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58화 (459/497)

Chapter 458 - 458. 합류 (3)

영역을 나누는 장막.

증폭기가 만들어내는 장막이 주변의 검은 입자를 정화해서 밀어내고 있었고, 오염된 세계수로부터 검은 입자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서로 상쇄되어 소멸되고 있는 푸른 입자와 검은 입자는 힘 겨루기를 하는 양상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한쪽이 잠시 밀려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치고 들어와 밀어내는 그 상태가 고착된 현재 상황.

그 탓일까. 원래 이 일대에 있었던 숲은 완전히 엉망으로 헤집어진 상태였다. 태풍이 몰아친 것처럼 대지가 뒤집어졌고, 나무 기둥이 꺾였으며, 넝쿨이 찢겨져 체액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증폭기의 힘이 오염된 세계수와 비등비등한 상태이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고 유지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정이 낼 수 있는 출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수정의 힘이 다하기 전에, 재앙을 처리해야겠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갈수록 오염된 세계수가 만들어 내는 밑 그늘이 점점 진해졌다. 나무 밑기둥이나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들이나 어찌 이렇게 거대한 것인지 주변 햇빛을 전부 가릴 정도였다.

"아 참, 아저씨. 이거 미리 말해주는 건데 그 군인 찾았어. 아니, 찾았다고 하더라. 최명철 상병 말이야."

"뭐? 찾았다고?!"

지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해 준 이야기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응, 나는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어서 직접 본 건 아닌데, 듣기로는 잔해 밑에 깔려 있었다더라. 운이 좋아서 잔해 틈에 끼어 있게 된 건지, 일부러 그곳까지 기어가서 숨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가 숨은 장소를 본 난쟁이들이 말하기를, 들어가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었겠으나, 잔해 틈이 워낙 좁아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했다고.

그 좁은 틈에 몸을 맡겨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몸 이곳저곳에 긁힌 상처가 심하게 곪기까지 한 탓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고 들었다는 지수. 그녀는 그가 지금은 무사히 구조되어 박지영이 후방으로 급히 이송시켰다고 했다. 그 외 다른 부상자들도 그나마 안전한 후방인 노들섬으로 이송시켰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지금 여기는 부상자들까지 챙길 여력이 있는 상황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장막에 의해 오염된 숲에서 쫓겨난 변종들이 노들섬 부근까지 밀려나긴 했으나, 증폭기에 의해 약화된 변종들이었으니 최소한의 인원만 있는 노들섬에서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막아내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해주는 지수였다.

"···다행이네. 살아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무리 희망적으로 사고를 돌려도 최명철 상병이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대단하기는 해. 언제 정신을 잃은 건지는 몰라도 이틀을 변종들 사이에서 버틴 거잖아."

지수는 최명철을 구조하는 데도 그렇고, 벽을 세워 변종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도 그렇고, 난쟁이들이 없었다면 지상은 무너져도 진작에 무너졌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피로가 극에 달해 보이는 눈가를 비비적거리다가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한 손에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본 까닭이다.

"그런데 아저씨, 이제서야 본 건데 그 나무 막대기 뭐야? ···설마 저 뱀한테서 나온 거야?"

"···어, 네 짐작이 맞아. 이거 칼카타가 쓰던 지팡이야. 눈에 박혀 있었더라. 이미 반절로 부러져 있었고. 처음에는 아닌 줄 알았는데, 지금은 확실해."

나는 피곤해 보이는 지수에게 정화의 불을 불어넣어 주며 답했다. 체력 회복 효과가 있는 불을 받아들인 그녀는 그 덕분인지 조금은 진정된 눈으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는 낌새에 나는 그녀의 손에 막대기를 쥐여주었다. 그러자 지수는 한참을 말없이 반으로 부러진 막대기를 눈과 손에 담았다.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진 채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복잡한 심경에 나 또한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수는 전투가 끝나기 직전- 아니, 내가 도망치기 전에 기절했었기에 칼카타가 마지막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때까지 같이 싸웠고, 칼카타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는 건 알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고.'

겨우 정신을 차린 지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보인 반응을 떠올려보면, 지금 그녀의 심정은 결코 좋지 않으리라.

"···고마워, 아저씨."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지수가 꺼낸 말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뭐가?"

"그냥. 이렇게 돌아와줘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이르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저씨를 보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그녀는 내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능 사용에 의해 올라간 체온이 전해진다. 내가 지하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처럼, 그녀 또한 지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증거였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내 팔에 몸을 기댄 지수의 손을 꽉 잡아줄 따름이었다.

이윽고, 나와 지수는 상황이 일단락되자 재정비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조용히 따라오던 군인이 우리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자기 분대가 있는 곳으로 향한 건 거의 동시였다.

반쯤 무너진 석벽, 아직도 불씨가 남아 타고 있는 변종 사체, 사방에 흩뿌려진 황동색 탄피, 납작하게 변한 전차와 차량, 아무렇게나 열려 방치된 탄통, 크레모아와 지뢰를 설치한 흔적들, 고온에 의해 검게 변한 흙, 흙먼지와 함께 휘날리는 회색 재, 미처 치우지 못한 죽은 군인들의 흔적, 반짝이는 인식표.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지상의 사람들.

그곳에서는 난쟁이들이 정신없이 전차를 수리하는 중이었다. 물론, 장비를 제대로 정비할 수 있는 도구가 있는 건 아니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간단한 엔진 점검과 뜯어져 나간 장갑판의 보강뿐이었다.

깡! 깡! 깡!

망치로 합금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남은 물자를 최대한 긁어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외침이 가득했어도, 그 두드리는 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려왔다.

다른 쪽에서는 수호목인 나무 거인이 해체되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나무 거인의 전신. 머리가 통째로 사라진 놈은 세계수의 밑동에 등을 기댄 채 죽어 있었다.

그 사체 바로 앞에 누나가 있는 걸 보니 무력화된 나무 거인을 처리한 모양이다.

"핵심인 코어를 강제 추출해서 확실하게 마무리했으니 이제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거예요."

"네, 네. 메이벨씨."

누나 옆에는 한세아가 있었는데, 뭔가 누나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느낌이었다.

"메이벨씨가 뭐예요. 정없게. 그냥 언니라고 해요.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도 되고요. 아무튼 제가 손을 썼으니 문제는 없을 거고, 아까 말했던 대로 너무 무리하면 안 돼요. 속이 다치면 안 되니까. 잔소리도 과하면 독이니 더 말하진 않을게요."

메이벨은 그런 한세아를 살갑게 챙겼다. 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뭔가 묘하게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네. 언··· 니."

무언가를 보호하듯 복부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린 한세아. 누나는 그녀가 입은 자잘한 상처를 수정으로 치료해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들은 이내 다가오는 나와 지수를 발견했고, 손짓으로 천막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신호인 모양이다.

"천막은 또 언제 세웠대. 가자, 아저씨. 먼저 들어가 있으면 되나 봐."

"예린이는 어디 갔어?"

"예린이? 걔는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아마 다친 사람들 도와주고 있을 거야. 아, 저기 있네."

지수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망가진 전차 사이에 자리를 잡은 신아현과 까마귀가 보였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아다닌 까마귀는 거의 기절한 상태로 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신아현은 까마귀를 챙기고 싶은 눈치였으나, 기진맥진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기에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을 챙기고 있는 건 예린이었다. 아이는 물결 비늘 망토를 대강 몸에 두른 채 뽈뽈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의 뒤를 뒤따르는 정령들은 물이나 붕대 같은 것들을 들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을 챙기는 예린을 돕기 위함인 듯했다.

워낙 급하게 움직이는 중이라 굳이 부르지 않는 편이 좋아 보였다. 다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 나도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좋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천막 문을 젖히고 내부로 몸을 들이밀었다. 조용한 내부에는 선객이 있었다.

"왔나.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있게. 곧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

"연대장님···!"

나는 그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오른팔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한때 팔이 있었던 자리에는 검붉게 물든 붕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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