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50화 (451/497)

Chapter 450 - 450. 메이벨 (2)

헤어지고 나서 흐른 시간만 따지면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정작 나와 누나가 느낀 시간은 억겁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 탓일까. 우리는 서로 어색한 첫 마디를 내뱉은 뒤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현재 가슴을 가득 채운 벅찬 감정과 다르게 입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우물쭈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이 맞는지. 할 말과 생각이 너무 많아 입이 고장 난 느낌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누나가 먼저 작은 입을 열었다.

"미안, 깡통이 말썽이었지?"

다시는 놓치기 싫다는 것처럼 나를 품고 있는 누나가 머뭇거리며 한 말이었다. 그녀는 죄책감에 휩싸인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그러다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인지 애써 어색하게 웃기도 했다.

"···깡통치고는 너무 강하던데. 죽을 뻔했다고."

누나를 위해 괜히 툴툴거리는 말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골렘이고 깡통이고 그것에 대해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내 몸을 인정사정 없이 꿰뚫었던 철 가시들이 사라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루로 변해 형태를 잃어 버린 것이었다. 힘이 다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끄으윽···."

나는 곧바로 일어나려고 했으나, 순간 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단순히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을 뿐인데, 엄청난 고통이 나를 덮친 것이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이대로 조금만 더 기다려.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니까. 너 부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아? 가시가 관통한 곳에서 피는 계속 쏟아지지, 뼈는 조각나서 근육하고 엉켜 있지, 눈은 흐리멍덩해서 이미 죽은 사람 같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대로 조금만 더 있어 줘. 부탁이야···."

아픈 건 난데 되려 자기가 더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누나. 애써 웃는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조금 전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다다다 쏟아 냈다.

메이벨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나를 눌러 도로 눕혔다. 어쩐지 누나의 시야가 내 바로 위에 있더라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이제서야 눈치챌 정도로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누나가 말을 이었다.

"지금 씨앗 동기화를 조율 중이니까 금방 회복할 수 있어. 그때까지는 움직이면 안 돼. 괜히 움직이면 조율 시간만 더 걸리니까."

"조율?"

"응, 조율. 지금 네 육체랑 씨앗의 파편이랑 서로 어긋나 있거든. 일상생활하면서 괴리감이 상당했을 텐데, 뭔가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았어?"

괴리감. 무언가 서로 어긋난 감각. 이질감. 그런 느낌이 든 적이 있느냐고 묻는 누나였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고 지난 날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그런 감각이 이미 익숙해진 탓일까.

"그런 느낌은··· 안 들었는데."

"그래? 아무렴 됐어. 조율을 마치고 나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일 거야. 증폭기와 동기화는 조율을 마친 다음에 이어서 할 거고. 그리고 네가 걱정할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건데, 지상의 상황은 아직까지는 괜찮아. 증폭기가 가동된 덕분에 일대의 검은 입자들이 정화되고 있거든."

"······."

"오염된 수호목인 나무 거인은 기능을 정지했고, 검은 뱀은 아직 저항 중이지만 점점 약해지고 있어. 피해 없이 시간 끄는 것 정도는 위의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 치지직··· 아저씨, 언니분 말대로 지상은 어느 정도 정리됐으니까 회복에만 전념해. 또 크게 다쳤다면서.

누나의 말과 함께 머리 맡에서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가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 아닌 무전기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지수야?"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든 지수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확인차 물었다.

- 그럼 나지 누구야? 아무튼 아저씨 누나, 그러니까 메이벨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해.

무전기 버튼이 눌러져 있고, 지수가 내 상태를 알고 있는 걸 보니 누나와 미리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이어서 한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우씨, 지수 말이 맞아요. 장막이 펼쳐지기도 했고 밤도 많이 약해져서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히 시간 끌 수 있어요. 화력이 부족해서 죽이는 것까지는 못 하지만요. 어쨌든 급하다고 애매한 상태에서 나오다가 또 다치지 말고 최대한 회복시킨 다음에 와요. 아직 고비가 하나 더 남았잖아요.

- 휘이이잉- 치지직! 거기! 그쪽으로 꼬리 움직이잖아요! 곤죽 되고 싶지 않으면 무리하지 말고 빨리 피해요! 제가 위에서 시선을 끌어 볼 테니까!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신아현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기도 했다. 비를 내리게 만들었던 검은 창들이 하늘을 뒤덮은 직후, 지상으로 추락했던 그녀와 까마귀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지수와 한세아의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증폭기가 가동된 직후 후암동 일대에 크고 작은 여러 장막이 형성되었고, 그 덕분에 나무 거인과 칠흑의 뱀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나무 거인은 강화탄으로 무력화시킨 상태라고.

수호목인 놈이 무력화 당한 상태이니 놈 보다 체구가 작은 변종들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검은 뱀은 아직 반항이 거세긴 하나, 전차와 장갑차가 주변을 맴돌면서 힘을 빼놓고 있는 중이라 했다.

무력화를 넘어서 확실하게 처리하지는 못해도 내가 회복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러니 회복하고 나서 지상으로 올라와라.

이것이 그녀들이 내게 하고 있는 말이었다.

애원하듯 바라보는 누나의 시선, 계속해서 신신당부하는 지수와 한세아의 목소리에 나는 알았다는 말과 함께 몸에 힘을 완전히 푸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움직이려고 하면 회복 시간만 더 길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누나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상에 좋았다. 지금 나를 눕히고 있는 사람이 내 누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메이벨, 5월의 작은 종. 은방울꽃처럼 누나를 흉내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내가 순순히 말을 듣자 안색이 조금은 밝아진 누나는 손에 빛무리를 모아 내게 스며들게 하였다. 의식이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드는 한편,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격한 전투와 누적된 피로에 의해 몸이 나른한 상태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누워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 뭐라도 하나 더 아는 것이, 지금까지 품었던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물어봐도 되는 일이지만, 뭔가 그때가 되면 늦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볼까. 아니야. 어떻게 지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그걸 묻더라도 누나는 정말로 궁금한 게 그것이냐고 물어보겠지.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나는 서서히 상처가 봉합되고 있는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고 이내 그녀를 불렀다.

"누나."

"응."

"어떻게 지냈어? 몸은 안 다쳤지?"

"그걸 지금 아파서 끙끙거리는 네가 할 말이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내 걱정보다는 네 몸을 걱정해."

내 물음에 타박으로 답을 회피한 누나는 자신이 정신을 조금만 더 늦게 차렸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고 중얼거렸다.

"현우 네 표정을 보니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궁금한 게 있으면 괜히 망설이지 말고 물어봐. 내가 아는 선에서 솔직하게 말해줄게.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잖아. 어서."

"···나 기억났어. 아니,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군인들이 대규모 작전을 펼쳐서 여기 연구소 문을 뚫으려고 했을 때, 누나는 수정에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 그때까지는 증폭기가 미완성이었을 테니까."

"···응, 맞아."

당시에 미완성이었을 증폭기가 현재 시점에 완성된 채로 보관되고 있었다는 것.

이 사실은 연구소가 봉쇄된 사이에 누군가가 증폭기를 계속해서 손을 보았다는 증거이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내 누나일 터다. 제 2연구소에서 살아남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누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군인들이 찾아왔을 때, 연구소 봉쇄를 풀지 않은 이유가- 아니,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내가 말을 잘못했어. 미안."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입에서 내뱉고 나니 누나를 취조하는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조금 더 침착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어보고 싶었건만.

좀 더 상황이 쉽게 풀리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에 걸려들어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급하게 뒷말을 흐리며 말을 멈췄으나, 이미 내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결국, 내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눈치챈 누나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떨궜다.

"······뭐, 여기가 난장판인 거 너도 보이잖아. 증폭기는 미완인데 연구소는 외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점점 무너져가지, 설상가상으로 골렘마저 오작동으로 시설을 파괴하지. 그래서 일단은 막았어. 증폭기가 터지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

"악화되는 상황이 두려운 나머지 나는 눈과 귀를 막고 연구소의 봉쇄를 풀지 않았다. 아니, 풀지 못했다. 그저 필사적으로 증폭기를 안정화시키는 것에 몰두할 뿐이었다···. 여기서 끝나는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신이 없어서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는 이야기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리 중얼거린 메이벨은 지금 지상의 군인들이, 당시 상황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진실에 가려져 있었던 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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