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8 - 468. 그라운드 제로 (4)
까-드드득···!
정령들을 꿰뚫은 가시들이 점점 성장하며 정령들을 강제로 찢는다.
좁은 틈을 억지로 비집어 벌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
나와 지수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 무색하게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가시에 닿지 않기 위함이었다. 실질적인 육체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정령들이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가시들이 검은 괴물을 중심으로 길게 자라나서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접근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고, 그 사이에 기껏 힘들게 양단했던 괴물의 몸이 다시 붙고 말았다. 몸을 완전히 재생한 괴물이 포효를 내지르며 두 팔로 지면을 난타한다.
[크아아아아악!]
쾅! 쾅! 쾅! 쾅! 쾅!
사정없이 지면을 두드리는 힘에 의해 흙먼지가 각종 파편과 함께 자욱하게 일었다. 훅 일어난 검은 안개가 우리 몸을 뒤덮는다.
쩌저적-
충격이 퍼질 때마다 천장에서 종유석이 떨어진다. 그 종유석은 이내 하나의 창이 되어 아래에 있는 우리를 노렸다. 어설프게 피했다가 뾰족한 창에 관통이라도 당하면 큰일이기에 우리는 더욱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핏!
바닥과 부딪혀 깨지는 종유석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내 볼을 긁었다. 한 줄기 실선이 그어지며 새빨간 피가 송골송골 맺힌다.
"현우야!"
"우리는 괜찮으니까 그쪽에 더 신경 써!!"
메이벨이 급하게 장막을 추가로 펼쳐 도와주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지금 상황은 우리만 급한 게 아니었으니까.
메이벨, 한세아, 예린이 있는 쪽도 그쪽 나름대로 재앙의 공격을 정신없이 막아내고 있는 중이라 여력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힘이 분산되기라도 한다면,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공격이 그 틈을 노리고 피해를 입히겠지.
예린도 정령들을 더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 또한 위에서 떨어지는 종유석과 바닥을 휩쓰는 가시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탕! 타-앙!
날개로 날아 그나마 안전한 벽면에 자리를 잡은 한세아가 쏜 강화탄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허나, 빛은 어둠에 순식간에 잡아 먹혀 소멸될 뿐이었다.
바로 그때.
[크어어어억!]
검은 괴물이 괴성을 내질렀다. 어느 틈에 뒤로 돌아간 건지 지수가 놈의 등에 달라붙어 도끼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콱! 콰직! 콱-!
"왜, 이렇게···! 단단해······!"
필사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그녀는 이를 악문 채로 목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내가 양단했던 몸이 다시 하나로 붙기 전에 보였던 코어가 위치를 바꾼 곳이었다.
"지수야! 무리하지 말고 물러나!"
그리 말한 나는 지수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타타탓,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안개가 발자국 모양으로 밀려나면서 지면을 드러냈다가 숨겼다. 바닥이 아닌 허공을 부유하는 검은 안개를 보니, 망망대해를 헤집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처럼.
'저 상태로 두면 안돼···!'
달라붙어서 공격한다고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다. 검은 괴물의 특징은 접목. 본체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놈은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신체를 만들거나 바닥에 깔린 변종들의 사체를 부착하는 괴물이다.
우득! 우지직!
그런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검은 괴물은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다른 변종의 신체 부위를 뜯어내 강제로 부착했다. 유독 길고 가느다란 그 팔은 한때 누더기 변종이 쓰던 팔. 그 팔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곧장 등에 달라붙어 있던 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지지직!
지수의 귀가 쫑긋거리면서 그 팔의 공격을 눈치챘다. 전신에 스파크를 두른 그녀는 다리를 박차 공격을 피하려고 했으나,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녀에게 달려드는 팔의 수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어림잡아도 10개를 가뿐하게 넘는 그 수가 사방을 점거하며 그녀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달리는 속도를 높여 그대로 지수를 덮치는 것뿐이었다.
하나를 막아도 또 다른 하나가, 아니, 수십의 팔이 달려드니 막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않은가. 어차피 전부 다 막을 수 없다면 말이다.
쐐애액!
콰직!
나는 지수와 함께 포위망이 가장 얇은 곳을 찾아 도끼를 휘둘렀다. 좌우로 휘둘러지는 도끼날은 변종의 팔을 부수며 길을 열었다.
콰드드드득!
내가 땅울림으로 돌기둥들을 솟구치게 만들어 추가적인 공격을 막아낸 우리는 간신히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어도 당장은.
우당탕탕!
촤르르르!
그것이 관성을 이기지 못한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구르며 한 생각이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시야에 손아귀들이 방향을 바꿔 재차 달려드는 것이 보인다.
"이런 씹···!"
이번에는 피할 틈도 없었다. 전투의 열기가 몸에 들어차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내쉬는 가쁜 숨소리, 아직 일어나는 중인 지수,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는 몸, 전방에서 쇄도하는 변종의 손아귀, 수수깡처럼 부서지는 돌기둥, 솟구치는 검은 안개, 우리를 노려보는 붉은 안광.
"······!"
나는 도끼를 내세웠다. 그 과정은 시간을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처럼 매우 느리게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건만.
공격을 제대로 막아야 했다. 그렇지 못해서 검은 괴물의 공격이 몸에 침투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도 정령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부에서 자라난 가시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내가 도끼로 앞을 막은 것과 동시에.
터-엉!
최선두에 있던 변종의 팔이 도끼 자루를 강타했다. 무겁다. 가볍게 휘두른 손짓을 막는 것조차 무겁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나마 몸이 아닌 도끼로 받아냈다는 것이 다행일까.
콰콰콰콰콰!
충돌의 여파로 생긴 파동이 지면을 으스러뜨린다. 체구에 비하면 공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 그러나 그 간단한 동작에도 우리는 속절없이 밀려났고, 애써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다시 한번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쿵! 쿵!
힘을 상쇄하지 못해 몸이 바닥을 구른다. 물수제비마냥 몸이 통통 뛸 때마다 숨통이 턱 막혔다. 전보다 더 흐릿해진 시야에 정령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들어온다.
예린이 추가적으로 보낸 정령들이 시선을 끌어주고 있었다. 자신들이 가시에 꿰뚫리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방이 계속 이어지면서 검은 괴물에게 입히는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게 괴물의 숨통을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와 지수가 정령들이 벌어준 틈을 이용해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아.'
나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무심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겁에 질려 있었기에 불이 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검은 입자의 폭풍에 휘말려 불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재앙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고작 검은 괴물에게 기회를 한번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추진력. 어둠을 밝히는 불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피워내야 우리 측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몰랐다.
'아직 재앙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여전히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와 함께 내 시선에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손목 시계가 보인다. 그건 오후 3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있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죽어 나갔을까.
미동도 없이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 스친 순간,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한번 쓰기로 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괴물의 지척까지 접근한 우리는 괴물의 공격을 피해 위로 도약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입자가 혈류를 타고 내달린다.
허공에 떠오른 나와 지수를 검은 괴물이 바라본다.
심장 속에 갇혀 있었던 푸른 입자들이 그간의 답답함을 해소하겠다는 듯 폭주한다.
괴물이 접목으로 통해 불어난 수십 개의 팔을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혈관을 통해 몸 구석구석 퍼진 푸른 입자들은 몸 한바퀴를 돌았다. 할 일을 마친 푸른 입자는 다시 심장 속으로 돌아왔다.
위에서 떨어지는 우리를 노리는 수십 개의 손아귀. 그러나 우리는 피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을 뿐.
푸른 입자를 다시 내뿜으며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 그러나 가슴이 터질 것 같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서서히 진동하기 시작한 푸른 입자가 내게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려주었을 뿐.
···화륵
검은 입자의 파도를 버틴 푸른 입자가 불씨가 된다. 그와 동시에 힘없이 꺼지기만 하던 불이 푸른 빛을 되찾았다.
화르르르륵!
그리고 그 불씨는 순식간에 기세를 부풀리며 나와 지수를 휘감았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눅눅하고, 끈적한 느낌이 불에 의해 사라진다.
하수구의 습기마냥 불쾌했던 습기가 사라지며 오직 건조함만이 남았다. 불길이 된 푸른 불이 주변을 불사른다. 검은 입자를 정화하는 푸른 불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엑!]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던 수십 개의 손아귀들이 모조리 불타 재가 되고 있었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접목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검은 괴물의 본체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게 놈이 괴성을 지르는 이유였다.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몸체가 불타고, 드러나는 건 검은 입자가 소용돌이치며 보호하고 있는 괴물의 코어.
파지지직!
"흐읍···!"
코어를 포착한 지수가 도끼를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괴물이 코어의 위치를 바꿀 수 없도록 빠르게.
파삭!
도끼가 깔끔한 선을 그리며 코어를 지나가자, 그건 괴물이 다시 재생시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도끼가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자 검은 코어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뿌려졌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파도가 친다. 검은 입자와 푸른 불이 힘 싸움을 하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공동 전체에 푸른 불이 넘실거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흐음···, 정화의 불이라."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재앙이 턱에 손을 괸 채 나를 응시한다. 색은 같지만, 누나와 다르게 사이한 빛을 내는 녹안이 너울거리는 푸른 불을 응시한다.
검은 안개를 불사르는 푸른 불을, 어느 한쪽이 끝장나야 꺼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내게 속삭였다.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자기 나름대로의 상냥함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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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mm]님이 그려주신 예린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