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0 - 460. 합류 (5)
잔뜩 주름진 손.
곳곳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는 손.
누나는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 손을 통해 겹쳐보고 있는 건 무엇일까.
잡아주지 못했던 군인들의 손일까.
그 날 차마 버튼을 누르지 못했던 자신의 손일까.
문을 열어 달라며 뻗은 손,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해 아래로 떨어진 손과 대비되는 손바닥의 방향이 보인다. 힘없이 쓰러져 아래로 향했던 손바닥이 지금은 역으로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위를 향해 있었다.
"···죄송해요. 보고 있었는데도 문을 열지 않아서 정말로, 죄송해요···. 저, 저는-."
메이벨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가녀린 체구와 함께 손이 잘게 떨린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내 손을 누나의 손에 포갰다. 더 확실한 행동으로 달래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가 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이런, 울릴 생각은 아니었네만. 미안하네. 내가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자네를 탓하는 말은 아니었다네."
연대장은 자세를 낮춰 누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쓰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과하지 말게. 사과는 내가 하는 게 맞아. 병사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이 무능해서, 내 능력이 부족해서 자네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으니까.
검은 입자에 오염되었다는 병사들이 있었다는 걸 좀 더 미리 알아챘다면,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지 않았을 텐데. 전력을 온존한 채 때를 기다렸다면, 지금 전투도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지휘관이 무능한 탓이야.
"
"아니예요! 저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 한마디 하자면, 죄책감에 잡아 먹히지 말게. 이건 충고도, 조언도 아니야. 단순히 내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걸세."
"······."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는 건 좋은 자세이지. 허나, 그 책임을 지는 방식이 후회와 죄책감이라면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어. 무슨 생각으로, 무슨 결심으로 그 선택을 한 건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걸 생각했을 때, 후회는 모든 일이 풀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그러니 지금은 후회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일세."
후회할 시간조차 아깝다고 중얼거린 연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맞잡은 손으로 누나를 일으켰다. 한쪽 팔을 잃어 버린 그는, 그의 눈은 비록 지쳐 있을지언정,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부터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늙은이가 흔히 하는 걱정이라 생각하고 넘어가 주게. 아, 이거 하나만 물어보지. 당시 상황을 계속 숨겼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른 채로 움직였을 텐데, 왜 공개 채널로 전부 말한 것인가?"
"숨기고 싶지 않았어요. 숨겨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비밀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니까. 제가 한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남들에게 떠넘기거나 아무도 모르게 숨긴다는 선택지를 고르는 건, ······비겁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가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기에 무전기 채널을 바꾼 것이라는 누나.
"···그런가. 그래, 답은 그걸로 되었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해 보지. 이미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야 해."
연대장은 메이벨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소란스러움이 느껴지고 있는 천막 바깥을 향해 외쳤다.
"어르신! 밖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독고수리 자네도!"
그의 외침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천막 바깥에서 일어나던 소란스러움이 내부로 들어왔다. 마체테를 주 무기로 쓰는 독고수리와 난쟁이 칸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둘 다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었는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나, 지수, 한세아, 메이벨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칸이 들어오면서 땅 울림으로 자연스럽게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기도 했고, 이제 마지막 정보 공유를 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툭-
내부 인원을 확인한 난쟁이 칸이 건물 구조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곧장 입을 열었다.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으니 바로 본론을 꺼내 든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구조도를 향했다.
"후우, 제 1연구소에서 재앙의 심층부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는 전부 막혔다. 이 친구랑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단순히 지하 통로뿐만이 아니라 그곳까지 이어지는 모든 길목이 전부 막혔어. 다른 길을 새로 뚫어서 심층부로 가던가 해야 해. 아니면 지상에서 나무를 공격해서 뚫던가."
심층부로 이어지는 길목이 무너졌다는 것. 그것이 지상의 사람들이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전, 잠시나마 숨을 고를 틈을 가지기 위함이기도 했다. 수정으로 부상을 감출 수 있어도 몸과 정신에 누적된 피로는 지울 수 없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말이다.
쉬지 않고 필사적으로 움직인 탓에 천막에 모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긴급 정비를 하는 사람들 또한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심층부로 진입한다면, 바닥난 체력은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어 주지 않을 테니 위험했다.
"칸 어르신, 저 나무를 공격해서 불태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남은 물자로는 그 정도 화력을 낼 수 없습니다. 변종들을 처리하면서 유탄이 나무에게 적잖게 튀었는데도 흠집 하나 안 났기도 했고요."
독고수리가 고개를 저었다. 현재 남은 물자는 전투 개시 전 물자와 비교해서 20%도 남지 않은 상황. 그나마 최대한 긁어 모은 양이 그 정도이니 죽인 변종들을 전부 합친 부피보다 큰 거목을 불태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나도 아는데 답답해서 해 본 소리다. 그래서 우리가 어쩌면 좋겠느냐, 메이벨. 당초 계획은 지하 통로가 막혀 있다면 새롭게 굴을 뚫는 거였다만."
산발이 된 수염을 애써 정리하면서 한숨을 푹 내쉰 칸은 고개를 들어 메이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 2연구소에서 나왔다는 걸 아는 독고수리는 순간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애써 지원군이 한 명 왔을 뿐이라며 생각하려는 기색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탓인지 메이벨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기뻐했던 난쟁이 칸도 무덤덤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붉게 물든 누나의 눈가를 보니 무거운 한숨을 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층부에 있을 심장을 노려야 한다는 건 여전해요. 지상의 나무는 결국 본체가 아니거든요. 아무리 공격해도 본체까지 영향을 끼치기 힘들고요. 핵이라도 쏟아 붓지 않는 이상은요. 그러니 저희는 칸이 말했던 것처럼 통로를 새롭게 뚫어서라도 심장을 직접 타격해야 해요."
충분한 화력도, 물자도, 인원도 없는 지금으로서는 지하로 내려가 심장을 타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누나. 그녀는 길을 새롭게 만드는 한이 있어도 심층부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라운드 제로의 최심부로. 재앙이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메이벨, 아래로 뚫는다는 건 말이야 쉽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지하에는 단순히 흙만 있는 게 아니야. 오염된 세계수의 뿌리가 가장 활개를 치기 좋은 곳이 지하이지 않느냐."
"괜찮아요. 증폭기가 가동되고 있으니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뚫는 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뿌리가 공격해 오는 일도 없을 거고요. 만약 뿌리가 우리를 공격한다고 해도 오히려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뿌리가 만들어 준 길을 타고 이동하면 되니까요. 그럼 길을 더 뚫을 필요 없이 바로 심층부로 직행할 수 있어요."
메이벨은 어느 정도 깊이까지 뚫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라운드 제로 시설로 진입하게 되니 이동이 한층 수월해질 거라고 말했다. 비록 예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테지만, 구조 자체는 남아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흠···."
"물론, 그전까지는 지금 남아 있는 칸이랑 조이가 힘 써 주셔야겠지만요."
"결국 그렇게 되나···. 알았다. 현재 남아 있는 인원이 얼마나 되지?"
난쟁이 칸은 침음을 흘렸고, 이내 연대장과 독고수리를 돌아보았다.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칸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엘리라는 처자는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고···, 르한 어르신은 현재 응급 처치가 막 끝났을 겁니다. 이래저래 따지면 지금 이 근방에 남아 있는 인원은 서른 명도 안 됩니다."
부상자 중 절반 이상은 중태. 나머지 절반은 중태까지는 아니어도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
부상자가 아닌 인원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뉘어졌다. 전사자이거나 전사자가 아니거나.
상황이 상황이니 어느 정도의 부상까지는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인원은 매우 적었다. 수정으로 부상을 단기간에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전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기준이 20~30% 수준의 사상자가 나왔을 때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30%를 거뜬히 넘는 60%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으니, 사실상 전멸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럼 더욱 서둘러야겠군.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겠어. 일손 하나하나가 절실하니 김지수, 한세아. 너희 둘도 따라 나오거라."
"네! 저 땅 잘 파요!"
"알겠어요."
지수와 한세아는 곧장 답했다. 그녀들은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돕기 위해 같이 일어났으나, 칸은 나를 말렸다. 혀를 쯧쯧 차며 보는 시선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다가 다시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 꼴로 어딜 돌아다니려고 하느냐.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전까지는 일단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그리고 메이벨 너는···. 너도 조금 숨을 돌린 후에 나와도 괜찮다. 그 전까지 나는 최대한 준비를 끝내고 있으마."
들어오자마자 나가게 된 난쟁이 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지수, 한세아가 칸을 따라가기 위해 일어나자, 연대장과 독고수리도 같이 일어났다.
한 번에 5명이 빠지니 순식간에 휑하게 변한 천막 내부. 그곳에는 나와 누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