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1 - 471. 그라운드 제로 (7)
━━━━━━!
가까스로 방향이 뒤틀린 검은 광선이 나 대신 시설 내부 천장을 강타했다. 안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한 것인지 잔해가 별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광선이 지하 천장을 부수면서 나아갈 때마다 입자에 닿는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가루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쿵! 쿵! 쿵!
극상성인 입자의 충돌이 주변을 헤집어 놓은 탓일까. 내가 재앙의 공격을 받아친 순간을 기점으로 잃어 버렸던 감각이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막을 두드리는 굉음, 바싹 말라붙어 뻑뻑한 눈, 근육이 찢어져 느껴지는 고통,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 정신을 괴롭히는 강한 두통.
망가진 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허나, 그 고통에 나는 내가 살아남았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내가 검은 광선을 막지 못했다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게 다 끝났을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신을 차리는데 고통이 도움이 되다니.
"···이걸 막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재앙의 모습과 함께 만개한 꽃이 보인다. 수십 겹으로 둘러진 새하얀 꽃잎들 사이로 블랙홀처럼 주변의 대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검은 구체는 덤이었다.
바로 그때.
탁-
"흐, 으윽···."
누군가 옅은 신음을 내면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필사적으로 부상을 회복시킨 지수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코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누구, 마음대로··· 끝을 내. 나는, 우리는 아직 안 끝났어···!"
너를 막아 낼 수 있다고, 그리 말하는 지수를 재앙이 비웃는다.
"겨우 한번 막아 낸 주제에. 고작 너희들이, 겨우 5명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어리석-"
"어리석은 건 너야. 신이니 뭐니 거창하게 떠들어댄 주제에, 인간이 만든 개념인 수에 기대는 꼴을 보니 네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 수밖에 없네. 너 따위는 신이 아니야. 신이 될 수도 없고."
지수가 재앙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가치를 매기라고 만든 숫자는 희망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말로.
'네가 인간의 몸을 빼앗고,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 대화하는 건 너 또한 우리에게 동화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한세아와 예린을 보호하기에 용이한 위치를 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였던 씨앗이 3개로 나뉘어졌을 때, 각 부분은 물리적으로 분리가 되어 있어도 입자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눈을 뜬 직후에 각종 부작용에 시달렸던 것이고, 누나가 내게 목소리를 전달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세계수에게 역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 현실이 되어 세계수가 인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그 집착이라는 것이, 인간을 모조리 죽이는 것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하라고? 그렇게는 안 되지. 이제 누군가 대신 희생하는 모습을 보는 건 지긋지긋해."
절뚝거리면서 내 옆에 선 지수가 재앙을 노려본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담아서.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문명의 발전이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도구나, 존재하지 않는 신의 구원 덕분이 아니었다.
바로 이타심을 가진 소수의 인간들 덕분이었다. 이기적이기에 이타적일 수 있는 인간들 말이다.
"오만해. 스스로 이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현우,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해와 화합이라는 단어를 앵무새처럼 짖어대는 것들과 뭐라 달라?"
"나를 말하는 게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말하는 거지."
그래, 그건 나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 그릇이 작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현우야, 조금 전 검은 입자가 우릴 침식했을 때, 내가 역으로 몇 가지 알아낸 게 있어.'
간신히 부상을 지혈해 피를 멈추게 만든 누나가 목소리를 전달했다. 재앙이 듣지 못하게 속으로 전달한 목소리였다.
'전부 거짓이었어. 재앙이 태연한 척을 했던 것도, 금방이라도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말도. 전부 다 기만이었던 거야.'
저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못 하는 거다. 몸을 복제했다고 해도 걸을 수가 없었던 거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에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오염된 세계수에게는 달랐다. 그건 앞으로 걷는 법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으니까.
그러니 재앙은 걷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에서 우리를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자에 앉아 걷기를 포기한 채로.
'의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연결된 파이프 보이지? 그것들은 하단부의 꽃과 연결되어 있어. 문을 가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연료를 주입하는 거야.'
누나의 말대로 전선처럼 연결된 파이프관들이 의체와 뿌리, 뿌리와 검은 구체를 연결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부에서 무언가가 계속 이동하는 듯 내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 같은 공격을 바로 하지는 못해. 그 정도로 많은 양의 검은 입자를 모으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래서 지금 너희와 어울려주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앙은 여전히 앉아 있는 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내려온 순간부터 우리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흩어진 조각에 대한 갈망 때문일까. 우리가 무슨 행동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일까.
검은 구체에서 입자들이 휘몰아치며 일대를 장악한다. 그 범위는 점점 늘어나 우리가 발을 디딜 공간이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재앙이 다루는 힘만큼은 진짜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약이 많아. 많을 수밖에 없어. 그도 그럴게, 문 프로젝트 자체가 미완성으로 끝났으니까. 아무리 내 몸과 지식을 훔쳤다고 해도 혼자서는 완성시킬 수 없었겠지. 할 줄 아는 게 힘 자랑뿐이라면 더욱이. 그러니 현우야, 만약 뭔가를 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야.'
재앙이 하나 간과한 것. 혹은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드러내어 우리가 새삼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한 것. 그건 문이 불완전하다는 것이었다.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다. 재앙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맴돌았다. 방심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줄기 희망을 따라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빛 한점 없는 어두운 세상에 갇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앞으로 튀어 나가기 위해 자세를 살짝 낮추자, 의중을 알아차린 누나가 내게 남은 수정을 모조리 붙였다.
'···보조할게. 네가 쓰러지지 않도록.'
하나는 지상의 장막을 유지시키기 위해 두고 왔고, 두 개는 재앙의 공격에 의해 부서졌으니 현재 사용 가능한 부유 수정은 총 4개. 그나마 남은 4개조차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았다. 과부하를 지속해서 받은 탓에 당장 깨져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내 옆에 서 있던 지수가 전의를 불태우며 도끼 자루를 꽉 쥐었다. 한세아는 내게 슬쩍 수정탄을 내보였다. 특수 강화탄이 먹히지 않고, 그것을 쏠 저격총도 박살이 났으니 비장의 한 수를 쓰려는 모양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예린은 푸른 가루를 꼭 쥔 채 추가 지원군을 부르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정령을 부를 심산인 듯했다.
재앙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 전부 거짓이고 기만이라면, 진짜 심장은 어디에 있을까. 거대한 힘은 여전히 그것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 자체도 하나의 위장이 아닐까.
"뚫겠습니다."
나는 그리 말한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파지직!
전신에 스파크를 두른 지수는 한순간에 거리를 반이나 좁힌 상태였다. 그녀는 사방에서 쇄도하는 응집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재앙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탓- 타타탓!
그녀가 앞에서 시선을 끌어 주니 나는 한결 수월하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마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감히···!"
재발사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누나의 말처럼 어마어마한 힘이 담긴 검은 구체가 아니라 수정처럼 뭉쳐진 응집체들이 얇은 광선 다발을 토해낸다. 그물망처럼 펼쳐지는 모양새에는 나와 지수의 접근을 봉쇄하려는 재앙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이이이잉-!
허공에 여러 선이 그어진다. 그 선들은 바닥, 벽, 천장을 가리지 않고 긁어댔고, 지나가는 길마다 작은 폭발을 만들어냈다.
콰-앙!
지수가 푸른 스파크로 이루어진 구체를 집어던져 광선에 담긴 검은 입자를 상쇄시켰다. 서로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는 거센 파동이 터졌다.
완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기에 나와 지수는 바닥을 굴러 허공을 가르는 검은 광선을 피해야만 했다. 몸을 스치듯 지나가는 광선. 언뜻 일자로 쏘아지는 광선 내부에는 검은 입자들이 소용돌이 치며 회전하고 있었고, 그건 주변 사물을 빨아들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아으윽!"
그 탓에 우리는 기껏 바닥에 몸을 내던져 피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끌려와 엉망진창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목표로 하지 않았던 바닥에 처박힌다.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해서 일어난 나는 흐릿해진 시야로 검은 일대를 보았다. 지옥에서 뻗는 손아귀처럼 검은 입자들이 나와 지수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여기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로.
그럼에도, 나는 두 다리로 일어섰다. 지수도 균형을 잃고 넘어졌으나, 달릴 준비를 마쳤다.
그와 동시에.
웅웅웅웅!
칼카타의 유산이 포효를 내지른다. 한계까지 집속된 입자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태양의 플레어처럼 표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가 사라진다.
쐐애애액!
화르르르륵!
나뭇가지를 넘어 어느새 내 주변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한 푸른 불의 파도가 내 숨통을 끊기 위해 쇄도하는 넝쿨을 불살랐다.
검은 입자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우리는 다시 달렸다.
- 상대하는 방법에는 수십 가지 방법이 있다. 굳이 무식하게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난쟁이 칸이 했던 말. 그 말대로 나 혼자 모든 걸 감당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부담을 기꺼이 나눠 들어 줄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려면 힘을 제대로 싣는 게 중요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른다고 강한 공격이 되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기본조차 못 하는 자들이 많아.
칼카타가 했던 말. 그 말을 되새기며 무기에 무게를 실었다.
쩌적-
후우웅!
재앙의 손짓에 종유석이 떨어진다.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박살 내겠다는 듯 비처럼 쏟아졌다. 하늘에서 퍼붓는 공격이었다.
"흐읍···!"
우리의 무기가 묵직한 돌 덩어리를 쳐 낸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땅울림으로 만들어 낸 도끼날이 부서진다. 인간이 지키기 위해 아래에서 내지르는 공격이었다.
"뚫어, 현우야!"
내게 강한 의지를 전달한 누나가 수정으로 장막을 만들거나 푸른 광선을 쏘아 길을 열었다. 입자로 이루어진 세상이 한층 선명하게 보이며 재앙의 의도가 읽어졌다. 그것은 나를 노려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던 속삭임.
언제나 하나가 되자며 내 몸을 망가트렸던 속삭임.
그것들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순간 몸을 휘청거릴 정도로 수많은 속삭임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 어떤 역경이 나를 덮쳐 왔어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네 앞에 있어.'
그러니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리고 난 저것을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악은 무언가를 옳음으로 바꾸지 못한다. 악은 그저 악일 뿐이다.
「이현우!! 나를 벗어나려고 하지 마! 어차피 너는 내 속삭임에 다시 걸려 들고 말 테니까!!」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를, 찢긴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똑똑히 느낀다. 살아 있다는 박동과 함께.
재앙은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터다. 내가 꿈에게 잡아 먹혀 있던 그때 했던 말을 말이다.
내 말은 그때 꿈에서 한 말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놓고 포기할 일은 없었다. 그저 답이 있는 곳을 향해서, 내 믿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서 걸어갈 뿐이다.
화르르르륵!
쾅! 쾅! 쾅! 쾅! 쾅!
재앙과 내가 발산하는 압축된 두 힘이 서로 어지럽게 얽히며 서로 힘의 방향을 잃었다. 그 탓에 애꿎은 주변만 망가졌다. 검은 안개가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사라진다.
한 걸음 크게 내디딘다. 누나의 인도를 따라서.
"······오지 마."
재앙의 얼굴에 두려움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제 두려움을 감추려는 듯 재충전하고 있던 검은 구체를 강제로 가동시켰다. 대기를 빨아들이고 있던 문이 불완전하게 열리며 힘들게 검은 입자를 토해냈다.
···우우웅!
수십 겹의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던 꽃이 반발력을 감당하지 못해 비명을 내질렀다. 새하얬던 꽃잎들이 시들어 죽어 가고 있었다.
지이이잉!
검은 구체에서 검은 광선이 대기를 가르며 쏘아진다. 허나, 그 힘은 전처럼 엄청난 위용을 뽐내지는 못했다.
그와 동시에.
타-아아앙!
검은 광선에 맞대응하며 후방에서 푸른 섬광이 터졌다. 한세아가 수정탄을 발사한 것이다.
콰가가가가각!
푸른 섬광이 빛무리를 이끈다. 그 빛은 검은 광선을 간단하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무엇보다 눈부신 푸른빛이 검은 광선을 지나 재앙을 보호하던 장막을 단숨에 깨부쉈다. 장막이 유리처럼 깨져 허물어진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빛무리는 손가락을 튕겨 수작을 부리려는 재앙의 손을 날려 버렸다.
"아아아악!"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커다란 비명이었다.
재앙은 그제야 다급한 기색을 보이며 우리를 필사적으로 막아 세우려고 했다. 남은 손으로 다급히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수면이 요동치며 솟구쳤다.
"아저씨! 날 믿고 멈추지 마!"
지수가 요동치는 수면을 잠재우기 위해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녀의 도끼에는 부유 수정이 건네준 힘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허공을 지지는 스파크를 사방으로 뿜어내던 도끼는 이내 바닥에 내리꽂혀 내부의 힘을 전부 발산했다.
파지지지직!
내지른다. 의지를. 지면을 달리듯 불태우며 빠르게 퍼진 스파크는 검은 입자를 한순간 마비시켰다.
파바바박!
셀 수도 없이 수많은 가시가 쏟아지고 있는 광경이 주변을 밝힌 스파크에 의해 드러났다. 기만으로 점철된 재앙의 또 다른 노림수였다.
티티티티팅!
버텨낸다. 억압을. 그 가시들을 장막이 받아냈다. 허나, 받아 내야 하는 그 수가 워낙 많아 앞으로 갈 때마다 수정이 하나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오지 마!!"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재앙이 쓰고 있던 가면이 부서졌다. 그것은 이제 두려움이 완연한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지만, 그것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연대장이 이걸 전쟁이라고 했던가. 내 생각은 다르다.
이건 투쟁이다.
싸우고 싸워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이 세상에 증명해 오지 않았던가.
강하게 내딛는 한걸음.
좁혀지는 거리.
또다시 강하게 내딛는 한걸음.
점점 좁혀지는 거리.
다시. 한 번 더. 한 번만 더.
그렇게 발을 내딛기를 수십 번.
어느덧 내 앞에는,
"인간 주제에 감히 나를!!"
내뱉는 말과 달리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있는 의체가 있었다.
"이게 네가 준비한 전부라면! 우리가, 이긴다···!"
나는 재앙에게 돌진하는 와중에 내 품속에 있던 수정을 위로 던졌다. 내가 던진 수정을 지수가 받아줄 것이라 믿고서.
"이 버러지들이 기어코! 나를 지켜!!"
재앙의 외침에 검은 구체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건 접근하는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폭발을 일으켰다.
"···믿어 줘서 고마워, 아저씨."
공중에서 수정을 낚아챈 지수가 그대로 몸을 내리꽂으면서 꽃에 수정을 쑤셔 박은 건 거의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