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1 - 461. 합류 (6)
순식간에 끝난 회의. 아니, 회의라고 칭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의 시간이 끝난 순간이었다.
필요한 정보만 나누고 바로 해산한 탓이었다. 행동 방향이 정해졌으니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기도 했고.
"···하아."
침울한 기색을 띠고 있는 메이벨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까닭이었다.
수정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죽기 직전이었던 나를 살리느라 힘을 많이 소모했고, 그 외 다른 작업인 조율이나 동기화 작업까지 했으니 그녀가 힘들어할 만도 했다.
"누나, 괜찮아?"
"응, 괜찮아. 괜찮아야지."
펑펑 운 것이 아니라 꾹 억누른 흐느낌에 불과했으나, 아직도 울음기가 옅게 남아 있는 누나였다. 나는 누나의 답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가갔다.
조심스레 다가가 옆에 앉자 누나가 곧장 내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서로 잠시 말없이 있었다.
무전기 버튼은 대체 언제 눌렀던 건지, 너무 성급하게 다 말해 버린 건 아닌지 등등. 궁금한 건 많았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누나의 마음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안 그래도 신경 쓸 것이 많은 누나다. 그러니 나는 조용히 곁을 지킬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곁에 있을 때만큼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그녀가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도록.
난쟁이 칸이 누나에게 잠깐 여기 있으라는 말을 한 이유도 메이벨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아 마음 편하게 쉬지는 못하겠으나, 한숨 돌릴 정도의 틈을 가질 수는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
도도도도도-
천막 바깥에서 부리나케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이내 문을 확 젖혔다.
"오빠!"
날랜 발소리를 내며 들어온 사람은 바로 예린. 어찌나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머리카락과 꼬리털이 산발이었다. 어깨에 대강 걸치고 있던 물결 비늘 망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곧장 뭐라 말하려던 아이는 내 팔을 꼭 붙들고 있는 누나를 보고 멈칫거렸다. 누나가 아니라 그녀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정을 본 탓일 수도 있었다.
"어, 예린아. 무슨 일이야? 칸이 보냈어?"
"네···! 그러니까 크흠, 싸우는 데 복장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처음부터 거지꼴로 싸우는 필요는 없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할아버지가 이 옷 주라고 했어요."
용건이 있어 보이는 기색에 내가 부르자 예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옷가지를 내게 건넸다. 칸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고마워. 마침 필요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넝마가 된 옷이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이가 건넨 옷에는 급소 보호를 위한 작은 철판들이 박혀 있었는데, 지수가 입고 있는 옷과 유사한 디자인으로 보였다. 사이즈도 얼추 맞을 것처럼 보였고.
"···언니가 오빠 누나예요?"
"어? 으, 응."
예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정령들을 멍하니 보던 누나가 아이의 물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린이예요! 최예린!"
나와 누나의 머리카락을 번갈아 바라보던 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허리를 숙였다.
"예린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메이벨이야."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는 누나와 예린. 나는 이 틈에 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내게 쏟아지는 시선에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계속 이야기 나누지 뭘 그렇게 봐. 옷 갈아입게 고개 좀 돌려 줘. 둘 다 왜 이렇게 빤히 보는 거야. 부담스럽게."
"뭘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그냥 빨리 갈아입어. 그래야 나가서 일하지."
"맞아요. 빨리 갈아입어요!"
"잔말 말고 빨리 고개 돌려. 아니면 미리 밖에 나가 있던가."
"고개 돌릴게."
나가는 건 싫은지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메이벨과 예린이었다. 나를 신경 쓰는 대신 둘이서 서로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찌 되었든 그녀들이 고개를 돌린 사이에 나는 난쟁이 칸이 마련해준 여분의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었다. 한때 옷이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을 본 예린이 귀를 축 늘어트리며 물었다.
"오빠, 지금은 안 아픈 거 맞죠?"
"그래, 지금은 다 나았어. 누나가 다 치료해줬거든."
"오빠 치료해 줘서 감사합니다···."
"응? 아니야.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뭘.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메이벨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새 울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예린을 본 것과 동시에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움을 바라는 모양새였지만, 나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예린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아내게로 이끌었다. 다행히 정답이었는지 예린은 두 팔로 내 상체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반지에 담긴 정령이 소멸했다는 느낌이 전해져서요. 딱 한 번만 나올 수 있어서 진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나왔다는 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라는 소리였으니까. 저는 그래서 오빠가 진짜 잘못된 줄 알고···."
"많이 놀랐겠네. 미안."
"···제가 준 반지. 쓸모 있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그것 덕분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는걸."
반지 덕분에 살았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반지에서 튀어나온 정령이 머리를 노리던 가시의 방향을 틀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가능성이 컸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누나를 다시 볼 수도 없었겠지.
그러니 내가 지금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순전히 예린이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겨우 안도한 표정을 짓던 예린은 내 목에 걸린 반지를 손으로 잡더니 새로운 정령이 깃들게 하였다. 예린이 눈짓을 하자, 아이를 따라다니는 정령들 중 하나가 반지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저도 따라갈 거예요. 정령 하나로 막을 수 없다면, 더 많이 붙여주면 돼요. 그렇게 해서라도 오빠가 안 다쳤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없는 곳에서 다치는 걸 바라지 않으니 따라오겠다는 예린이 한 말이었다.
"······."
나는 안 된다는 말 대신 아이를 내 무릎에 제대로 앉혔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숨어 있어서 지원하라는 약속을 잘 지켰는지 아이의 상태는 썩 괜찮았다. 비록 물결 비늘 망토는 엉망이었지만 말이다.
상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나는 그 생채기를 손으로 덮은 다음, 푸른 불을 넣어 주었다. 이러면 적어도 흉은 남지 않을 거다.
"저 그냥 고집부리는 거 아니예요. 지하로 내려간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엄청 깊은 지하로요."
나와 누나는 잠자코 예린의 말을 들었다. 우리가 말없이 있자, 무언의 허락으로 이해했는지 아이는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도움이 될 거예요. 확실해요. 지하가 갑자기 무너져도 친구들이 지켜 줄 테니까요. 아래가 빛 하나도 없이 어두우면, 친구들한테 램프 들고 있어 달라고 하면 돼요. 그러니까 저도 따라갈래요."
힘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예린이 단순히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두고 가는 게 맞는 판단일까.
지하가 매우 위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상황에서 큰 힘이 되어 줄 예린을 데려가는 것이 맞는 판단일까.
"밑에 내려가면 안전하게 숨어 있을 곳은 없을 거야. 그나마 지상은 잔해 덕분에 숨을 곳이 꽤 있었지만, 지하는 공간이 여기처럼 넓지 않아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겠지. 사방이 괴물일 거고."
"괜찮아요. 저는 지켜져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오히려 제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요. 저, 오빠 생각보다 강해요."
"망토도 그다지 효과가 없을지도 몰라."
"그것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 망토에 의지해서 숨을 생각도 안 했어요. 숨기만 해서는, 몸을 수그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오빠가 사람들 앞에서 걷는 것처럼 옆에서 나란히 걷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숨어 있어야만 하는 정도는 아니에요. 바로 뒤따라서 걸으면 되잖아요."
"지상에 있던 변종들 봤지? 다 엄청 무섭게 생겼었잖아. 단순히 외형만 그런 게 아니라 힘도 엄청 세서 사람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고. 지하는 지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야."
"저도 알아요. 벙커에서 저랑 엘리 언니 구하러 왔던 군인 아저씨들도 크게 다쳤는 걸요. 눈앞에서 봤어요. ······저는 그게 무서워요. 무섭게 생긴 괴물들보다 오빠랑 언니가 그 괴물에게 다치는 상황이요. 오빠랑 언니들이 괴물에게 다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봐."
"······."
"혼자 남는 건 싫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더 싫은 건 오빠랑 언니들을 도울 기회가 있었는데도, 돕지 못하는 상황에 남겨지는 거예요."
예린의 푸른 눈망울이 선명하게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치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이는 참 빨리 큰다는 생각이. 물론, 내가 키운 적도 없고, 아이의 보호자로서 마땅히 해준 것도 없지만 말이다.
단순히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해주었을 뿐인데, 스스로 성장한 예린을 보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애가 야무지네."
"저 애 아니예요!"
성체급 정령들을 관찰하고 있던 누나가 한 말에 예린이 발끈하며 외쳤다. 아이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인지한 정령들이 누나에게 본능적으로 크르릉거리려다가 무슨 이유인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 응. 애라고 해서 미안해···."
꼬리를 일자로 바짝 세우며 하악질을 하는 예린의 모습에 풀이 죽은 누나. 그녀는 이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현우야, 이 아이- 아니, 예린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줘도 괜찮을 거야. 정령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거든. 이걸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맹목적인 충성이라고 해야 할지 표현이 모호하긴 한데, 아무튼 근처에 정령들이 있는 이상, 예린이는 위험에 처하지 않을 거야."
누나는 이렇게 감응력이 높은 아이는 처음 봤다고 중얼거렸다. 예린의 감응력이 이상하리만치 높다는 건 일 전에 있었던 기도 해프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예린이가 바라는 대로 같이 지하로 내려가는 판단이 옳은 것인지는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다만, 내 마음이 아이의 시선에 같이 가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건만큼은 알았다. 정령을 다루는 아이가 도움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내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불과 수십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고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윽고, 나는 답을 내렸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알았어. 같이 가자, 예린아. 네 도움이 필요해."
"네···!"
예린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외쳤다. 그제야 꼬리를 살랑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