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2 - 462. 합류 (7)
"그럼 저는 나가서 사람들 도와주고 있을게요! 오빠는 천천히 나와요! 메이벨 언니도요!"
내 확답을 들은 예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히히 웃어 보이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뒤를 따라 정령들도 우르르 사라진다.
예린이 나간 곳을 잠시 보던 나와 누나도 천천히 일어났다. 아이가 천천히 나와도 된다고는 했지만, 옷도 갈아입었고 짧게나마 한숨 돌렸으니 이제 나가야 하는 때였다.
"예린이 보니까 현우 너 나중에 애 잘 키우겠다. 좋은 아빠가 되겠어."
"그래?"
"응.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 나? 네가 남들을 이끄는 등대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방금 나간 아이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너를 믿고 있다는 게 보여. 그래서 좋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나는 누나의 말을 부정했다. 등대 같은 사람이라니. 과대평가를 해도 너무 했다. 나는 그 정도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등대는커녕 작은 등불은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애 잘 키우겠다는 소리는 듣기 좋네. 아이는 몇 명이 좋아?"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장난스러운 어투로 그리 말하자 누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고장이 난 것처럼 몸을 바싹 굳히다가 내 팔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듬직해졌다는 말 다 취소야! 왜 그래, 자꾸!"
"그래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누나 자꾸 놀리면 혼낼 거야."
메이벨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런 목소리와 달리 슬그머니 깍지를 껴왔다. 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며 단단하게 굳었다. 따뜻한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진다.
잠시 그 손을 만족스럽게 보던 누나는 앞서 나가며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푸른 하늘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밝은 빛에 의해 순간 눈을 찌푸린 나는 눈이 빛에 익자 표정을 풀면서 입을 열었다.
"뭐가?"
"예린이가 따라와도 괜찮다는 말을 할 줄 몰랐거든."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직접 눈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너를 지켜보면서 아까 그 아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어. 네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열심히 움직이더라. 속도는 조금 느려도 너를 어떻게든 따라가고 싶었나 봐. 저기 봐봐. 지금도 열심히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잖아."
잠시 생각을 정리한 메이벨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일손을 거들고 있는 중인 예린을 가리켰다. 아이와 함께 몰려다니는 성체급 정령들도 도움을 주고 있는 모습이 같이 보인다.
정령들은 부족한 발전기를 대신해 배터리 방전을 막거나 난쟁이들을 대신해 찌그러진 장갑판을 피고 있었다. 그 수가 꽤나 많아 긴급 보수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누나가 말을 이었다.
"예린이라는 아이나 너나 서로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동안 눈치를 못 챈 거지. 그래서 그런가? 걱정은 되지만 무작정 안된다고 말할 수가 없더라. 그동안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아니까. 판단은 네가 하는 거지만 말이야."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며 움직이는 아이를 본 메이벨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감정의 편린을 옆에서 본 나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대견하니 뭐니 해도 아이가 철을 빨리 들었다는 소리는 결국 주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남의 아픔을,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시점은 본인이 아픈만큼 남들도 아플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난 이후였으니까.
벙커의 아이들도 예전 세상의 어린 아이들처럼 마냥 떼를 쓰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눈치를 보는 것이 먼저가 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뛰노는 놀이의 의미 또한 바뀌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뛰어다니는 것보다 위급한 상황에서 제대로 도망치기 위한 훈련이 먼저가 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벙커는 사정이 조금- 아니, 많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자와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생존자 캠프들이 지금으로서는 일반적이니 말이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밝게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사태를 해결해야겠지.
천막 바깥에서는 난쟁이 칸과 조이가 불러 모은 사람들이 있었다. 옆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보니 난쟁이 르한은 부상은 회복했어도 그 전이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결국 후방으로 이송되었다는 모양이다.
끊어진 궤도나 엔진을 점검할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쟁이들이 땅울림을 운용해 본격적으로 흙을 밀어내기 전의 준비였다. 혹시 지하로 가는 길을 뚫다가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무장을 유지한 채로.
아래로 뚫어야 하는 길이가 상당했기에 중간에 난쟁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매우 큰 전력 손실로 이어지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흡사 공사 현장을 방불케 하는 곳에서는 지수와 한세아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난쟁이 칸과 조이는 무언가를 정신없이 지시하고 있었고.
나와 누나가 가까이 다가가니 접근을 눈치 챈 지수가 우리를 반겼다.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거린다.
"옷 갈아입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예린이랑 이야기는 잘 했어? 궁금해서 따라가려고 하니까 나보고 들어오지 말라더라. 막 으름장을 놓지 뭐야? 아무튼 그래서 뭐, 어떻게 하고 싶대?"
"별 이야기는 안 했어. 그냥 우리 따라오고 싶다는 이야기만 했지."
"···참, 내 동생 아니랄까 봐 용감하네."
지수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이에 누나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눈 한세아가 대화에 참여했다.
"현우씨, 대답은 뭐라고 했어요?"
"제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예린이는 저희랑 같이 내려갈 겁니다."
"그렇구나···. 알겠어요."
고민 끝에 같이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내 답에 한세아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기색이었으나, 달싹거림이 말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결정을 내린 나를 믿기로 한 모양이다.
바로 그때.
"현우야! 메이벨! 왔으면 이리 와 보거라!"
난쟁이 칸이 나와 누나를 급히 불렀다. 그 부름이 있는 직후, 우리는 곧장 난쟁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내 도착한 우리를 본 난쟁이 칸이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여기를 기준으로 아래를 쭉 파낼 건데,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다. 최대한 중간에 끊지 않고 한번에 길을 열거야. 중간에 멈췄다가 작업을 재개하면 방향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너는 바닥을 덮듯이 정화의 불을 뿌려라. 메이벨은 그 수정으로 모은 힘을 지하로 쏘아내면 된다. 대지를 다루는 건 우리 전문이긴 하지만, 지하에 불순물이 너무 많아 땅울림이 깊은 곳까지 닿지 않고 있거든. 그러니 그 불순물을 중화하는 힘이 필요해. 할 수 있겠느냐?"
나와 누나가 지하에 뿌리를 내린 오염된 세계수를 밀어내면, 난쟁이들이 땅울림으로 통로를 뚫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대지에 구멍을 뚫는 동안 군인들이 곁을 지켜줄 것이라고.
"저희는요?"
지수가 자신과 한세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김지수, 한세아 너희는 곧 다가올 싸움에 대비해서 체력을 비축하고 있거라. 기를 죽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재앙은 결코 쉬운 상태가 아닐 테니까. 무기나 탄약을 챙길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챙겨. 중간에 바닥나지 않게.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다."
그 물음에 답한 건 난쟁이 조이였다. 그는 준비에 모자란 부분이 없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다가 나와 누나가 통로를 뚫는 작업을 시작하면 군인들과 함께 돌발 상황을 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지수와 한세아는 어느새 다가온 예린을 챙긴 후 뒤로 물러났고, 나와 누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자리에서 섰다.
"현우야, 불을 너무 넓게 퍼트리거나 화력을 너무 높일 필요는 없어. 약한 불로 땅을 데운다고 생각하면 돼. 알았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좋아. 그럼 시작할게. 칸, 조이도 준비됐죠?"
"그래, 우리도 준비됐다. 언제든지 시작만 하거라. 제대로 보조할 테니."
난쟁이 칸과 조이의 답에 누나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수정들을 정렬시켰다. 임시로 가속과 반발 패널을 만들었을 때처럼 주변으로 퍼진 수정은 이내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웅-
전체적으로 보면 각 면의 꼭짓점을 담당하는 수정들이 있고, 면 정중앙에 자리를 잡은 수정이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회전하는 각 수정들은 정중앙의 수정에 힘을 보내고 있었다.
점점 밝게 빛나는 푸른빛은 선이 되고, 그 선은 중앙의 수정과 연결되었다. 그 선이 점차 굵어짐에 따라 전달되는 힘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앙의 푸른 부유 수정이 전달된 힘을 받아 내부에 입자의 응집체를 형성한 것이 보인다. 어느새 덜덜 떨리기 시작한 수정. 내부에 담긴 힘의 크기가 너무 커진 탓이었다.
마침내 완전 충전된 것처럼 보이는 푸른 수정이 내부의 힘을 한점으로 쏘아낼 준비를 마쳤을 때.
······드드드드드드드드!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정에서 시작된 진동이 아니라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