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6 - 466. 그라운드 제로 (2)
무형의 바람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칼날이 쇄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
"모두 내 뒤로 와요!"
누나가 다급한 손짓으로 수정을 전방으로 배치했다. 부유 수정들이 빛나기 시작하며 전방에 반투명한 장막을 빠르게 만들어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메이벨의 앞에 굴곡진 장막이 형성된 것과 동시에.
까가가가가가강!
칼날들이 장막과 부딪혔다. 단단한 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린다. 수정이 형성한 장막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요동치는 건 덤이었다.
"큭···!"
나도 누나 옆에서 수정에 힘을 보탰다. 미약한 힘이라도 수정을 거치면 강해진다는 걸 아니까.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던 장막은 다행히 다시 수복되며 더 단단해졌다.
까가가가강!
후우욱-!
바람 칼날이 끝도 없이 부딪힌다. 숨통을 끊기 위해 쇄도하는 바람 칼날은 장막에 번번이 막혔고, 그럴 때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점점 더 짙게.
장막을 부수지 못하고 튕겨 나간 칼날들은 우리 대신 뒤편의 복도를 난자했다. 하나하나의 칼날이 어찌나 강하고 날카로운 것인지 통로의 벽면이, 아직 넘실거리고 있던 푸른 불이, 허공에 흩날리던 불씨가 인정사정 없이 갈려 나가는 광경이 보인다.
베기 힘든 것마저 전부 베어 버리며 지나가는 바람 칼날의 쇄도는 수많은 상흔을 남기고 나서야 사라졌다.
후두둑- 후두둑-
후방에서 잔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운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속도를 매우 느렸지만, 시야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칼날이 날아왔던 방향, 그라운드 제로의 시설 내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분명 초대를 받고 왔는데, 환영 인사가 너무 거치네."
누나가 전방을 노려보며 한 말이었다. 그녀는 재앙이 공격해도 언제든지 막을 수 있도록 힘을 소진한 수정과 활성화 상태의 수정의 위치를 서로 바꿨다.
장막을 펼쳐 낸 수정의 힘이 적지 않게 소모된 터라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제대로 내려왔네? 미련하게 길을 또 뚫어서 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 너희들이 다른 의심을 안 할 것 같아서. 의심은 너희 인간들의 특징이잖아."
이어서 누나와 똑같은 목소리가 우리들의 귓가에 울렸다. 고작해야 지금 내가 인지한 건 목소리밖에 없었지만, 재앙이 누나의 몸을 복제해서 의체로 쓰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쥔 사이에 재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너희가 여기까지 오도록 방관한 지 아니?"
흙먼지가 점점 더 가라앉는다. 그에 따라 재앙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 제로의 최심부의 모습과 함께.
"너희들이 품고 있는 조각. 마음대로 강탈해간 내 조각. 그것이 여전히 필요하거든. 하나로는 역시 모자라더라. 그러니 긴 말하지 않을게. 이현우, 메이벨. 너희의 조각을 내게 줘. 그럼 너희들은 살려줄 테니. ···아, 원한다면 너희 옆에 서 있는 애완동물들도."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처럼 기세가 등등한 그것. 오염된 세계수가 자기 목적을 당당히 드러내는 건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끝이고, 결국에는 자기 목적을 이루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멀리서 죽여서 가져가는 것보다 최대한 흠집없이 구하고 싶었다는 말을 했으니, 재앙이 가진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
흙먼지가 완전히 걷힌다. 그러자 우리는 내부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검은 입자의 독기, 어두운 구석에서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는 유기체, 벽면과 바닥을 뚫고 자란 나뭇가지, 그것에 붙어 있는 뾰족한 가시들, 천장에서 눈을 빛내는 종유석들, 거기서 떨어지는 검은 물방울.
그리고 나무뿌리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만들어진 커다란 의자.
인세의 지옥이 여기 있었다.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금 우리는 문에 형성되어 있던 검은 장막을 통과한 상태. 그 탓에 방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감각들이 마구잡이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을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인간에게 물들기라도 한 거야?"
나는 재앙이 바라는 대답 대신 비아냥을 담았다. 그도 그럴게, 자칭 신이라던 그것이 앉아 있는 의자가 왕좌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내가 있는 곳이 곧 세상인데! 그리고 이런 식이 너희에게 더 와닿을 것 같았거든. 어때, 현우야. 나 어울려?"
우리를 배려해준 것이라며 답한 재앙은 앉은 채로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은 누나와 닮아 있었다. 누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무심코 이를 악물 정도로 매우.
복제된 자신의 몸을 본 누나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권위를 그대로 내보이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의체. 그건 나무뿌리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배터리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다른 곳에 전달하는 전선처럼 몸과 하단 장치에 파이프들이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뿌리가 숨기고 있는 것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내부에서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걸 보니 심장일 가능성이 크겠지.
"···각오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직접 보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나랑 완전히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누나의 말대로 재앙은 메이벨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 보이는 색이 달랐다. 메이벨이 찬란한 금발을 가지고 있다면, 재앙은 싱그러운 녹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머리에 뿔인지 나뭇가지인지 무언가가 나 있는 것도 다른 점이었다.
"비록 원본이 너이긴 하지만 뭔가 차별점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대답은?"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친숙하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짓이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일까.
"지수야!"
나를 응시하는 녹안을 외면한 나는 대답 대신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지수가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예린, 한세아, 메이벨은 후방에서 기회를 노렸다. 다들 별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대화로 꼬인 상황을 풀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으니까.
"하아, 결국 이렇게 되나. 아쉽네. 정말로, 아쉬워."
오염된 세계수는 순식간에 자기 앞에 도달한 지수를 실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수가 번개를 두른 도끼를 휘두르는 건 거의 동시였다.
파지지지직!
푸화아악!
도끼가 재앙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것과 동시에 재앙이 앉아 있는 의자, 나무뿌리에서 대량의 검은 입자가 살포되는 듯 뿌려졌다. 그 검은 입자는 스파크를 튀기는 도끼날 앞에 모이더니 도끼가 재앙의 몸에 닿지 못하게 막았다.
점점 뭉쳐지는 검은 입자는 도끼를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허공에 꾸물거리는 검은 입자의 응집체가 의지를 가지고 빠르게 회전하며 날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으윽···!"
어떻게든 내려찍으려는 도끼와 그것을 막아 내려는 검은 입자의 응집체가 기 싸움을 벌인다. 반발력이 상상 이상인지 지수는 무심코 신음을 토해냈다.
"이런 씹···!"
그녀를 돕기 위해 바로 뒤따라 움직인 나도 크게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휘두른 무기도 무지막지한 검은 입자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무기도 지수의 도끼처럼 점점 더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불이 안 나와···!'
물 먹은 장작에 억지로 불을 붙이려는 것처럼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내 몸에 흐르는 푸른 입자는 정상적으로 불을 피워내려고 하고 있건만,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순간, 검은 입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찢어대고 있는 까닭이다.
아무리 불을 피워내려 화력을 높여도 보이는 건 눈 깜빡할 새에 사라지고 마는 불씨의 흔적뿐이었다. 그 불씨조차도 얼마 생성 되지 않았다.
"여기는 내 구역이야. 누구 마음대로 불을 지르려고? 그러면 안 돼, 현우야. 위험하잖아."
"내 누나인 척 말하지 마!"
"어머, 무서워라."
그것이 제 혼자 키득거릴 때.
타-아앙!
후방에서 들린 사격음이 빠르게 나를 지나쳤다. 누나의 보조를 받은 한세아가 한 사격이었다. 강한 파괴력을 동반한 푸른빛줄기가 시야 한 켠을 가득 메우며 재앙을 향해 쏘아진다.
그러자 재앙이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티잉-
일반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맑은 금속 소리가 나면서 나와 지수를 붙들고 있던 검은 입자들이 형태를 바꾸어 장막을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검은 장막과 특수 강화탄이 맞부딪혔다.
콰가가가가-
이제껏 들려왔던 굉음이 아니라 믹서기에 갈리는 소리가 내부 공간을 순간 가득 채웠다. 힘 싸움의 결과는 검은 입자의 승리였다.
단숨에 장막을 꿰뚫은 특수 강화탄이었으나, 힘이 모자라 겹쳐져 있던 두 번째 장막은 뚫지 못했으니까.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을 전부 소진한 강화탄은 회전력을 잃은 채 허무하게 튕겨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팅- 티팅···
강한 압력에 의해 찌그러진 탄환이 바닥을 구른다.
그리고.
"너, 거슬려."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가 후방의 한세아를 노려보며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