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67화 (468/497)

Chapter 467 - 467. 그라운드 제로 (3)

티잉-

재앙이 손가락을 튕기자 맑은 소리가 다시 한번 공간을 울린다. 그것은 한세아가 한 공격을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당연한 수순.

"세아씨! 피해요!"

나는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에 다급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한세아에게 각종 공격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

장막을 펼치기까지의 시간이 더 걸리는 탓에 한세아는 어쩔 수 없이 날개 유닛을 사용해 위로 도약했다. 높게 떠오른 그녀는 천장의 종유석 사이로 몸을 숨겼다.

푸화아아악!

꿈틀거리는 검은 입자 응집체가 유도 기능이 달린 것처럼 집요하게 그녀를 노린다. 채찍이 휘둘러지는 것처럼 허공을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응집체는 한세아 대신 애꿎은 종유석만을 박살 냈다.

쾅! 콰콰쾅!

쩌적-

탕! 탕! 탕!

순간적인 기동력 덕분에 응집체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한세아. 그녀는 조준에 시간이 걸리는 저격총 대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어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특수 강화탄보다는 색이 옅지만, 여전히 푸른 빛줄기가 응집체를 관통한다.

쐐애액!

그러나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인지 응집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사나운 기세를 드러낼 뿐이었다. 그 검은 힘은 종유석을 인정사정 없이 부숴 아래로 떨어트렸다. 단단한 종유석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나는 것과 동시에 파편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세아씨! 무리하지 말고 저한테 와요!"

"언니, 도와줄게요!"

소모한 힘을 회복한 메이벨이 수정으로 여러 겹의 장막을 만들어냈고, 예린이 정령들을 앞으로 보내며 시선을 끌어 주기 시작했다. 플레어가 터진 것처럼 좌우로 확 퍼지는 정령들은 시선 분산 역할을 똑똑히 해냈다.

터-엉!

수정의 도움을 받아 장막을 두른 정령들이 재앙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 냈기 때문이다. 물줄기가 바닥에 부딪치는 것처럼 사방으로 힘이 퍼진다.

"지수야!"

"알고 있어!"

그 사이에 나와 지수는 뒤로 물러나 일행과 합류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재앙의 시선을 한세아가 아닌 우리에게로 끌어오는 것. 그래야 강한 공격을 꽂아 넣을 수 있고, 후방에 있는 메이벨과 예린이 기회를 다시 노릴 수 있었으니까.

불은 여전히 피어 오르지 않았다. 정화의 불을 못 쓸 수도 있다는 예상을 아예 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부터 쓰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칼카타의 지팡이를 매개체 삼아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이지, 원래 쓰던 도끼였으면 진작에 검은 입자에 부식되어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지수의 도끼도 검은 입자의 파도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남은 두 번의 기회 중 한 번을 지금 써야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생각을 이어 나갈 틈은 없었다.

[크르르르릉···]

진흙이 뭉쳐진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검은 입자 덩어리가 꾸물거리더니 어느새 공포스러운 외형을 가진 변종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으니까.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오염된 세계수뿐만이 아니었다. 재앙이 만든, 재앙을 따르는 괴물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들었던 낮은 울음소리를 내던 괴물들 말이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뭉치더니 점차 딱딱하게 굳어 형체가 잡히고 있었다. 서로 접목을 하는 듯이. 그렇게 모자란 육체를 보충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기체와 뒤섞인 형체가 워낙 빠르게 잡혔기도 했고, 놈의 주위의 검은 입자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탓에 선제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공동을 강하게 울리는 포효를 내지른 그것은 발을 들더니, 바닥을 내려찍었다.

"이런 씹···!"

그 모습을 본 나와 지수가 자세를 낮춰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과 동시에.

콰아앙!

콰콰콰콰콰!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바닥의 검은 안개가 그 힘으로 훅하고 일어났다. 그라운드 제로의 내부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덜덜 떨렸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모양새에 우리도 멀쩡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후-웅!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지는 충격파는 정령의 도움으로 검은 입자의 속박에서 벗어난 우리를 곧바로 덮쳤다. 중심을 유지하기도 전에 몸이 붕 떠 부유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우당탕!

촤르르륵!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바닥에 짙게 깔려 있던 검은 안개가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확 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악!"

"큭···."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숨을 들이키려고 할 수록 무언가가 숨통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충격파가 헤집은 여파 탓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주변에 깔린 검은 안개였다.

호흡을 힘들게 만드는 주범인 검은 안개. 그것이 우리 숨을 들이쉬거나 내쉴 때마다 안에 품은 독기를 우리 몸에 누적시키고 있었다. 불을 피워냈다면, 이 안개 따위는 단숨에 걷어낼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기회를 제대로 잡았을 때 쓰지 않으면.'

재앙을 상대할 때 써야 하는 기회를 고작 변종을 잡는 것에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아쉬움을 애써 달랜 나는 칼카타가 남긴 유산에 땅울림을 둘러 도끼날을 만들어냈다. 콰드득, 돌이 조여지는 소리가 나면서 뭉뚝했던 도끼날은 점점 날카롭게 변해 갔다.

한세아, 예린, 메이벨은 푸른 장막에 의지해 검은 괴물의 공격을 버텨 낸 상황. 그러나 충격파 자체는 흘리지 못한 듯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

나는 지수와 눈이 마주친 직후,

타탓- 타타탓-!

그녀와 함께 곧장 검은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주변 시야 한 켠에 정령들 일부가 따라붙은 것이 보인다. 예린이 우리를 보조하기 위해 보낸 정령들은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괴물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아저씨! 내가 잠깐 멈추게 만들어 볼 테니까 그 틈에···!"

지수가 정령들을 뒤따랐다. 그녀는 달리는 와중에 강한 스파크를 튀기는 구체를 몸 주변에 형성했고, 번개 구체들은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검은 괴물이 지수에게 맞서 손을 들었다. 그 손에 모이는 검은 입자가 점점 많아지는 걸 보니 그대로 내려찍어 죽이려는 심산인 모양이다. 이내 괴물의 손이 아래로 향해 떨어진다.

그러나 그 속도는 지수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현저하게 느렸다.

콰-아아앙!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괴물의 손을, 그 손이 만들어 낸 충격파를 위로 도약하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허공에도 충격파가 퍼지긴 했으나, 지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저 휘둘러지는 도끼의 잔상만이 있을 뿐.

쐐애애액!

지수의 도끼가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그리고 푸른빛의 구체가 스파크를 사방으로 쏘아 보내며 떨어진다. 구체에 담긴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불규칙적으로 튀는 스파크는 주변의 검은 입자를 인정사정 없이 태워 댔다.

파지지직!

[크아아아아악!]

그녀의 도끼가 괴물의 머리를 일부 베어내는 것과 동시에 푸른빛의 구체가 괴물에게 직격으로 박혔다. 박힌 구체들은 구체의 형태를 잃어버릴 정도로 강하게 폭발하며 끈적하게 달라붙은 스파크로 놈의 몸체를 마비시켰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정령들은 아가리를 벌려 검은 괴물을 물어뜯었다. 그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 대신 무언가를 내려찍을 수 있는 도구가 있었으니까.

벌목 도끼보다 훨씬 커다란 날을 가진 내 도끼는 반짝거리는 푸른빛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고, 검은 괴물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여기서 괴물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재앙을 상대할 기회를 노린다는 건 요원했으니 말이다. 이 괴물을 처리해야만 재앙을 노릴 수 있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재밌다는 듯, 유흥에 불과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재앙을.

"흐읍···!"

숨을 더 크게 들이켜 폐부를 채운다. 괴물을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육체를 완전히 박살을 내놓거나 내부에 있을 코어를 부수는 것.

여기서 괴물의 몸을 완전히 박살 낸다는 건 힘들었다. 그도 그럴게, 체구의 차이가 워낙 컸으니까. 가루로 만들 정도로 몸을 부수기 위해서는 내가 팔을 수십, 수백 번을 휘둘러도 부족했다.

그러니 나는 내부에 있을 코어를 노렸다. 코어만 제대로 부순다면, 괴물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리라 기대하면서.

쐐애액!

지수가 베어낸 자리를 그대로 노리고 휘둘러지는 내 도끼가 이내 목적지에 닿았다. 아니, 닿은 것으로도 모자라 괴물의 몸체에 선을 그어 그대로 양단했다.

쩌어억!

[키에에에에엑!]

불쾌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괴물. 역겨운 속살을 그대로 내보이는 괴물을 본 나는 재빠르게 눈을 굴려 코어를 찾았다. 내 시선이 괴물 육체의 정중앙에 닿은 순간, 나는 검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만 부수면···!'

도끼를 회수한 내가 숨을 참은 채 이타를 날리려던 그때.

파바바바박!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괴물을 물고 늘어지던 정령들 사이로 수많은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검은 괴물이 몸을 번형시켜 만들어 낸 가시들이었다.

[━━━!]

가시에 관통당한 정령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수많은 가시들이 단순히 관통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자라나 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뒤로 물러나!"

아무리 두꺼운 철판이라도 가뿐하게 관통할 것 같은 가시들이 괴물의 몸체에서 튀어나오자, 지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이상함을 감지한 예린이 뒤늦게 추가로 정령을 보내 가시에 붙잡힌 정령들을 빼내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내부를 뚫고 자라는 가시들은 어느새 사방으로 뻗어지는 나뭇가지가 되어 정령들을 소멸시켰으니까.

···툭 투툭

강제로 소멸 당한 흔적. 오멘들이 괴물의 몸체를 타고 굴러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재앙은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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