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74화 (475/497)

Chapter 474 - 474. 그라운드 제로 (10)

휘이이이잉-!

세찬 바람이 나, 지수, 예린, 한세아, 메이벨을 스쳐 지나간다. 나와 누나가 연구소에서 나왔을 때처럼 우리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누나는 우리가 너무 높게 날지 않도록 고도를 천천히 낮추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지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도였기에 우리는 재앙의 심장을 곧장 찾을 수 있었다. 검은 유기체가 달라붙어 있는 그 심장은 오염된 세계수의 정중앙,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뻗어지고 있는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검은 입자와 대비되는 색을 가진 새하얀 꽃과 함께.

「···다. 전부 다 죽일 거야. 더 이상의 자비는 없어」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가 한 말이었다. 의체가 어디 갔나 했더니 폭발의 순간 심장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재앙은 검은 유기체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꿈틀거리고 있는 수정 내부에 숨어 있었으니까.

우리가 입힌 피해가 완전히 없지는 않았는지 재앙은 잔뜩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흡사 악귀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살의를 자욱하게 뿌려대는 재앙. 지상으로 도망친 그것이 뿌려대는 검은 입자는 그 양이 너무나 많아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거나 변형시키고 있었다.

끼아아아아-

수많은 이상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인 검은 입자가 비명을 내지른다. 생명체에 대한 증오가 질척하게 묻어 있는 비명은 우리의 고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일대를 검은 안개로 메울 정도로 많은 양의 검은 입자를 목격한 지상의 사람들이나 변종들이 본능적으로 행동을 멈췄다. 필사적으로 싸운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는지 상태가 멀쩡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몸을 뒤덮은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는 잠깐 사이에 허물어져 오래된 유적지로 변모해 있었고, 숨통을 트이게 했던 전차들의 지원 포격은 띄엄띄엄 들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몇 번 들리지 않고 끊어졌다.

신아현과 까악이는 이제 날 힘도 없는 것인지 지상에서 군인들을 도와 변종들의 군세를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수의 넝쿨들이 괴물들을 저지하는 동안 까악이를 비롯한 군인들이 총검을 찔러 넣어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밀어냈다.

허나, 밀린다고 밀려날 변종들이 아니었기에 팽팽한 힘 겨루기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난쟁이들이 돌가시를 만들어 변종들을 하나씩 처리해주었다.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기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전보다 인원이 늘어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외부에서 급하게 지원이 온 것일까.

영락한 요새로 이어지는 길목에, 지금은 변종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길목에 여러 차량들이 있었다. 완전히 폐차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차량들은 군용이 아니었다. 그 말은 곧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왔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군인들 대부분은 이미 이곳에 있었으니, 군인이라고 보는 것보다 벙커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실제로 군복이 아닌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군인들과 자연스럽게 뒤섞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빈약하게나마 무장을 갖추고 지원 온 것이리라.

우리가 그들을 본 것처럼 지상의 사람들도 우리를 발견했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형편 좋은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재앙을 바라보았다.

심장에 달라붙은 유기체로부터 촉수 다발을 뽑아낸 재앙. 우리 눈에 보이는 광경은 얼핏 무시무시했지만, 지하에서 처음 느꼈던 재앙의 존재감보다는 덜 했다.

이제는 아는 까닭이다.

우리를 피해 지상으로 도망친 저것은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느끼는 적이 아니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적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해볼 만 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최후의 발악을 막아내 저 심장을 부수면 우리의 승리다. 그건 재앙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후웅-

메이벨이 부유 수정을 조정해 서서히 고도를 낮췄고, 마침내 세계수 한복판에 내려앉은 그때.

"아저씨, 이거 가져가. 싸우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말도 안하고 뛰쳐나갔었네. 미안."

상황을 빠르게 살피던 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자루를 건넸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주워온 칼카타의 유산은 지근거리에서 터진 수정의 폭발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잔균열이 몸체를 타고 새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무기 중 여전히 제일 강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쓸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냐, 고마워."

나는 전방을 경계하면서 지수가 내민 무기를 받았다. 내가 내부로 집어 넣었던 푸른 입자는 전부 소실된 상태. 내 손에 쥐여지자 자루는 나와 연결되어 심장 속 푸른 입자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입자를 흡수한 나뭇가지는 스스로 수복하며 균열을 메꾸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단단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꺾이지 않을 정도로.

"저는 아래로 내려가서 그나마 멀쩡한 총기 좀 챙겨올게요. 탄창이랑 탄약은 있는데 그걸 쓸 총기가 다 부서졌거든요. 예린이도 안전한 곳에 둬야 하구요."

예린은 어느새 기절한 상태였다. 아이의 곁에 머물던 정령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보이는 예린을 이곳에 둘 수는 없었기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다른 곳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재앙의 바로 앞인 이곳보다는 사정이 낫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아이는 이미 자기 몫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예린이 없었다면 싸움이 훨씬 어렵게 진행되었겠지. 탈출하는 것도 그렇고.

"부탁합니다."

"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며 말한 한세아는 예린을 품에 안은 채 하늘을 날았다. 이제 남은 건 나, 지수, 메이벨. 이렇게 셋이었다.

누나는 나와 지수를 보조하기 위해 남았다. 비록 그녀가 다룰 수 있는 수정은 하나만 남긴 했으나,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수정이 있다는 건 여벌의 목숨이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벅- 저벅-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은 채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재앙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하와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밝은 지상으로 올라오니 우리가 입은 부상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수정으로 응급 처치를 하긴 했으나, 격하게 움직이는 순간 상처가 다시 터지겠지.

그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콰쾅-!

[끼에에에에엑!]

투두두두두!

지상에서 여전히 고함이, 괴성이, 사격음이, 파열음이 들여오고 있었으니까. 지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싸워야 할 차례였다.

「나는 자연. 만물의 어머니」 수정 속 재앙이 검은 입자를 하늘로 더욱 강하게 쏘아 보내자 하늘에 뇌전을 품은 먹구름들이 형성된다.

···우르릉······ 나지막하게 울리는 천둥 소리는 곧 있을 낙뢰를 알렸다. 그리고 그 예감은 이내 현실이 되어 검은 낙뢰가 불규칙적으로 지상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꽈릉!

순간 눈 앞을 검게 물들일 정도로 강한 힘을 동반한 낙뢰는 사람과 괴물을 가리지 않고 무심코 하늘을 보게 만들었다. 지면과 세계수의 표면을 강타한 그 힘은 빠르게 퍼지며 표면을 내달렸고, 넓은 범위에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효과를 부여했다.

그와 동시에.

타탓- 타타탓!

나와 지수도 앞으로 내달렸다. 하늘에서 형성된 먹구름이 퍼붓는 낙뢰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노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거리를 좁힐 수 있을 때 최대한 좁혀 놔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맞대응하듯이 재앙이 꿈틀거리는 촉수를 휘둘렀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지는 촉수는 각 다발 하나하나가 지성을 가진 것처럼 휘어지며 우리를 노렸다.

쐐애애액!

쾅! 쾅! 쾅! 쾅!

우리가 지나간 길을 따라 뒤늦게 촉수들이 틀어 박힌다. 그렇게 표면을 부순 촉수들은 일부이고, 나머지 촉수들은 퇴로를 막는 것처럼 사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허공을 휘젓는 검은 촉수들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세계수가 죽어가는 느낌이 전해진다. 아니, 실제로 나무가 죽어가며 회색 재질로 변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힘을 뽑아내고 있는 반동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표면이 죽은 곳은 내가 땅울림이라는 이적을 적용시킬 수 있었다. 바닥을 내딛는 발을 통해 죽은 세계수의 표면에 푸른 입자들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쐐애애액!

부우웅!

위, 아래, 좌, 우 가리지 않고 쇄도하는 촉수들이 나와 지수를 덮치려는 순간.

쿠-웅!

나는 발로 강하게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러자 표면에 스며들었던 푸른 입자들이 재정렬되며 수많은 기둥을 만들어냈다. 와이어처럼 얇고 길게 뽑아진 땅울림은 생성과 동시에 회전했다.

콰가가가가각!

그리고 그 회전은 나와 지수에게 쇄도하던 촉수들을 모조리 갈아버리며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기체로 이루어진 촉수가 인정사정없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왜! 왜 안 죽는 거야! 왜!!」

허공에 터지듯 비산하고 있는 촉수들의 끔찍한 살점 사이로 지독한 증오와 살의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는 재앙이 보인다.

저것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분노와는 거리가 멀었다. 분노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자신이 그렇게 낮잡아보고, 장난감처럼 다뤘던 인간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에서 오는 공포. 그것이 재앙을 발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솟구치는 푸른 불이 허공을 부유하던 촉수를 단숨에 불태운다. 잠시뿐이지만, 앞으로 향하는 길목이 열렸다.

우리는 푸른 불에 기대 더욱 속도를 높이며 돌진했다.

타오르는 푸른 불,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

전차가 부서지는 소리,

코를 찌르는 혈향,

고막을 나가게 만드는 낙뢰 소리,

모두의 눈에 들어찬 의지,

다친 몸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기회.

'지금부터는 아무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지하로 내려가기 전, 지상에서 했던 결심에 나는 한 문장을 덧붙였다.

'설령 이 한 몸이 불타 사라진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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