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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469화 (470/497)

Chapter 469 - 469. 그라운드 제로 (5)

"누가 보면 내가 악인 줄 알겠어. 정화의 불이라니. 현우야, 네 생각은 어때?"

재앙의 속삭임.

나를 괴롭혀 왔던 그 속삭임이 귓가에 맴돈다.

"······."

나는 답하지 않은 채 곧장 내부의 불을 다뤄 앞으로 튀어 나갔다. 넘실거리는 푸른 불이 내 움직임을 따라오며 바닥을 그을렸다.

"이번에도 무시하는 거야?"

재앙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내가 노리는 건 나무뿌리가 꽁꽁 감추고 있는 것. 심장이라 추정되는 것이었다.

화르르륵!

검은 괴물을 붙태우고, 검은 안개를 몰아내는 푸른 불이 내 몸에 휘감긴다.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푸른 불은 공간을 조금씩 점거해가면서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딸깍-

언제든지 파우치 안의 수정을 꺼내 들 수 있게 준비하는 한편, 나는 도끼로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 그어진 선이 검은 입자의 파도를 그대로 갈랐다.

화르르륵!

서걱!

그건 장막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휘둘렀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베인 장막 사이로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재앙이 보인다. 그것이 내게 속삭였다.

"폭력의 악순환을 끝는 법을 하나 알려줄까? 답은 간단해. 더 큰 폭력으로 내려찍는 거야. 너희가 그토록 부르짖는 대화나 어설픈 공존 따위가 아니라."

재앙이 손가락을 튕겼다. 휘몰아치는 검은 입자의 파도에 의해 녹색 머리칼이 두둥실 떠오른다. 뒤에 무수히 많은 나무뿌리들을 등진 채로. 흡사 악마와 같은 광경. 그건 지독하게도 끔찍한 악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파-앙!

나무뿌리들이 공기를 터트리며 내게 쇄도한다. 가시처럼 뾰족한 첨단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자유자재로 휘어지며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눈 깜빡할 새에 내게 도달한 나무뿌리들이 푸른 불길을 견디며 나를 꿰뚫으려는 그때.

···파직

파지지지직!

뒤에서 스파크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내 앞을 가로질렀다. 푸른 스파크가 지면과 허공을 타고 흐르며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 아저씨!"

내 앞을 지나가며 나를 노리던 뿌리들을 모조리 밀어낸 지수. 그녀의 도끼는 비록 뿌리를 완전히 베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밀어내 틈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충분했다.

터터텅!

치이이익!

도끼날이 지나가 뭉개지고 으깨진 나무뿌리들이 검은 체액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그 체액들 중 일부가 내게 팍 튀었으나, 푸른 불이 휘감긴 내 몸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증발했다.

[크르르릉!]

[끼이이이이이익!]

지수를 뒤따라온 정령들이 저마다의 이빨로 뿌리를 물고 늘어진다. 지수와 정령들의 공격에 고통을 느낀 뿌리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멈췄다고 하기보다는 제압이라는 표현이 더 옳았다.

나는 그 사이에 재앙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속도를 줄여 뿌리를 피하지 않은 이유는 지수가 나를 도울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바람에 보답했으니, 이제 내가 그녀들의 바람에 보답할 차례였다.

화르르륵!

나는 불길이 휘감긴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곧장 아래로 내려찍었다.

목표는 심장을 보호하는 두꺼운 나무뿌리.

콰-아앙!

모루 위의 강철에 망치가 내려쳐진 것처럼 푸른 불통이 확 터진다. 도끼날이 뿌리를 파고들자 쩌적 소리가 난다.

"흐읍···!"

자루를 있는 힘껏 쥐며 도끼에 무게를 더 싣자 도끼는 뿌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날을 중심으로 퍼지는 푸른 불은 뿌리에 옮겨붙었고, 그것들을 이내 재로 만들었다.

이윽고.

쩌-억

도끼가 뿌리를 그대로 찢어 버린다. 그와 동시에 내부가 드러났다.

"······?!"

내지른 도끼를 곧장 회수해 이타를 날리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재앙이 앉아있던 거대한 의자의 하단부. 그곳에는 심장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곳에 있던 것을 보자 나는 포식자를 눈 앞에 둔 피식자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기가 한가득 몰렸던 머리가 빠르게 식어 얼음이 된 느낌이었다.

"이런, 어쩌나. 네가 찾던 게 아닌가 보네? 꺄하하하하하하!"

내 표정을 보자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재앙. 그것이 서서히 손을 들었다. 다시금 손가락을 튕길 모양이다.

"······문? 분명 관련 자료는 전부 폐기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누나가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재앙은 웃었지만, 우리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뿌리가 부서지고 드러난 내부에는 만개하기 직전인 꽃봉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구 형태의 응집체. 그것을 감싸고 있는 수십 겹의 꽃잎. 그 무엇보다 새하얀 꽃잎으로 덮여 있는 그것은 우리가 노리던 심장이 아니라 문이었다.

엘리가 온 고향, 그들이 잃어 버린 고향과 통하는 문 말이다. 그리고 그 문은 한 세계를 이미 망가트린 또 다른 재앙이 있는 곳이었다.

"메이벨,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이 몸과 같은 몸을 가진 너니까."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가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것이 손가락을 튕기자 꽃봉오리가 천천히 펼쳐지며 미증유의 힘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검은 입자가 가득한 세계, 엘리의 잃어 버린 고향과 통하는 문이 열린다.

으득!

그러한 느낌을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혀를 깨물어 몸에 걸린 비정상적인 경직을 풀었다.

순간 강하게 느껴진 고통에 구속이 풀렸고 황급히 푸른 불로 꽃을 불태우려고 했으나,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누가 가만히 두고 볼 줄 알고-!"

"가만히 두고 봐야 할 거야."

찰나에 불과했으나, 망설임의 대가는 매우 뼈아팠다. 나지막하게 재앙의 목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꽃이 만개했으며, 검은 입자가 폭주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웅!

괴물이 만들어냈던 충격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파동이 퍼진다. 그 파동은 코앞에 있던 내게 직격했다.

"커헉!"

내부를 진탕시키는 파동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와중에 재앙이 입을 열었다.

"다 부수지 않으려고 고생 좀 했지! 문을 만들 기본적인 설비를 가동시키려면 연구소 전력을 살려 놓아야 했거든."

그라운드 제로 시설의 전력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 있었던 이유.

"물론, 기본 틀만 만들고 나머지는 다 내 수제작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력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긴 했지만, 일부러 남겨 봤어. 뭔가 전력이 살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너희들이 어떤 기분을 받을지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어땠어? 희망을 느꼈어?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어?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재앙의 말대로, 연구소 전력이 살아 있는 걸 보고 희망적인 느낌을 받았던 사실이다. 인간이 만든 시설이 세계수의 폭거로부터 버텼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것이 전부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듣자, 지금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현우씨!"

허공에 붕 뜬 나를 받아 준 건 한세아였다. 그녀는 내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에 내 몸을 붙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그녀가 다급한 어조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귀에 들리고 있는 건 오직 내 거센 심장 박동 소리와 재앙의 속삭임뿐.

"생각보다 빨리 들키긴 했는데, 이제는 상관없어. 자아, 어서 말해 줘. 현우야, ···지금 기분이 어때?"

나는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정면을 눈에 담았다. 어둠 속에서 녹안이 사이하게 빛을 낸다.

폐허가 된 그라운드 제로의 내부, 무너져 가는 동굴에 가까운 풍경이 배경이라 그런 것일까. 그 녹안이 섬뜩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섬뜩한 건 꽃잎 위에 자리 잡은 검은 구체였다.

"······너."

"꺄하하하하하!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다시 한번 제안 할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너희들이 가진 조각을 내게 줘."

"꺼져! 우린 아직···!"

"그렇구나. 아쉬워라. 정말로, 아쉬워. 하나로 연결된 너희라면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너희도 다른 것들과 똑같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의 심장을 파헤져 조각을 빼내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재앙은 손가락을 튕겼다. 팅- 소리와 함께 검은 구체는 꽃잎에서 나오는 검은 입자를 흡수하며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누나가, 우리가 느끼고 있던 힘의 총량이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해! 문이 열리게 둬서는 안 돼!"

누나가 다급하게 외치며 일행을 지키던 수정들을 앞으로 보냈다. 아직 미완성인 문을 지금 막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검은 입자에 의해 세상이 완전히 끝장나고 말 거라며 외치면서.

"언니! 저 보조해주세요! 제가 막아볼 테니까!"

한세아가 저격총을 재앙의 머리를 향해 조준했다. 그녀의 요청에 허공을 유영하던 수정들이 각 위치를 잡았다.

지이이잉!

입자를 내부에 집속시키고 있는 수정들은 이내 나, 한세아, 예린, 지수, 메이벨을 노리고 쇄도하던 뿌리들을 향해 광선을 발사했다.

수정의 첨단에서 쏘아진 푸른 광선이 뿌리를 제압하며 강화탄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나도 길을 여는 것을 돕기 위해 응집한 푸른 불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앙!

검은 구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접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수정이 제압한 뿌리를 지나 구체에 닿기 직전이었던 정화의 불이 폭발의 기세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터진 정화의 불이 일종의 장막 역할을 해주었기에 한세아가 쏜 강화탄이 날아갈 수 있었다는 것일까.

비록 풍랑 속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푸른 빛줄기였지만, 처음에 노렸던 재앙의 머리를 향해 제대로 날아갔다.

까-앙!

재앙이 다루던 검은 장막은 내가 뿌리를 제거하면서 같이 사라진 상태였던 덕분에 강화탄은 재앙에게 무리 없이 직격할 수 있었다. 단단한 물체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노려보던 재앙의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진 것이 보인다.

"맞았···!"

그 모습에 예린을 보호하던 지수가 순간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미친년."

"이런 씹···."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가, 뒤로 젖혀졌던 재앙의 머리가 서서히 앞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화탄이 재앙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아니, 이걸 맞췄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재앙이 강화탄을 입에 물고 있었으니까.

강한 힘이 담긴 특수 강화탄을 입으로 받아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받아 낼 줄은 더더욱.

"고작 이걸로 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안일하다고 말해주고 싶구나. 어리석은 것들아."

재앙이 입에 물고 있던 탄환을 퉤 뱉는다. 넘실거리던 푸른 불을 꺼트리고 주변을 잠식한 검은 입자에 의해 벌써 부식되기 시작한 탄환이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재앙을 제압하면 그것이 다루던 불안정한 문 또한 자연스레 사라지리라 믿었던 우리의 희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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