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2 - 472. 그라운드 제로 (8)
콰-아아아앙!
검은 구체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수차례 터져 나오는 파동. 구체 바로 앞에 수정을 설치했던 지수는 그 파동에 휘말려 뒤로 붕 날아갔다. 뒤로 날아가는 그녀가 내게 다급히 외친다.
"···아저씨···! 수정 설치 완료! 빨리 뒤로 물러나!!"
그리 외친 그녀는 이내 허공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아 무사히 착지했다.
지수와 달리 나는 파동에 밀려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순전히 힘을 줘서 밀려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검은 구체에서 파동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검은 장막이 깨진 사이에 지수가 꽃에 쑤셔 박은 수정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푸욱-!
칼카타의 유산으로 재앙이 급히 두른 나무 뿌리를 부순 나는 그것이 움직이는 의체의 심장을 뚫기 위해 앞으로 내질렀기 때문이다. 비록 심장을 꿰뚫기 직전, 재앙이 남은 손을 들어 막기는 했지만 무기가 그것의 몸에 박혀 고정되기에는 충분했다.
"너, 너···!"
공포에 떠는 눈이 나를 담는다.
분노에 가득 찬 눈이 너를 담는다.
그러다가 문득, 의체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날 죽일 거야, 현우야? 나 아파. 아프다고···. 내가 진짜야. 응? 내가 진짜란 말야···."
재앙은 나를 상대하는 방법을 바꾼 것인지 어느새 누나의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일까.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기도 했다.
"···언제까지 나를 기만할 셈이야."
나는 망설이지 않았고 재앙을 찌른 창에 힘을 더 실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공격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제 저것에게 휘둘리는 건 지긋지긋했다.
이건 생존 경쟁이다.
내가 살아남고, 우리가 살아남고.
네가 죽고, 너희가 죽고.
살아남기 위한 경쟁.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없었다.
인류 수호 같은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다.
내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믿기 위한 작은 희망을 얻기 위해서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곧 살아남고 말겠다는 의지.
"내가 말했었지. 더 이상 너한테 놀아나지 않겠다고."
나는 앞서 나아간 자들의 희생을 탑으로 쌓아 밀려오는 해일로부터 살아남았다. 높게, 더 높게···.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그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수라는 건 인간이 가치를 정하기 위해서 만든 개념이었으니까.
이전에도 말했을 터다.
어디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는 가볍고, 둘은 무겁던가.
아니다. 그 어떤 죽음이든 무겁지 않는 죽음은 없었다. 그 어떤 죽음이라도 해도 가볍게 넘어갈 죽음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 사람의 죽음뿐이었다고 해도 이랬을 거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의 죽음을 전부 기억한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고 말겠다.
"···이만 끝내자."
이제 희생은 끝이야. 그리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내 몸을 휘감은 푸른 불이 재앙의 의체에 옮겨 붙는다. 나는 불이 의체의 저항력을 약화시킨 틈을 타서 꽂아 넣은 무기를 더욱 깊숙하게 쑤셔 넣었다.
"아아악!"
살이 강제로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재앙이 비명을 내질렀다. 표독스럽게 변한 눈이 내게 증오를 쏟아내고 있었다.
우우웅!
초읽기에 들어간 수정이 점화되며 곧 있을 폭발을 알리는 경고음을 내뱉었다. 나는 곧 일대를 장악할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곧장 뒤로 날렸다.
그리고 악에 받친 소리가 나를 뒤따라왔다. 추하게 발버둥치는 모습은 덤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너희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하자는 대로 했어!!"
"그 결과가 이거야!! 이걸 왜 내 탓을 해!!"
그 외침은 이내 사라졌다. 정확히는 폭음에 잡아 먹힌 것이라 하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
폭음 직전의 공백이, 폭발이 일어나고 나서도 다른 소리를 전부 잡아먹는다. 순간 고막이 나갈 정도로 너무 거대한 폭음이라 귀가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눈 앞을 새하얗게 물들 정도로 강한 폭발이 주변의 땅거죽을 모조리 뒤집어 놓는다. 원형을 가진 폭발의 형태. 그것이 점점 커지며 일대를 잡아먹고 있었다.
"현우야!"
누나가 폭발에서 겨우 빼낸 부유 수정 하나로 빠르게 장막을 펼쳐 폭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다. 그녀는 나, 지수, 예린, 한세아를 감싸 안았다.
···쩍 쩌저적
쿵! 쿵! 쿵! 쿵! 쿵!
수정의 폭발과 장막이 서로 부딪히자 장막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누가 망치로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장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부로 전해지기도 했다.
주변이 새하얗게 물든 광경이 보인다. 거대한 힘의 와류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동을 가득 채운 폭발이 사라졌다. 허나, 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우리의 예상과 달랐다. 그것도 매우.
폭발이 일어난 중심지는 확실하게 파괴가 된 모습이었다. 중심지를 기준으로 형성된 크레이터가 그걸 증명했다.
다만, 그곳을 제외한다면 다른 곳은 별달리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수정이 직접 박힌 꽃마저도. 그렇게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는데 말이다.
구덩이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돌의 수많은 파편. 방금 전의 폭발에 의해 생겨난 것이리라.
폭원지로부터 솟아오른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기도를 자극하는 매연이 조금씩 흩어지자 우리는 전방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문의 역할을 하던 검은 구체는 확실하게 사라졌다. 비록 그것을 감싸던 수십 겹의 꽃잎을 가진 꽃은 죽지 않았지만.
구체를 지탱하던 새하얀 꽃은 약간 그을리기만 했을 뿐, 생각보다 상태가 멀쩡했다. 폭발로 파인 구덩이에 자리잡고 있으니 그 상태는 우리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파직- 파지지직-
꽃 표면에 형성된 검은 장막에서 스파크가 튄다. 구체를 희생하고 만든 장막일까. 그 장막이 폭발을 막아낸 모양이다.
'······역시 저 꽃이.'
꽃이 심장 혹은 심장의 부속물이라는 추측에 근거가 더해진 순간이었다. 나는 의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그게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내가 의체에 박아 넣었던 무기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뭐야. 왜, 왜 멀쩡해."
우리 모두가 이상함을 감지한 바로 그때.
「···감히. 감히 내 의체를···!」
속삭임이 뇌리가 아닌 공동을 울리며,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뒤흔들리는 것은 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체가 손상을 입어 분노한 재앙이 발산하는 힘에 의해서.
쿠구구구구···!
단순히 종유석이 떨어지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넓은 면적을 지닌 그라운드 제로 시설을 전부 깔아뭉갤 정도로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하 시설 자체가 오염된 세계수에 의해 허무할 만큼 쉽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쩌저적-
콰콰콰콰!
벽면이 마구잡이로 갈라지며, 토사가 흘러나온다. 거센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토사가 바닥을 메우기 시작한다. 인간이 만든 흔적이 조금씩 소실되어 사라져 간다.
후두둑- 후두두두둑!
암석을 포함한 각종 잔해가 얇은 장막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간혹 큰 잔해가 떨어질 때면, 장막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출렁거렸다.
공간이 소실되어 가는 현상은 한 눈에 봐도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재앙이 발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어? 이거 어떡해! 이대로 가면···!"
장막에 갇힌 상황이 되어버린 지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못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숨통이 조여지고 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지고 있으니 지수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행히 무너져 가는 공동을 탈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잔해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장막을 해제해야 할 따름이었다.
이 깊고 어두운 지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수정의 출력을 온전히 하나에 집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분의 부유 수정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수정을 아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선택지는 한정적이었다.
누나와 시선을 교환한 나는 장막이 사라진 사이에 석벽을 형성해 막아야겠다 생각했으나, 지면은 여전히 푸른 입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재앙의 분노가 극에 달해 반발력이 심해진 까닭이다.
"괜찮아요! 콜록! 콜록! 제가···, 도울 수 있어요."
그때였다. 예린이 입을 연 것은. 아이는 정령을 다루는 것에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한 듯 안색이 매우 창백한 상태였다. 아이의 곁에 쌓여 있는 수많은 오멘이 예린의 안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뭐라 말하려던 예린은 현기증이 이는지 잠시 말을 흐렸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코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렸고, 순간 몸에 힘이 빠진 듯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예린아!"
그렇지 않아도 예린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지수와 한세아는 화들짝 놀라며 아이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