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55화 (456/497)

Chapter 455 - 455. 메이벨 (7)

"오랜만에 안으니까 좋다."

내게 기대고 있던 누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코가 짓눌러질 때까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숨이 막히지도 않나 보다.

"백 번, 천 번이라도 안아줄 수 있으니까 아까 같은 말은 하지 마. 갑자기 사라지지도 말고. 나보고 오래오래 살 운명이라더니 방금 누나 때문에 수명이 반 넘게 줄어든 것 같아."

"···이게 집착이라는 건가? 옛날에는 내가 이랬던 거 같은데, 역으로 당하는 것도 기분 좋네."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줘. 그렇게 하겠다고 말이야."

"참,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몰라? 나는 안 사라져. 내가 여기서 사라지면 이 증폭기는 누가 관리하게? 유지 보수할 사람이 없으면 시동 바로 꺼질 텐데. 애초에 수정에 빛이 돌아온 것만 해도 기적이지만 말이야."

나를 안심시킨 누나는 내가 여기에 도달한 것만 해도 기적이라며 말했다. 그녀가 투명한 눈망울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여정을 중간에 포기했다면 네 심장 속 씨앗 파편도 빛을 내지 못했을 거고, 우리도 다시 만나지 못했겠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어떤 고난이 내 앞에 닥쳐도 멈추지 않은 덕분에 나는 여기 올 수 있었고, 자신과 재회할 수 있었다는 누나.

"나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어."

그런 말들을 누나에게 직접 듣게 되니 참 낯부끄러웠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러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 다른 푸른 입자 사용자. 우리가 각성자라고 분류한 사람들이 널 도와줬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들이 널 도운 건 그 전에 네가 해왔고, 보여 주었던 행동이 있었기 때문일 거야. 네가 인간이 아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었다면 돕지 않았겠지. 애초에 그랬으면 널 적으로 봤을 걸."

"내 얘기는 이제 됐어. 그나저나 누나 몸 상태 듣고 나서 생각난 건데, 모스 부호, 누나가 남긴 거야?"

"···으, 응? 모스 부호?"

"어. 모스 부호. 모니터가 하도 이상하게 깜빡거려서 봤더니 신호가 뭐였더라. 나는-"

"으아앗! 쉿! 그만! 나, 난 몰라. 모스 부호 같은 거."

누나는 다급하게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행동을 보니 누나가 그 신호를 남긴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뭐라 더 말했다가는 메이벨이 부끄러움에 죽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당시에 내가 너무 몰려 있었다고 해야 하나, 뭐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건 잊어!"

날개도 없으면서 팔을 파닥거리는 누나였고, 조금 전까지 그런 건 모른다더니 알아서 실토하는 누나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철한 척, 날카로운 척 다 하면서 은근히 허당끼가 있었다.

물론, 그건 나한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이어서 입에 담은 건 오염된 세계수를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다음으로 향하는 장소는 재앙이 있는 곳이니 그것을 상대할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오염된 세계수, 이거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던가 정해진 방법이 따로 있어?"

"으음, 그건 가면서 설명해 줄게. 나도 그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봐야 알 것 같아서. 거기 상황이 어떤지 알기 전까지는 말하는 게 좀 껄끄럽네. 잘못된 정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하잖아.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기보다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야. 지금은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메이벨은 모든 사태의 시작 지점인 그라운드 제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뭐라 답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고.

제 2연구소에서 바로 넘어가면 좋겠지만, 이 건물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곳인 탓에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누나는 나를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네 심장 속 조각을 증폭기와 동기화 완료했어."

"응? 벌써 끝났다고?"

내 등을 탁탁 두드리며 동기화 작업이 끝났다는 누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뭔가 된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건만, 대체 어느 틈에 작업을 끝냈다는 말인가.

"그럼 당연하지. 아까 너한테 혼나면서도 작업은 계속 했거든. 시간도 없는데 할 건 해야지. 이제부터는 좀 더 높은 출력을 내도 그 부하는 네가 아니라 이 수정이 대신 받을 거야."

"······."

"하지만 명심해. 부하를 덜 받는다고 해도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거. 자칭 신이라는 나무와 비슷한 힘을 낼 기회는 딱 세 번뿐이야.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나처럼 몸이 강제 재구성되는 것을 넘어 소멸될 수도 있어. 아니,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정이 더는 없으니 확실히 소멸될 거야. 그러니 너무 무리해서는 안 돼. 알았지?"

나는 신신당부의 말을 전하는 누나를 멍하니 보며 무심코 웃고 말았다. 대화하면서도 할 건 다 했다니. 참 그녀다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웃어. 지금 심각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냥, 참 누나답다 싶어서. 어쨌든 동기화 작업은 다 끝났다는 거지? 그럼 이제 나갈 준비해야겠네."

나는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아름다운 푸른빛을 위로 쏘아 보내기 시작한 커다란 수정과 여전히 엉망인 보관소 내부가 보인다. 이내 골렘이 있었던 자리로 향했다. 무기를 챙기기 위함이었다.

사브작- 사브작-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났다. 진짜 눈이 아닌 바닥에 잔뜩 깔린 흙더미와 철 가루들이 서로 비벼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골렘이 최후의 공격으로 제 몸을 변형시켜 가시를 쏘아낸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은 내 도끼였다.

"······."

허나, 도끼는 자루만 겨우 남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도끼날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골렘을 강타하는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산산조각이 난 모양이다. 난쟁이 르한이 힘들게 만들어 준 무기가 일회용으로 쓰고 끝이라니, 그 점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난쟁이 칸이 챙겨 준 역장 생성 수정도 골렘이 가한 공격에 부서진 것인지 가루만 겨우 잡힐 뿐이었다. 가시가 몸을 뚫기 전에 정령과 함께 힘을 발현했다가 깨진 듯했다.

근처에는 완전히 분해가 된 것처럼 박살 난 권총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 부품들이었다.

다행히 탄창 안의 탄약은 무사한 상태. 나는 망가진 권총을 내버려 두고 총알만 빼냈다. 일반탄도 아니고, 강화탄이니 챙길 필요가 있었다.

'3발 정도···.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아쉬워한다고 해서 부서진 무기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무기가 없어도 괜찮았다. 기본 골조가 되는 무기가 없으면 땅 울림으로 대충 뽑아내서 쓰면 되는 일이니까.

"현우야, 너 도끼 부서져서 어떡해? 총도 망가졌잖아."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무기는 걱정 하지마. 그냥 이렇게 뽑아 쓰면 돼. 권총이야 위에 올라가서 하나 더 받으면 되고."

나는 누나에게 땅 울림을 운용해서 만든 무기를 보여 주었다. 어차피 무기가 한번 쓰고 부서질 정도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한번 쓰고 버릴 속셈으로 다루는 게 옳았다.

특히 입자를 더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더욱 그렇겠지. 대충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붕붕 휘두르는 감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구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누나, 저 증폭기는 어떻게 해? 그냥 들어서 옮기면 되나?"

내 말에 누나의 시선이 푸른빛을 내뿜는 증폭기로 향한다. 연구소 시설이 정상화되고 있기는 해도 여기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건 변함이 없기에 반드시 챙겨서 올라가야 했다.

"아, 저거 당연히 들고 가야지! 증폭기를 챙길 방법은 따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깐만 여기 있어. 나도 준비 좀 할게. 이제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니까."

메이벨은 나 혼자 싸우는 꼴은 볼 수 없다, 지금까지 도와주지 못한 만큼 힘이 되어 줄 거라며 중얼거리면서 증폭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와 동시에.

후웅-

수정의 표면을 가르는 여러 선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선은 이내 커다란 수정을 작은 수정 여러 개로 나뉘게 만들었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부유하는 작은 수정들은 총 7개.

누나가 작게 손짓할 때마다 위치를 빠르게 바꾸는 수정들은 이내 주인을 지키듯이 누나에게 모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둘러싸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수정들 사이에서 유독 강한 푸른빛을 내뿜는 수정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그 수정이 지상의 장막을 유지시키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수정인 듯했다.

"···뭐야. 그거 분리도 되는 거였어?"

어떻게 들고 가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던 내게 보인 예상치 못한 광경.

"누나가 하지 못 하는 건 없다!"

그녀는 이게 자기 능력이라며 의기양양하게 가슴팍을 내밀었다. 그녀의 몸짓에 와이셔츠가 살짝 벌어지면서 틈을 만들어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누나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런 뉘앙스를 품은 말을 했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분리된 수정 하나하나에 얼마나 큰 힘이 담겨 있는지 알아채고 말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도 그럴게, 애초에 분리된 수정들은 증폭기를 이루고 있던 수정들이지 않은가.

일부는 그저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이었지만, 제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구의 형태의 장막을 두르고 있는 일부도 있었다.

그 장막의 크기는 언뜻 보면 작다고 할 수 있었으나, 누나가 마음만 먹으면 장막을 넓게 펼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지금 눈에 보이는 장막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구도 실험을 따로 할 필요도 없이 매우 단단하겠지.

"이제 준비 끝! 챙길 거 더 없지? 그럼 바로 올라가자. 밍기적거릴수록 우리 손해야."

백 번, 천 번 옳은 말에 나와 누나는 곧장 움직였다. 나는 내가 들어온 보안문으로, 누나는 여러 수정이 펼쳐진 곳의 중앙으로.

"······?"

우리가 서로 의아한 시선으로 눈을 마주친 건 거의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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