렀다. 그리고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거다.
해냈다,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잠식한 순간,
털썩-
머리가 핑 돌았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이 바닥에 부딪히기 전 간신히 바닥을 짚은 손에 붉게 물든 것이 보인다. 피부를 뒤덮은 핏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 위를 또 다른 피가 적셔진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여기서 정신을 놓을 시간이 없는데. 아무래도 과다 출혈로 인한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다. 몸을 잠식한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먹먹한 감각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했으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어도 되지 않을까.
'잠깐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내 의식이 완전히 흐려졌다. 눈이 감기기 직전,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건 내가 끝까지 증폭기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볼품없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닫혔다. 그러자 어둠이 찾아왔다.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어둠이 아닌 지친 자에게 품을 내어주는 포근한 어둠이었다.
***
침잠한 의식 속에서 그리운 향기가 맡아진다.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감싸 안는 그 향기는 내게 어떤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내가 그토록 기억해내고 싶어했던 과거의 향수였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자 나를 어루만지던 따뜻한 손길이 놀란 듯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왔다.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길로.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기억해내자는 것처럼 은은한 향기는 내 의식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 잔향은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밤이 깊어지고,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이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이 싸우지 않기를 바랐으나, 내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귀를 두 손으로 막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는 손을 뚫고 들어왔다. 7살 때의 기억이었다.
마찬가지로 깊은 밤이었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완전히 어둡지 않다는 것이고, 곁에는 나도 모르는 온기가 있다는 거였다. 귓가를 맴도는 자장가 소리에, 꺼지지 않은 TV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소리에 괜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 나오려는 울음기도 갇혀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전혀 다른 공간, 다른 자세, 다른 시간. 모든 것이 어색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그런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손을 뻗지 않아도, 힘들게 내민 손이 뿌리쳐지는 과정이 없어도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9살 때의 기억이었다.
주위가 소란스럽다. 나는 구석에 몰려 있었고, 눈 앞에는 등을 보이고 있는 온기가 있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으르릉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나를 주위 시선으로부터 지켜주려는 듯했다. 드문드문 둘다 엄마가 없다느니, 부모가 없어서 저런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온기가 주먹을 휘두르자 곧 잠잠해졌다.
시선이 뿔뿔이 흩어지니 소녀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집에 가자며 외쳤다. 고작 한 살 차이가 날 뿐인데 크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작고 초라한 나와 달리. 13살의 기억이었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소녀의 키를 드디어 넘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는 만족감이 느껴졌었다. 이제 눈앞의 소녀에게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이때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녀의 표정이 구겨진 것과 동시에 옆구리가 아팠다는 건 확실히 기억났다. 16살의 기억이었다.
나보다 더 작아진 여성이 내 앞에서 방방 뛴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무심코 실실 웃었다. 같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쁠까. 물론, 나도 다시 누나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동기면 더 좋았겠지만, 한 학년 위 선배라도 옆에서 같이 다닐 수 있겠지. 그럼 자꾸 치근덕거린다는 녀석도 쫒아낼 수 있을 거다. 20살이 되기 직전, 19살 끝자락의 기억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내 앞에서 익숙한 여성이 나를 배웅해주고 있었다. 눈에 한가득 담긴 걱정이라는 감정이 그녀를 쉽게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듯 그녀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마냥 보는 것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 누나와 만났을 때는 일상복에서 연구소 가운으로 복장이 바뀌어 있었다. 21살의 기억이었다.
누나와 그녀의 아버지가 일하는 연구소에서 신기한 사람들을 만났다. 자칭 외계에서 왔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기한 외형만큼이나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적합자 프로젝트에 겨우 발만 담군 내가 봐도 되는지 의문이 될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고향을 잃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는 그들은 각종 트라우마, 심각한 부상 같은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돌봐주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일을 자처한 이유는 단순한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원인 모를 책임감이었을까. 25살의 기억이었다.
키가 작은 사람, 귀가 긴 사람, 피부가 녹색인 사람, 동물 귀와 꼬리가 달린 사람들이 한데 모여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걸 '미래'라고 불렀다. 만드는 사람들의 바람과 앞으로 이 터전에서 살아갈 아이들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동화같았던 이야기가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때 일어난 일은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오염에 공명하는 씨앗에 의해 의식을 차리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사태에서 살아남은 연구원들과 신기한 사람들은 힘을 합쳐 재앙으로 변한- 아니, 재앙에게 잡아먹힌 오염된 세계수를 정화해보려고 했지만, 증폭기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하나, 둘씩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누나는 나라도 살아남으라며 연구소에서 내쫓았다.
그 뒤로, 연구소는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봉쇄 상태가 되었다. 26살, 내가 연구소로 돌아와 누나를 다시 만나기 전의 기억이었다.
조각조각난 기억을 돌이켜볼수록, 그 기억들을 한데 그러모을수록 나는 내가 얼마나 누나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누나에게 있어서, 누나가 내게 있어서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나를 구하기 위해 증폭기를 가동시킨 이후의 기억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누나를 구하고 말겠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여정 중간중간 내게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누나 덕분이기도 했다.
"······."
천천히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물결이 끝나자 의식이 돌아온다. 서서히 눈을 뜨니 내 시야를 차지한 금발의 여성이 보인다.
그녀의 녹안은 나를 담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함부로 만지면 깨지기라도 하는 도자기를 다루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누나."
그리운 감촉을 느끼면서 나는 나지막하게 그녀를, 메이벨을 불렀다.
그리고.
"오랜만이네. ···우리 현우."
울기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는 누나가 조심스럽게 내 볼을 어루만지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