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4 - 464. 합류 (9)
재앙이 보낸 초대장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두 가지 선택 중 내가 고른 건 초대장을 받는 것이었다.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함정이라고 해도 허무하게 당해주지 않을 테니까.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위험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초대장을 받는다는 선택지를 고르게 만든 또 한 가지. 그건 지하에서 이질적인 힘이 느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묘한 감각이 깊은 지하에서 전해지고 있었고, 점점 더 커져가는 그 감각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뿌리로 내려가자. 지금 길을 새로 뚫는다고 해도 그 길이 뿌리에 비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누나, 내려가는 동안에 위험하지 않게 우리 주변에 장막 두를 수 있지?"
나는 그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확인 차 질문을 던졌다. 지금 느껴지고 있는 불안감과 상관없이 급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누나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분명 내가 느끼고 있는 걸 더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을 뿐이다. 애초에 제대로 확신할 수 있었던 적이 얼마나 있던가.
어차피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적이다.
"당연하지. 내가 그것조차 못했다면 저기로 내려가자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갑자기 무너지거나 세계수가 수작질을 부려도 내가 막아줄 수 있어. 그러기 위해 얻은 능력이야."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친구들 보고 통로가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달라고 할게요! 뿌리가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단하게!"
자신을 믿으라는 듯 상체를 툭툭 건드리는 누나와 양 주먹을 꼭 쥐며 외치는 예린이었다.
"그럼 내려가는 걸로 정해진 거네. 근데 이거 경사가 급한 수준도 아니고 완전히 수직이던데 어떻게 내려가지?"
지수는 다른 건 몰라도 내려가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려가다가 중간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녀였으니, 그런 걱정이 들 만도 했다.
"그것도 걱정마세요. 제가 발판을 만들 수 있어요. 만에 하나 발판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사라져도 수정으로 허공에 머물 수 있게 만들 수도 있으니, 추락해서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요."
"맞아, 지수야. 나도 있잖아. 그래도 걱정되면 내려가는 동안에 나한테 붙어 있어."
누나와 한세아가 지수를 안심시켰다. 그녀들의 말을 들은 지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아니, 뭐. 무섭다는 게 아니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못 말리겠구나. 너희 뜻대로 하거라.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군."
결국 뿌리를 통해 내려가는 것으로 결정되자, 난쟁이 칸과 조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바삐 지시를 내리고 있는 중인 연대장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했고, 연대장은 그들의 말에 반응하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보였을 것이다. 그 전에 누나가 난쟁이 칸, 조이, 연대장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칸, 조이. 두 분은 지상에 남아주세요. 연대장님과 다른 군인분들도요."
"뭐? 왜? 다 같이 몰려가서 빠르게 끝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통로 크기를 보아 하니, 전차 한 대 정도는 충분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건만."
"그렇긴 하지만 전부 다 내려가면 안돼요. 문제는 그게 아니기도 하고요."
수직 통로라는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난쟁이 칸의 말에 메이벨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나와 함께 지상으로 솟구치기 전에 딛고 있던 발판 역할의 패널을 형성하면 되는 까닭이다.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그럼 뭐가 문제인가?"
메이벨이 난쟁이와 군인들을 막아 세운 이유가 따로 있다는 어조에 연대장이 물었다. 물자를 재정비하고 있던 군인들이 행동을 멈춰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연대장님도 아시다시피 싸움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져들었을 뿐, 끝난 게 아니에요. 그러니 군인분들은 지상에 남아주세요. 남아서 이곳을 지켜주세요. 지금은 근처 일대에 있던 변종들이 뒤로 물러난 상황이지만, 그것들은 이곳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저희가 지하로 내려간 순간부터 공격이 재개되겠죠."
"······."
"이곳을 포기하지 않은 괴물들은 세계수가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숨을 죽여 기척을 숨긴 채로요. 그리고 저기를 보세요. 장막이 복구가 안되고 있잖아요. 코어가 되는 수정에는 문제가 없는데, 장막 복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오염된 세계수가 손을 썼다는 뜻이에요."
2차 공세가 올 테니 지상에서 버티고 있어 달라는 누나. 그녀는 지상에 남아 있는 전력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 달라고 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게. 돌아올 자리가 남아 있을 수 있게.
나, 누나, 난쟁이들이 뿌리가 아니라 새로운 통로를 뚫는다는 원래의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전차를 지하로 끌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전차 대신 소대 규모의 지원과 함께 지하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세계수의 뿌리가 솟구치면서 전차를 비롯한 여러 물자들이 소실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군인들의 전력을 특히 더 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2차 공세가 올 거라는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된 이상, 지상은 지상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전투를 해야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전력이라도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장막에 생긴 균열이 복구가 되지 않으니 더욱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니 난쟁이 칸과 조이는 지상에 남아서 군인분들을 도와주세요."
"······또 버티기라···. 그래, 우리 둘 다 남아야 그 괴물 놈들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막을 수 있겠지. 알겠네."
"버티는 건 우리 전문이지. 지상은 걱정 마라. 적어도 너희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볼 터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 답한 난쟁이 조이와 칸. 그들 중 난쟁이 조이는 지체없이 석벽을 세워 수성을 위한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솟는 벽이 주변을 뒤덮는다. 급조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두께는 매우 두꺼웠다.
끊어진 궤도를 수리한 전차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든 사격할 수 있는 기관총들도 근처에 설치된다.
엔진 이상으로 기동하지 못하는 전차와 차량들은 사람들이 직접 밀었다. 고정식 포대로라도 쓰기 위함이었다.
바로 쓸 수 있게 탄약 적재함을 옆에 두고 있지만, 그 양은 생각보다 적었다. 몰려들 변종들의 수를 생각해보면, 티끌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난쟁이 칸은 조이를 바로 돕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현우야, 긴 말은 안하마. 살아서 돌아와라. 그리고 이거 받거라. 기회가 생기면 수정을 냅다 심장에 박아 넣어. 그럼 바로 터질 거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내게 권총 한 자루와 수정 하나를 건넸다. 전용 파우치는 덤이었다.
칸이 말하기를, 과부하 원리를 이용한 수정은 극상성인 검은 입자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면 빠르게 달아올라 폭발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서둘러 물러나야 한다고.
"르한이 강화시켜준 도끼는 부숴 먹은 것 같은데, 다른 무기는 필요없느냐? 지금이 아니면 보급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 생각나는 건 전부 말해라. 내가 최대한 구해주마."
"방금 칸이 준 것만 해도 충분해요. 이걸 자루 삼아서 무기를 만들면 되니까요."
나는 지팡이라고 하기에는 짧고, 자루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막대기를 들어 보였다. 칼카타의 유산이나 다름없는 지팡이 파편을 무기로 쓸 계획이었다.
나와 상성이 좋은 것인지 이 파편을 매개체로 사용하면 불의 화력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무기를 챙길 필요는 없었다. 이 이상 무기를 더 챙기면 오히려 행동에 방해가 되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본 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칼카타와 친하게 지냈던 그였으니 이 나뭇가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입을 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가. 가서 저 거대한 나무가 하는 짓을 막아. 가서 더 이상 사람들이 죽지 않게 막아. 나는, ···괴물들이 너희들을 방해하지 못하게 막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난쟁이 칸은 요새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조이를 돕기 위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결코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눈이었다.
그건 지상의 사람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단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재앙을 이긴다는 단 하나의 미래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가자, 현우야."
누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내가 칸과 대화를 나눈 사이에 준비를 끝마친 일행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소방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지수.
그녀는 아닌 척하고 있었으나, 살짝 긴장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곧 벌어질 전투 탓이 아니라 아래로 길게 뚫린 수직 통로를 들여다 본 탓이었다.
탄약을 점검하며 총기를 고쳐 매는 한세아.
그녀는 비장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을 수정탄을 마지막으로 살피는 한편, 어깨에 달린 날개 유닛을 파닥거렸다. 위기 상황 발생 시에 일행을 구해줄 날개였으니, 계속 상태를 확인하는 듯했다.
성체급 정령 무리를 이끄는 예린.
아이는 정령들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정령들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몸짓을 보였다.
부유 수정으로 형성한 반발 패널을 아래에 띄운 메이벨.
나와 칸이 그랬듯이 연대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지상의 사람들을,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있는 태양을, 햇빛을 가리는 세계수를, 나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응, 가자."
나는 그리 말하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마지막을 향해서, 라는 말은 속에 담아둔 채.
"다시 만나지. 최대한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야."
연대장이 우리를 바라본다. 군인들이, 난쟁이들이,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바라는 것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
누나가 내 신호에 맞춰 각 수정을 천천히 회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지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깊고 깊은 저 아래로.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
깊고 깊은 저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