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5 - 465. 그라운드 제로 (1)
나, 지수, 예린, 한세아, 메이벨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밝은 지상을 뒤로한 채.
후웅···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주변을 밝히는 건 우리 주변을 부유하는 수정들. 각 수정들이 저마다 푸른빛을 뿌리며 통로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
내부로 내려가는 동안에 특별한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나무의 속살이 보일 뿐이었다. 내려갈수록 점차 통로가 좁아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통로는 일정한 면적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통로 벽면에는 기이한 넝쿨들이 자라 있었는데, 유사시에 저 넝쿨을 붙잡아 버틸 수도 있어 보였다. 그것의 줄기와 잎이 거친 벽면에 파고들어간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어 보인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굳이 넝쿨을 붙잡아 버티는 것보다 그냥 날면 되니까.
누나가 다루는 부유 수정도 있고, 한세아의 날개 유닛도 있지 않던가. 그러니 지금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봐둔 것에 불과했다.
······쿵 ······쿵 ······쿵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떠난 지상에서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아 그 소리는 매우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지상에서 벌써 전투를 벌어졌다는 건 분명했다.
"······."
"······."
지수, 한세아, 예린은 긴장한 낯빛으로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다.
"···너희 이상한 게 느껴지면 바로 말해야 해?"
예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정령들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현재 성체급 정령들은 시야 확보를 위해 모습을 숨긴 상태.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근처에 있다는 건 느껴지고 있었다.
정령들에게 괜찮은 답을 들었는지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예린은 나한테 찰싹 달라붙었다.
나는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긴장이 되는 건 매한 가지였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긴장감이 어느 정도 녹아내린 듯 예린은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지었다. 꼬리는 아직 굳어 있지만 말이다.
좀 더 내려가자 내부의 벽을 이루고 있는 재질이 바뀌는 것이 보인다. 나무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진한 갈색의 벽면이 점차 옅은 회색 재질의 석재 벽면으로 바뀐 것이다.
워낙 자연스럽게 이어진 탓에 벽의 재질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는 게 좀 늦을 정도였다.
벽면에 붙은 넝쿨의 양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넝쿨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물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통로를 메울 만큼 많이.
어느새 뿌리로 이루어져 있던 통로가 끝나고, 숨겨진 졸린사 연구시설에 진입한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해. 원래도 조심하기는 했지만, 이제부터는 더 조심해야 해. 봉인 시설 제어권은 세계수에게 전부 넘어간 상태일 테니까."
이 지하까지 별일없이 내려와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누나. 그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는 점이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릴 따름이었다.
그라운드 제로.
한때 지구를 이끌 새로운 빛이 탄생한 것을 기리며 붙은 명칭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의미가 변질한 상황이었다.
지구를 이끌 새로운 빛이 아니라 세상을 어둠에 잠기게 만든 재앙이 탄생한 곳으로 말이다.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이 봉인 시설은, 이 지하는 이제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전부 한때에 불과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의 형태는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으니까.
전차는 우습게 지나갈 정도로 넓은 면적을 가진 복도, 일정한 간격마다 설치된 격벽들, 하단과 상단을 밝히는 전등, 매끈한 표면을 자랑하는바닥과 천장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의 흔적 대신 단단한 바닥을 뚫고 자란 수풀, 혈관처럼 퍼져 있는 넝쿨, 두꺼운 격벽을 구긴 나무뿌리, 금이 잔뜩 간 바닥과 천장, 그사이를 메운 흙 같은 자연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밝았다. 단순히 누나가 다루는 수정의 빛에 어둠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 어둠을 밝히는 발광체가 달린 식물들이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식물이 변형된 것인지, 엘리가 왔다던 고향의 식물인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답을 알려 줬을 텐데, 그게 아쉬웠다.
지상과 다른 생태계가 새로이 형성된 것처럼 보이는 지하. 이곳이 오염된 세계수의 영역이라는 점만 아니었다면,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하의 풍경이 신비로웠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저 신비로워 보이는 광경은 함정이자 독이라는 것을.
신비하게 빛을 내던 발광체 내부에는 검은 입자가 가득 차 있었다.
단단한 바닥을 뚫은 수풀은 흡사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둘러져 있었다.
격벽을 엉망으로 구겨 부순 나무뿌리는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있지만, 금방이라도 휘둘러질 것 같았다.
호기심에 다가 갔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도 보였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꽉 막혀 있거나 무너져 내린 상태였으니까.
"지수씨랑 세아씨는 잠시 물러나 있어요. 예린이랑 현우는 나 좀 도와줘. 길을 뚫어야 해."
누나는 앞장서서 움직이며 수정들을 정렬시킨 한편, 지수, 한세아에게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의 신호에 맞춰 나와 예린은 앞으로 나섰고, 지수, 한세아는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할지 눈치챘다는 듯 벽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정확히는 벽면 하단에 자라 있는 팔손이 나무였다.
간신히 그 원형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변형된 팔손이 나무. 그 나무의 잎은 수많은 손아귀가 우리에게 뻗어지는 모양새였다. 중간중간 피어 있는 그것의 꽃 모양도 기괴해 꺼림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현우야, 네 불을 수정에 불어 넣어줘."
"그것만 하면 돼?"
"응,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해. 예린아, 너는 바람을 앞으로 불어 줘. 너무 강하게 불 필요는 없어. 불이 번지게만 하면 되니까. 할 수 있겠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 시작하자."
누나의 말을 끝으로, 나와 예린은 곧장 맡은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푸른 불을 누나가 정렬시킨 수정에 불어 넣었고, 예린은 정령들의 힘을 빌려 바람을 모았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기에 순식간에 끝난 작업의 마무리는 메이벨이 맡았다. 그녀는 수정의 내부에 차오른 불을 좀 더 응집하더니 곧장 전방을 향해 쏘아냈다.
화르르르륵!
수정의 첨단이 기울어진 직후, 매우 푸르른 화염이 일점으로 분사된다. 내가 다루는 불의 성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쏘아내는 푸른 불이 강한 화력으로 단숨에 태워 버린다면, 누나가 바꾼 내 불은 화력은 약해도 진득하게 타오르는 불이었다.
그러한 성질 덕분일까. 수정이 뿜어내는 화염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점점 멀리, 더 멀리 퍼져 복도를 잠식하고 있었다. 예린이 바람을 앞으로 보내는 덕분에 불은 더욱 끈적하게 타오르며 오염된 식물을 정화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타오른다. 푸른 불이, 검은 재가.
환기가 되지 않는 깊은 지하였기에 복도가 연기로 가득 차면 어쩌나 했는데,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허공에 퍼지는 연기 대신 바닥에 검은 재가 수놓아질 뿐이었다.
이윽고.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심장이 나올 거야. 거기에는 재앙도 있겠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그 코어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거야."
복도에 가득 차 있던 식물들이 모조리 정화되었을 때, 누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전방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나는 멈췄던 걸음을 재개하며 똑같은 답을 내뱉었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하고. 그래야 이 사태가 끝이 나잖아. 누나, 나는 전에도 말했듯이 누나를 믿어. 뭐든 할 수 있고."
"···그래. 그거면 됐어."
메이벨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선두에 있는 정령들 따라가는 예린, 지수,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긴 복도를 걸었다.
저벅- 저벅-
들리는 건 오직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뿐.
아직도 타오르는 푸른 불의 잔재를 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걷고 있을 때, 시야의 끝에서 매우 커다란 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고요함 속 터질 듯한 긴장감이 팽창하고 있을 때.
"아저씨. 이거 비밀인데, 나 종종 생각한다?"
지수가 슬쩍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남들에게 속내가 들킬까 무섭다는 듯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무슨 생각?"
"사실 지금 이건 꿈이고, 진짜 나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거라고. 이게 꿈이라면 아주 지독한 꿈이지만, 한편으로는 꿈이라서 다행이기도 해.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잖아."
벙커가 습격을 당했을 당시에,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었다는 지수. 그녀는 곧장 말을 이었다.
"아,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이전까지 그랬다는 이야기야. 이제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 그래,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우리가 여기까지 그냥 올 수 있었던 게 아니니까."
그리 말한 지수는 내 존재의 영향도 크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소방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여정의 시작부터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까지 쓰고 있는 그녀의 무기. 그건 하나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앞서 나아간 자들의 희생. 이곳이 현실임을 자각시켜 주는 물건.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더 이상 누군가가 허무하게 죽지 않았으면 해."
지수는 괜스레 도끼 자루를 꽉 쥐었다.
"이제 진짜 끝이 오는 거네요."
한세아가 노리쇠를 살짝 당겨 약실 상태를 확인했다. 이내 철컥,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앞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도달한 커다란 문의 앞. 다른 격벽은 전부 부서진 상태이건만, 이 문만큼은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 개방할게. 조금 뒤로 물러나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혹시 모르니까."
누나는 벽면에 달린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전력이 아직 살아있었다. 생각보다 여유 시간이 더 많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 인증이 되었으며 고정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그그그그긍···
[크르르르르···]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낮게 깔린다.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재앙의 존재감과 함께.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콰가가가가각!
어둠 속에서 바람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칼날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