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3 - 453. 메이벨 (5)
"그, 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은 누나. 그녀는 예상치 못한 답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갈 길을 잃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슬쩍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나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내심 기뻐하는 기색도 있었지만, 묘하게 슬퍼하는 기색이 있기도 했다. 서로 공존하기가 힘든 감정들이 그녀의 녹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메이벨은 이내 황급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황한 제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기색이었다.
"이거 봐 이거 봐! 죄가 많다니까! 이상한 데서 훅 들어오면서, 뭐? 죄가 없다고? 현우 너는 이제 누나한테 토 달지 마. 누나가 하는 말이 전부 다 맞으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으라는 누나의 말에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놀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이 마냥 장난은 아니었다.
내가 누나에게 한 말은 순전히 내 욕심에 기반한 말이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이런 욕심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 말이다. 은연 중에 내뱉은 본심이 아닌 그냥 대놓고 내지른 본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진심없이 장난기만 있었다면, 누나는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그녀는 내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메이벨이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누나가 내게 마음이 있다는 건 눈치가 없는 나도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허나, 누나의 성격상 그걸 먼저 내게 말하지 않을 테지.
자신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말한 순간부터는 더욱이. 나나 누나나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본심을 내뱉은 거다. 누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이런 식으로나마 마음을 전하는 것이 누나가 가지는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을 테니까.
'꼭 누가 먼저 말하라는 법도 없잖아?'
말을 하지 않아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는 선택은 결국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괜히 서로 말을 아끼다가 나중에 엇갈리기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한심한 일은 없었다.
파닥파닥-
그녀는 손부채로 얼굴의 열을 식히는 한편, 여전히 나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힌 상태를 유지했다. 손금을 보고 있는 건지 단순히 손을 만지기만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눈이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야! 너 때문에 다음 할 말이 뭔지 까먹었잖아!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누나는 도중에 정신을 핫, 하고 차리더니 버럭 소리쳤다. 정말 화가 나서 소리친 것이 아닌 부끄러운 기색을 숨기려 외친 것에 가까웠기에 무섭지도 않았다.
"또 누나 놀리면 혼낼 거니까 가만히 있어···!"
메이벨은 고개를 휘휘 젓더니 이제는 정말로 손금을 봐야겠다는 듯 내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내 손 위에 누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간질거림이 솟았다.
상처가 낫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간지러움은 아니었다. 그 간질거림은 피부가 아닌 가슴 속 싶은 곳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이렇게 누나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단지 몇 개월이 흘렀을 뿐이건만, 그 간격은 내게 너무 길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흐른 시간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한 까닭이다.
고작 하루,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목숨을 잃을 뻔한 고비를 수차례나 넘긴 적도 있지 않던가. 지금에 와서 기억을 되돌려보니 그나마 짧게 느껴진 것이지 그때 느꼈던 시간의 흐름은 느려도 너무 느렸었다.
"···죄가 많은 너지만, 가정에 불화는 없겠어. 네 성격이 모나지 않기도 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모이는 운명이거든. 네 영역에 들어온 사람은 확실히 지키려는 편이기도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힌 누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손금의 선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서 아픈 걸로 고생할 일도 없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골골거리면서 쓰러져 있었는데?"
"또 누나 말에 토 달지? 이렇게 다쳐서 고생하는 건 예외야. 자질구레한 질병 잔치를 하지 않는다는 거지, 본인이 직접 움직여서 다친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잖아. 그래도 뭐···, 이것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기는 해."
"금방 나으니까?"
"그것도 있긴 한데, 네 생명선은 유독 길어서 아주 오래오래 살 운명이거든. 크게 다쳐도 결국 다 나아서 산다는 이야기지."
"···그랬으면 좋겠네."
누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음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나 말대로 정말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은가. 명예나 금은보화 같은 건 필요 없으니 그 대신에 단순히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 정도는, 이 바람 하나만큼은 꿈 꿔도 되지 않은가.
"그랬으면 좋겠네, 가 아니야. 너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운명이야. 그것도 매우. 그러니까 현우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무엇을 하든.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그녀가 봐주는 손금은 언제나 같은 말로 끝난다. 어렸을 적에 장난으로 봐주었던 손금에서도, 지금 나를 치료하면서 봐준 손금에서도. 그 끝은 행복하게 살 운명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매번 똑같아, 결과가."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나는 옅게 피식 웃었다.
"결과가 같은 건 당연하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누나 믿지?"
누나는 장난스럽지만 당당한 어투로 그리 선언했다. 익숙함에 속아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던 누나의 감정이 새삼 무겁다. 거북한 무거움은 아니었다.
나보고 죄가 많다느니 뭐니 타박하더니 정작 그런 나를 챙기는 건 누나였다. 혈연도 아니건만, 그것보다 더 끈끈한 애정으로 언제나 나를 챙기는 건 결국 누나였다.
심장이 쿵쿵 뛴다. 지금 누나를 보면 그 소리를 들킬 것 같아 괜히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내가 누나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어."
이어진 내 답에 누나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표정을 지우고, 킥킥 웃어 보였다.
어딘가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내가 그 웃음에 대해 물어보는 것보다 누나가 말을 잇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자, 한번 일어나 봐. 조율은 끝났어. 다른 장비가 없어서 내 감으로 맞추기는 했지만 거의 완벽할 거야."
"알았어. 잠시만."
나는 일어나기 전 손부터 까딱거려보았고,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계속 누워 있는 것이 미안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또한 몸이 정상이 아닐 텐데 내가 계속 누워 있으면 부담을 주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그녀 말대로 몸을 일으키니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보니 그 감각은 더 확실해졌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졌어. 그게 파편을 조율한 덕분인지 부상이 다 나아서 이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힘을 억지로 이끌어낼 때마다 이전에 해놨던 조율이 비틀어진 거야. 지금은 그 간극은 최대한 좁혀놓은 상태고. 그러니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건 그 덕분일 가능성이 크지. 알게 모르게 몸이 받고 있던 부하가 확연히 줄어든 거나 마찬가지니까."
누나는 앉은 상태 그대로 내가 몸을 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손상이 잔뜩 나 있던 입자의 통로도 간단하게 손 보았다며 한번 입자를 운용해보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입자를 한번 운용해보니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인다는 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몸에 문제가 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알리자 무언가 생각이 복잡해보이는 누나는 바로 다음 단계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율을 끝냈으니 이제 증폭기와 동기화할 차례라는 말과 함께.
메이벨은 동기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증폭기의 출력을 최대한 낮춘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내게 말해주었고, 무전기를 들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함이었다.
"아아, 지상에 있는 분들에게 알립니다. 현재 증폭기 동기화를 위해서 출력을 잠시 낮출 건데, 이러면 일시적으로 장막이 해제될 수도 있어요. 없어지더라도 금방 다시 형성되겠지만, 공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조심하셔야 해요."
- 알겠습니다! 그 점 유의하면서 차륜전 속행하겠습니다!
- 저기, 언니! 아저씨는 다 나았어요?
지상의 군인이 수신 완료했다는 답과 동시에 지수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든다. 살짝 거칠어진 숨을 내쉬고 있는 목소리에는 내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건 이어서 무전에 참가한 한세아와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 오빠! 빨리 여기로 올라와요! 보고 싶어요!
- 예린아! 후방에 숨어 있으라니까! 아직은 위험하단 말이야.
- 하지만···.
그러한 무전에 누나는 자신이 답하는 대신 내게 무전기를 건넸다. 자기가 소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지수야, 예린아. 나는 이제 괜찮아. 완전히 회복했어. 금방 올라갈 테니 조금만 더 힘내 주십쇼, 세아씨."
부상은 전부 치료되었다는 말로 그녀들을 안심시킨 나는 예린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건 예린도 무사하다는 답이었다.
위기의 순간, 온 힘을 엘리에게 건네준 여파로 인해 기절해 있었던 예린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신을 차렸고, 현재는 군인들이 다치지 않게 정령들을 다루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다친 사람들을 그나마 안전한 후방으로 이송시키기까지 하면서.
무전은 빠르게 종료되었다. 서로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으니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는 걸 우선시한 것이다. 더 다치지 말라는 무전을 끝으로, 무전기는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
"······완전 회복까지는 아닌데."
누나는 내 말에 불만을 가졌는지 삐죽 내민 입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몸이 전부 나았다고 한 것이 마음에 안 드나 보다.
"그 부상에서 이 정도까지 회복했으면 그게 완전 회복이지. 누나 손이 약손이네."
"에휴, 말이나 못하면. 혹시 모르니까 격하게 움직이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나는 잠깐 준비 좀 하고 있을게."
메이벨이 증폭기에 손을 올리자 지속적으로 푸른빛을 위로 쏘아 보내던 수정의 빛이 순간 꺼졌다. 완전히 검게 물든 것이 아닌 출력이 확 낮아져 상대적으로 밝기가 낮아진 것이었다.
"내 걱정은 마. 그나저나 누나도 몸이 그다지 좋지 않을 텐데, 누나야말로 몸 괜찮아? 힘들거나 문제가 있으면 바로 말해. 아까처럼 괜히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누나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누나가 걱정되니까."
수정 안에 들어가 몸을 보호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몸 상태를 좋게 유지해준다는 소리까지는 아니다. 당장 엘리의 경우를 떠올려봐도 그녀가 봉인에서 풀렸을 당시 몸이 약해진 상태가 아니었던가.
아까 누나의 몸 상태를 묻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내 물음에 누나가 보인 반응이 묘했다.
"아. 내 몸 말이지···."
"······?"
그러한 누나의 반응에 나는 역시 말은 안 했어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추측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누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나! 많이 힘들어? 부축해줄 테니까-"
"현우야. 오염된 세계수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다가오지 못하게 손을 들어 막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누나.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갑자기? 아니, 뭐. 뭐든 할 수 있기야 하지. 재앙을 막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잖아. 힘들어도 해야 하는 일이고."
"······."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누나는 잔뜩 뜸을 들였다. 그런 누나의 행동에 괜스레 긴장이 되는 기분이다. 나는 일단 잠자코 그녀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그럼···."
그리고 쉬이 입을 열지 못하던 메이벨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몸짓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포장하려는 기색으로. 그러나 심각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나를 죽여, 현우야."
-세상이 완전히 끝장나기 전에, 나를 죽여야 할 지도 몰라.
그 뒤로 누나가 뭐라하는 것 같았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는 걸 간신히 인지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