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4 - 454. 메이벨 (6)
'···방금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너무도 뜬금없이 나온 말이라,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있던 뇌리에 곧장 꽂힌 것이다.
방금 들은 말이 계속해서 되풀이 된다. 내가 누나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혹시 잘못 들은 것 아닌지 확인하라는 것처럼.
- ···나를 죽여, 현우야.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누나가 한 말을 내가 제대로 들었다는 사실만 확정 지을 수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 세상이 완전히 끝장나기 전에.
이어서 누나가 덧붙인 말. 그건 지금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 전까지 보냈던 시간이, 잠시나마 느꼈던 편안함이 전부 착각이라는 듯이.
누나를 죽여야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이 길지 않고 아주 단순한 문장에서는 단어 하나가 빠져 있었다. 헷갈리지 않게 누군가를 콕 집어 가리키는 단어가.
'내가.'
내가, 누나에게 목숨을 여러 번 구함 받은 내가, 누나를 죽여야 한다. 너무 늦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하지만 어떻게?
순간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을 억지로 밀어냈다. 역린이 건드려진 듯 발광하는 사고를 힘들게 밀어낸 사이에, 나는 누나에게 되물었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여야 할 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뒤늦게나마, 아주 간신히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누나, 방금 뭐라고 했어?"
"아, 내가 말을 오해하게 했네. 여기 있는 나 말고, 저 아래에 있는 몸을 말하는 거야. 내가 수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내 육체 정보가 재앙에게 강탈당한 모양이니까."
누나는 황급히 손을 저으면서 말을 고쳤다. 그리고 그런 누나의 말에 머리를 채웠던 아득함은 사라지고 화에 가까운 감정이 대신 자리를 채웠다.
"뭐? 아니, 그런 말을 왜 이렇게 뜬금없이 해! 나는 진짜 순간 누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고···!"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이었던가.
누나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누나를 죽여야 한다니, 그것도 내 손으로. 참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영화 스토리도 이렇게 짜면 그 영화 스토리 작가는 밤 길을 조심해야 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말을 시작부터 그렇게 하면 어떡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재차 내뱉은 외침에는 어느새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충격을 받은 뒤에 내가 이어진 누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처음부터 사람 놀라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한 누나의 잘못이 제일 크지 않나.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무슨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일이 조금 풀리려던 찰나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을 한 누나가 잘못한 게 맞았다.
다행히 오해였기에 망정이지. 오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런 내 심정이 담긴 표정을 본 것인지 누나는 허둥지둥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달래기 위함인 모양이다.
"미안! 그 기억이 떠오른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계속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는데 현우 네가 먼저 물어보는 바람에 순간 긴장을 좀 많이 했나 봐. 말이 헛나왔어···. 진짜 미안, 사람이랑 대화해 본 것도 오랜만이라 그런가 입이 말썽이네. 진짜로 미안해. 많이 놀랐어? 잠깐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누나 몸 상태.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당장."
메이벨이 사과와 걱정의 말을 도도도 쏟아 내고 있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쿵 떨어진 심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여전히 쿵쿵거리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누나의 입에서 내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이 나와야만 했다.
"으, 응."
누나도 제 잘못을 아는 것인지 찔끔한 눈으로 자리를 옮겼다. 속 시원하게 한 번에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으나, 그렇다고 동기화 작업을 아예 미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준비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잠시 놀란 숨을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이윽고, 메이벨이 손짓으로 입자를 움직여 나와 증폭기 사이에 선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나가 나를 붙들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누나를 붙든 채로.
"···힘을 너무 준 거 아니야? 누나 살짝 아프려고 하는데."
"······."
나는 말없이 잡은 손을 살짝 풀어 주었다.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자, 그럼 아까 멈췄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야. 조금 전에 내 육체 정보가 수정을 통해 재앙에게 넘어갔다고 했지? 넘어간 것보다는 강탈이라는 단어가 더 옳지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육체 정보 강탈이라니? 누나 몸이 복제되었다는 이야기야?"
"우선 너도 알다시피 씨앗 파편은 서로 공명할 수 있어. 그래서 오염된 세계수가 네게 속삭일 수 있었던 거고, 내가 널 지켜볼 수 있었던 거지. 비록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누나는 천천히 설명해주면서 공명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내 몸이 약해질 때마다, 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려왔던 목소리. 그건 내 예상대로 재앙과 누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내게 전해진 건 나, 메이벨, 재앙. 이렇게 셋이서 씨앗 파편을 하나씩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몸 상태가 정말 최악이었을 때는 목소리에 의해 조종당하는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치 않는 행동을 한다던가, 해서는 안 될 행동해서 제 발로 위험에 처한다던가. 여러 일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낯선 곳에서 눈을 뜬 당시에는 진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정신병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어. 나중에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그럼 이런 생각도 했었겠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속삭임을 듣고 있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내 정신이 이상해져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
"그렇다면 네 앞에 있는 나는 정말로 진짜일까."
"누나가 가짜라는 이야기야?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거라고?"
그리 말하며 나는 누나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환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환각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알고 있는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현우야, 나는 단순히 수정으로 몸을 숨긴 게 아니야. 증폭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무리하다가 일어난 결과이지."
메이벨은 붙들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아서 아프다더니 이제는 그녀가 되려 내 손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 손을 놓치면 떨어진다는 것처럼.
누나가 말을 이었다.
"기억나? 예전에 네가 의왕시에서 처음으로 정화의 불을 각성했을 때 말이야. 그때 내가 너한테 말했을 거야. 이 이상 무리하게 힘을 쓴다면 너는 사라지고 말 거라고. 그때 말했던 결과가 이거야."
씨앗 파편의 힘을 강제로 이끈데다가 잘못된 방법으로 힘을 쓴 탓에 몸이 날아갈 위기를 막아주었던 건 누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조심하라는 조언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경험에 의거한 충고였던 것이다.
"오염된 세계수가 내 몸을 복제해 자신이 쓸 의체를 만드는데도, 나는 수정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거지. 그래서 무심코 나를 죽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 결국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내 몸을 마음대로 복제해서 쓰고 있는 재앙일 테니까."
"···이상하잖아. 그 재앙이 왜 누나를- 아니, 인간의 몸을 복제해서 의체로 삼아? 왜?"
"일단 계속 들어. 말하는 건 내 말이 다 끝나서 나서부터 해 줘.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내 육체 정보는 수정을 통해 넘어갔어. 아니, 넘어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네. 어떤 것이 원본인지 모르니까. 내가 수정에 몸을 맡긴 순간 전부 재구성되었거든."
"······."
"자, 나를 봐봐.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깔끔하지 않아? 몇 개월 동안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깔끔하고, 그렇게 생채기가 잔뜩 났던 몸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 이게 다 수정이 나를 재구성했기 때문이야."
누나는 혼자서 세계수의 폭주를 막다가 수정의 힘을, 씨앗 파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휩쓸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 결과는 원본이 되는 몸의 강탈. 혹은 복제.
"그리고 씨앗 파편은 서로 공명해. 이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이라는 소리야. 우리가 재앙에게 물들수록, 그 재앙도 우리 인간에게 물드는 거지.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높아."
메이벨이 추측하기로는, 3개로 나눠진 씨앗 파편이 다시 온전한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 혹은 온전한 하나로 성장하기 위해 서로 공명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연구소에서 멀리 내쫒은 건 그 영향을 조금이나마 덜 받게 하기 위함이었고, 내가 한동안 속삭임에 시달린 건 공명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다는 말과 함께.
생존에 더 적합한 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재앙. 이 지구라는 행성이 엘리, 칸이 잃어 버린 고향보다 더 살기 좋다는 걸 깨달은 검은 입자가 한 선택은 수정과 씨앗 파편으로 전해진 육체 정보를 곧장 수용해 의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이 이적을 흉내 내는 것처럼 인간에게 물든 재앙이 어째서 의체를 만든다는 선택을 한 건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우리에게 물들었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
"처음에는 당연히 내가 원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위화감이 들더라. 몇 개월 동안 잠만 잔 탓인지는 몰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지금 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한순간에 사라질 신기루 같아서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워."
그녀는 이어서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누나의 발목을 족쇄처럼 붙잡고 있는 넝쿨이 보인다.
"······."
"뭐가 대체 내 진짜 몸일까. 혹시 이건 재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인형이 아닐까. 만악 그렇다면, 저 아래에 있는 또 다른 몸에도 내 인격이 들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대체 누가, 어느 쪽이 진짜지?"
누나는 그리 말하며 몸을 살짝 떨었다. 그 모습에 나는 당연한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 나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의식을 찾은 것보다 반가움과 기쁨이 앞섰을 거다. 그러다가 내가 입은 부상을 보고 걱정과 동시에 일단 회복부터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그렇게 내가 부상에서 회복되자 그제야 자기 몸이 눈에 들어왔을 거다. 수정 안에 몇 개월이나 갇혀 있었던 자기 몸이.
그리고 의도치 않게 육체 정보가 넘어갔고, 그것을 바로 인지한 재앙이 그 몸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메이벨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리라.
내 처지에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누나 처지에서는 꽤 심각한 고민이 되었을 터다.
그도 그럴게, 똑같이 생긴 자기 몸이 하나 더 있고, 심지어 그 몸에 자기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현우야, 나는 진짜가 아니라 복제된 가짜일 수도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몰라. 하지만 그래도 이런 나를 믿어?"
"내가 누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그리고 영혼은 머리에 있는 게 아니잖아."
나는 망설임 없이 곧장 답했다. 내가 누나에게 해준 말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녀가 바로 내 누나였으니까.
애초에 누나를 흉내 낼 수 있는 건 누나 본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누나에게는 확신이 필요하고, 나는 누나에게 그 확신을 줄 수 있었다. 비록 짧은 말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여전히 과학적이지 않네. 그래도, 안심이 되는 답이야."
그제야 안심하고 환하게 웃는 누나. 한순간 마음을 잠식한 불안감을 떨친 그녀는 조심스레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꽉 잡았다. 아니, 아예 그녀를 품에 넣고 안았다. 내게서 벗어날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내 품에 들어온 메이벨은 가녀린 체구에 비해 매우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체온이 나를 덥히는 와중, 주변에 피어 있는 꽃에서 은은한 향기가 맡아진다.
은방울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