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73화 (474/497)

Chapter 473 - 473. 그라운드 제로 (9)

"괜, 찮아요···. 아직 움직일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가야 하잖아요···."

지수와 한세아 덕분에 중심을 되찾은 예린이 한 말이었다. 아이는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핏물이 길게 묻어 나온다.

이제는 한 줌도 남지 않은 푸른 가루를 꼭 쥔 채 그리 말하는 예린. 비록 한 쪽 동공이 풀려 있기는 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

"······."

나, 지수, 한세아, 메이벨은 그런 아이에게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예린의 말이 맞았으니까. 우리의 위에 있는 수천 톤은 가뿐히 넘어서는 토사에 압사당하지 않으려면 당장 탈출해야 했다.

지금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공동이 무너지고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빨리 말이다.

바로 그때.

드드드드···!

여태 느껴졌던 진동과 다른 떨림이 들려왔다. 그 떨림을 바로 인지한 우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콰르르르르-!

무너져 내리는 공동과 함께 새하얀 꽃이 조금씩 부상하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그 꽃이 위로 드러날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공동을 채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심장 박동 소리 같은 울림이 우리의 귀를 채운다. 눈에 띄게 솟아오른 꽃을 보자 내가 품고 있던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검은 구체를 지탱했던 꽃, 아니, 정확히는 그 꽃이 붙어 있던 곳이 심장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수정을 감싼 모양새의 검은 유기체가 쉴 새 없이 꿈틀거린다. 꽃이 심장이거나 심장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 단지 그 심장이 지근거리에서 터진 수정의 폭발을 견뎌낼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일부러 검은 구체가 아닌 꽃을 노리고 수정을 박아 넣은 건데, 크레이터를 형성할 정도로 강한 폭발을 견딜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찌보면 그 공격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던 제일 강한 타격이라고 할 수 있었건만.

"제가 떨어지는 잔해를 막을 테니까 언니는 저희를 위로 보내주세요."

내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에 예린의 말이 이어졌다. 코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 땅울림으로 석벽을 만들어 일행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해졌으나,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지면은 여전히 푸른 입자가 들어갈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재앙이 폭주하면서 검은 입자가 공동을 강하게 헤집고 있는 중인 탓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악문 채 그녀들을 감싸는게 고작이었다.

"알았어. 바로 시작할게."

아이의 주변으로 정령들이 모이기 시작한 모습을 본 누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막을 형성하고 있던 수정을 조작해 발판을 만들었다. 우리를 지상으로 탈출시켜 줄 유일한 방법인 반발 패널이었다.

잔해로부터 보호해주던 장막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흙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비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후두둑- 후둑- 후두두둑-

썰물이 들이닥치는 듯 밀려오는 토사가 주는 압박감. 그것에 짓눌리기 직전, 예린이 불러 모은 정령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시작했다. 성체급 정령은 아니지만, 정령들이 뭉치니 그에 비견되는 힘을 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무너지는 주변을 노려보던 나, 지수, 한세아, 메이벨이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쉰 순간이었다. 누나는 계속해서 수정을 조작해 패널의 각도를 조금씩 틀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뚫려 있으니 상승하기만 하면 된다. 의도치 않게 내가 튕겨 낸 검은 광선이 지나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되니까.

"저건 어쩌지? 이대로 두고 가야 해?"

탈출 수단이 갖춰지자 지수는 다른 곳을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검은 유기체가 달라붙어 있는 심장이었다.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심장을 공격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공격할 수단이 없어. 그럴 시간도 없고."

당장 저것을 공격해 부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한세아가 챙겨온 총기는 수정탄을 발사한 시점을 기준으로 다 부식되어 부서지거나 망가졌고, 나랑 지수도 심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장을 직접 타격하려면, 먼저 그것에 둘러진 검은 장막을 부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당장 지하가 무너지고 있건만, 장막을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괜한 욕심에 정령이 간신히 보호해주는 영역에서 벗어난다면 암석에 깔려 죽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리만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저 심장도 지금 지상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그때 공격하면 돼요. 적어도 여기는 아니에요. 일단 탈출이 우선이니까."

누나는 그리 말하며 패널을 작동시켰다. 어차피 이게 최후의 발악이라면, 위에서 저지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서서히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한 수정이 곧 있을 부상을 알렸다.

쿠구구구······!

공동을 잠식한 울림이 더욱 강해진다. 그에 따라 커다란 암석이 떨어지며 굉음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어?! 언니, 잠시만요!!"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던 지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탄성을 외치며 발판 밖으로 튀어 나간 것은. 그녀는 수정의 입자를 그러모아 전신에 스파크를 일으켰고, 그대로 쏘아졌다.

워낙 빠르기도 하고, 전조도 없이 튀어나간 터라 내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어어?! 어디가요!! 이제 올라갈 건데!"

"잠깐, 아주 잠깐이면 돼요!!"

이제 출발할 생각이었던 누나가 당황하며 그녀를 부르자, 지수는 더욱 빠르게 달리며 어딘가로 향했다. 도끼마저 두고 간 그녀는 위에서 쏟아지는 잔해를 허리를 꺾거나 몸을 던져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녀가 내딛은 발자국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토사에 잡아 먹혀 사라졌다. 지수의 모습도 같이.

콰르르르르르!

천장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지면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토사가 쏟아진다. 짙은 흙먼지가 확 일어나며 시야를 가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지수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푸확!

지수가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의체에게 박아 넣었던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칼카타의 유산 말이다.

우당탕!

핏물과 흙먼지가 뭉쳐 꼬질꼬질해진 지수가 격한 기침을 내뱉으며 발판으로 돌아왔고, 바로 외쳤다. 그렇게 외치는 그녀의 뒤로 커다란 암석 덩어리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콜록! 콜록! 올라가자! 지상으로!"

지수의 외침을 끝으로 누나는 곧장 반발 패널을 작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배경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츠츠츠츠츠츠!

빠르게 부상하면서 중력에 의한 압박감이 몸을 짓누른다. 우리가 올라가는 속도만큼 강한 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압력을 상쇄해줄 장막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생긴 현상이었다.

"으으윽···!"

우리는 너 나 할 것없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혹사시킨 몸이기도 하고, 여러 부상을 입었다가 겨우 회복한 몸이었기에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속도를 늦추자는 사람은 없었다. 검은 광선에 녹았던 흑벽이 지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단면을 볼 틈도 없이 계속해서 상승했고, 그렇게 지나온 통로가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쿠구구구-!

모래성이 부서지는 것처럼 하단에서부터 터지고 있는 통로가 우리를 바싹 뒤쫓는다.

술래 잡기를 하듯이 쫓아오는 붕괴의 손아귀가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잡히면 술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등골이 서늘했다.

"언니! 이거 더 빨리는 안돼요? 이러다가 따라잡히겠어요!"

"지금 이게 수정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속도에요! 여기서 더 올리면 발판이 부서진다고요!"

5명의 사람을 빠르게 위로 부상시키고 있는 수정은 누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무리를 시키면 바로 터질 듯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붕괴의 속도보다 지하를 탈출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를 바라며 몸을 바싹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통로의 끝에 있던 빛이 어느 순간부터 생겨났고, 그 빛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주변을 뒤덮는 빛으로 바뀌었다.

주위를 둘러싼 흑벽이 사라지자 눅눅하고 차가운 지하 바람이 아니라 상쾌한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간다.

지하에서 탈출해 지상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아."

어두컴컴한 지하가 아니라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하늘 위를 걸어다니는 구름이, 살며시 지나가는 바람이, 시야에 담기는 지상의 풍경이 우리를 반기니 순간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감상을 미처 만끽할 틈도 없이 우리는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상에 도달한 재앙의 심장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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