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5 - 475. 그라운드 제로 (11)
탁! 타탁! 탁!
빠르게 나아가는 지수는 주변이 나뭇가지로 뒤덮인 지형이라는 점을 이용했다.
그녀는 어지간한 아름드리 나무보다 두꺼운 나뭇가지들을 발로 박차거나 엄폐물로 이용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와 일대를 뒤덮는 듯 두들기고 있는 촉수들을 피해냈다.
쾅! 쾅! 콰콰쾅!
촤르르륵!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촉수들이 한 박자 늦게 내려쳐지며 살점을 흩뿌렸다. 지수가 움직이는 속도가 워낙에 빠르기에 촉수들이 지수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사방으로 비산한 촉수의 살점은 원래 노렸던 지수 대신 세계수의 표면을 좀먹었다.
치이익!
독기가 가득 찬 살점이 표면에 녹아내리면서 불쾌한 연기가 피어 오른다.
꽈릉!
간혹 지수의 지근거리에 떨어진 낙뢰가 검은 파장을 퍼트려 그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러기 전에 내가 푸른 불을 둘러주어서 경직에 당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이곳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믿으며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콰콰콰쾅!
재앙이 발하는 파동이, 촉수가, 낙뢰가, 바람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일대를 초토화시킨다. 재앙이 유기체로 만든 포대가 입자를 집속하더니 광선을 발사하기도 했다.
지이잉!
콰-아앙!
표면을 긁듯이 쏘아지는 검은 광선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실수 한번에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상황이 매초, 매순간 들이닥치고 있었다.
허나, 우리가 움직임을 늦추는 일은 없었다. 그럴수록 되려 두려움을 억누르는 발을 크게 내딛었다.
목숨이 여러 개라거나 삶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충분히 즐겨서 삶에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살고 싶어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을 헤집는 속삭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서.
「네가 나를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재앙이 나를 노려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친다.
「겨우 마당을 차지한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면!! 그제서야 현실을 깨닫게 될까!!」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오염된 세계수의 의체는 여전히 내게 강한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이니, 하나가 되자느니 쫑알쫑알···. 말이 너무 많아."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를 몸을 굴러 피했다. 지면에 닿아 폭발한 낙뢰가 검은 파동을 퍼트렸으나, 지수가 날린 참격에 의해 파동이 갈라져 사라졌다.
숨을 가쁘게 내쉴 때마다 시야의 초점이 잡혔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다리를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상당 부분이 찢어진 듯 온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콰가가가각!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돌풍을 동반한 바람 칼날이 스쳐 지나가며 피부를 갈랐다. 순간 핏방울이 확 튀었다.
"아저씨! 저 포대 같은 건 내가 맡을게! 그러니까 아저씨는···!"
나보다 앞서 나간 지수가 내가 뒤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연다. 어떤 부상을 입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전격을 품은 그녀의 참격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좌에서 우, 일자의 형태로 그어지는 선에 걸리는 모든 것들이 잘려 나갔다.
서걱!
단면을 그대로 내보이게 된 그것들은 이내 허공을 타고 흐르는 스파크에 의해 바싹 구워지며 매캐한 연기를 토해냈다. 포구에 집속되고 있던 검은 입자가 반발 효과로 거세게 일어나며 유기체로 이루어진 포대를 완전히 끝장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정화의 불을 회전시켜 접근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던 나는, 우직한 전진 끝에 재앙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라면 낙원을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이 괴물에게 죽어가는 세상이 낙원인가?
매일매일 공포에 떨어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워해야 하는 세상이 낙원인가?
괴물들에게는 낙원일지는 몰라도, 우리 인간에게는 지옥이었다.
「너희는 결국 다 죽고 말 거야! 너희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목을 조를 거라고!」
"우리는 멈춰 있기를 택한 너와 달라!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더 나은 답을 찾아낼 거다!"
나는 그리 외치며 주먹에 푸른 불을 집중시켰다. 사방에 퍼져 있던 푸른 불이 한 곳에 집중되며 거대한 와류를 만들어냈다.
나 하나로 세상이 그렇게 바뀌리라 말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앞서 걸어나갈 뿐이다.
내가 내딛은 발자국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있게.
그래, 단지 그것뿐이다.
누가 잘못을 했는가.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가.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는가.
이것들 전부 지금 당장 물음에 대한 답을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살기 위한 경쟁. 그 발버둥이었으니까.
내가, 우리가,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다시 되찾고 말 거다.
"그러니까 그만 나불대고 덤벼, 빌어먹을 년아."
「이현우!!!」
재앙의 외침과 함께 바닥에서 가시가 솟구쳤다. 가시 하나하나에는 지면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죽이겠다는 살의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콰콰콰-
순간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발을 굴러 땅울림을 발현했다. 내 의지가 담긴 발구름은 이내 이적이 되어 가시들의 첨단을 베어냈다. 촉수들을 갈아버렸을 때처럼 동일하게 길게 뽑아진 와이어가 강하게 회전하며 생긴 현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칼카타의 유산을 쥐고 있는 손에 무게가 실렸다. 재앙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계수의 죽은 표면이 많지 않은 터라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하지 않았고, 가시를 전부 막아낼 수는 없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시야의 사각에서 솟구친 가시들은 내가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푸욱-
뾰족한 검은 가시가 살갗을 뚫고 근육을 찢으면서 파고 들어오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크, 으윽···!"
그렇지 않아도 풀리기 직전이었던 다리가 한순간 균형을 잃을 정도로 강한 고통. 그러나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풀어지려는 다리를 다잡고,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재앙을 처리해야했다. 지수가 포대의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에 말이다.
그대로 내질렀다. 정화의 불이 한껏 응집되어 있는 주먹을, 나와 공명하며 울리는 칼카타의 유산을.
터-어엉!
검은 장막과 푸른 불이 맞닿는 순간, 반발 효과로 돌풍이 일어났다. 바닥에 쌓여 있던 부러진 가시들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바닥에 깔린 검은 안개 또한 단숨에 걷히며 원래의 표면을 드러냈다.
화르르르륵!
어둠을 몰아낼 기세로 터진 폭발. 그러나 내 주먹은 검은 장막을 완전히 뚫지 못했다. 아무리 강하게 내질러 장막을 부수어도 또 다른 장막이 나타나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가로막힌 주먹 너머로 살았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의체가 보인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까.
나와 눈이 마주친 그것은 표정을 갈무리해 이전의 표정을 숨겼다. 재앙은 언뜻 희열마저 보이는 얼굴로 속삭였다.
「내가 이겼네?」
"이런 씹···!"
바닥에 검은 안개가 다시 깔리기 시작하며, 그 안개들이 가시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그때.
타타타타탕!
하늘에서 푸른 빛줄기가 쏟아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줄기가. 강화탄이 비처럼 쏟아진 것이다.
콰콰콰쾅-!
강화탄 폭격. 표면에 도달한 푸른 빛줄기는 구체 형태의 폭발을 이끌어냈고, 나와 지수를 둘러싼 위협을 단숨에 걷어냈다.
촉수 다발과 포대들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정지하며 검은 안개가 푸른 폭발에 밀려난 사이에, 일대를 초토화시킨 한세아는 후방에 있는 누나 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가 기껏 구해온 총기는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파손된 상태. 새빨갛게 달아오른 총구가 만개한 꽃처럼 변해 있었다.
한세아 본인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해 보였다. 강화탄의 반동을 고스란히 받은 어깨가 골절되었는지 바닥에 내려앉자 마자 어깨 부근에 손을 대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예린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나마 안전한 곳에 무사히 두고 온 모양이다.
'현우야, 세아씨가 말하기를 방금 전 같은 공격을 또 할 수는 없대. 탄약도 문제지만, 총기와 몸이 버티지를 못해서.'
한세아의 부상을 수정으로 회복시키고 있는 누나가 내게 목소리를 전달했다.
'내 수정도 한번 밖에 버티질 못할 거야. ···아니, 두 번. 그래, 두 번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볼게.'
누나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현우야. 앞에서 조금만 버텨줘. 우리가 힘을 모아 공격해서 빈틈을 만들어낼 때까지만.'
메이벨은 세계수의 심장에게 피해를 입힐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나와 지수가 앞에서 버티는 동안, 한세아가 가진 수정으로 탄환을 만들어 꽃을 보호하는 검은 장막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계획을.
'검은 장막이 부숴지면 다음은 네 차례야. 장막이 부숴지고 나면 현우 너는 내가 만든 반발 패널로 하늘 높이 난 다음 낙하 공격을 가하는 거지. 그럼 뚫는 힘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이게 지금 우리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
'좋아, 바로 준비 시작해. 최대한 버텨 볼 테니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추락 시에 발생하는 충격은 어떻게 상쇄할 것인지, 만약 상쇄를 못하면 그 충격을 내 몸이 그걸 버틸 수 있는지.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물어보지 않았다.
재앙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최후의 발악을 하는 중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틈이 없지 않은가.
타탓! 타타탓-!
나와 지수는 양 옆으로 갈라지며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안개 속으로 재진입했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입자들의 폭풍이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쐐애액!
깡!
휘두름과 동시에 가로막히는 소리가 울린다. 검은 안개는 곧 재앙의 의지. 우리의 움직임을 그대로 읽어내는 그것들이 도끼날이 장막에 닿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가하는 공격은 꽃에 직접 타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재앙을 정신없게 만들어 시선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나와 지수는 재앙을 상대하며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전하게 재앙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도 쇄도하는 재앙의 촉수와 광선 다발이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능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숨을 헐떡이던 지수가 검은 광선에 빗겨 맞아 바닥을 엉망으로 구르고 말았다. 움직임을 잠시라도 멈추면 표적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 재앙은 지수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퍼억-!
위로 쳐 올리는 촉수에 의해 허공에 붕 뜨게 된 지수를,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를 노리고 유기체 포대에서 검은 광선이 재차 쏘아졌다. 일직선으로 쏘아진 광선은 지수를 제대로 직격하며 밀어냈다.
"지수야!!"
"아저씨, 미안···!"
도끼로 광선을 어떻게든 쳐내 죽음에 이르는 건 모면했으나, 관성을 이기지 못한 지수. 그녀는 밀려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낚아채 줄 한세아는 곧 가할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탓에 더 이상 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나도 정신없이 재앙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던 터라 지수에게 손을 뻗어주지 못했다.
디딤판이 되어줄 나뭇가지나 촉수들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수는 속절없이 세계수 바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내 완전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푸른 입자가 전부 소모된 것은 아니니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그 걱정을 이어나갈 틈은 없었다. 둘이서 겨우 막아내고 있던 공격이 주는 압박감이 사람이 줄어들자 더욱 강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열등하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해!! 그게 생태계의 기초 원리야! 그 간단한 걸 왜 몰라!!」
'···아니, 너는 틀렸어.'
「이제는 너희 인간들이 도태될 차례가 온 것뿐이야!」
나는 그동안 푸른 입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검은 입자가 오염된 세계수의 의해 발생하는 거라면, 푸른 입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푸른 입자를 만들어내는 건 진짜 세계수, 오염되지 않은 세계수의 파편이다, 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이 아니었다.
푸른 입자의 등장은 나와 메이벨이 품고 있는 조각에 한정된 것이 아닌,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 푸른 입자는 의지다.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도와주는 하나의 의지. 생의 의지 말이다.
그래, 우리는 의지다. 결코 꺾이지 않는, 아니, 꺾이더라도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인간의 의지이며, 불씨다.
한때 만물의 영장, 오만한 짐승이었던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야 한다. 재앙이 만드는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재앙의 손짓 하나에 모든 게 좌지우지되는 세상이 아니라.
열등하면 도태되는 것이 생태계의 원리라면, 적어도 도태되지 않게 발버둥을 칠 시간은, 기회는 주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나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까.
「대체 너희는 뭐길래······!」
"우리는 불씨다!! 언젠가- 아니, 이제 거대한 불길이 되어 너를 불태워버릴 불씨!!"
나는 그리 외치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촉수 다발을 쳐냈다.
바로 그때.
타-아아아앙!
후방에서 수정탄이, 인간의 의지가 빛무리를 이끌며 쏘아졌다. 한세아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수정탄이 누나의 부유 수정을 발사대 삼아 발사된 것이다. 매우 강한 반동에 뒤로 나가 떨어지면서까지.
살아남아 미래를 보겠다는 염원이 담긴 수정 조각이 하나의 탄환이 되어 나아간다. 수정탄은 앞을 가로막는 장막을 모조리 깨부수며 전진했고, 재앙의 어깨를 그대로 관통했다.
꽃과 재앙의 의체를 관통한 탄환은 표면에 박히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장막을 지속적으로 펼치느라 여력이 없어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기술. 가속과 반발 패널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며 수정탄의 각도를 수정해 진로를 바꿨기 때문이다.
팅! 티티티팅!
허공에 형성된 패널이 수정탄을 반사시키며 각도를 뒤틀었다. 그 결과, 푸른 빛은 하늘 높게 치솟게 되었고, 반투명한 가속 패널을 지나가면서 더욱 빠르게 가속된 탄환은 탑어택으로 재앙에게 내리 꽂혔다.
콰-아앙!
꽃을 보호하고 있던 장막이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산산조각 난다. 진입 각도가 재조정되어 쏘아진 탄환은 의체의 몸체 깊숙이 박혔다. 검은 장막이 허물어지는 건 거의 동시였다.
「아아아악!」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에 재앙은 뒤늦게 고통이 찾아왔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현우야, 준비 됐어?'
'언제든지.'
누나의 목소리에 답하는 것과 동시에 부유 수정이 내게 붙었고, 이내 내 아래에 형성된 패널이 나를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휘이이이잉!
대기를 억지로 가르는 느낌과 함께 압박감이 몸을 짓누른다. 억지로 힘을 주어 버티자 부상이 벌어지며 핏물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것도 잠시, 나는 어느새 하늘 높이 떠 있었다. 내가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게 도와준 수정은 이미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사라진 상태. 수정이 부서졌으니 내가 딛고 있는 발판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마치 지금까지 떠 있었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마냥 곧장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기회. 지금 쓴다.'
한 줄기 불길이 되어서.
화르르르륵!
세찬 바람이 몸을 뒤흔든다. 차가운 바람을 정면으로 가르니 어지러움이 머리를 잠식한다. 허나, 내 심장에서부터 일어난 불길은 점점 더 기세를 부풀리며 크기를 키웠다.
주홍빛 태양과 푸른빛 태양. 어느새 하늘에는 태양 2개가 떠 있었다. 마지막이니만큼 극한까지 쏟아부은 푸른 입자가 집속된 결과였다.
푸화아악!
그러고도 여력이 남은 푸른 입자는 추진체로 이용되며 나를 더 빠르게 낙하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문득, 지하에서 재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상을 입어 쓰러진 우리에게 멋진 기사님이라도 기다리냐고 했던가.
그래, 뭐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중갑을 입은 기사가 나타나 저것을 재앙으로 베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약한 우리와는 다르게 멋들어진 검술로 말이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처럼.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그 사실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말대로 과거를 잊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인간이 나올 수도 있겠지.
네 말대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
네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되풀이되어 세상이 다시 지옥이 될 수도 있겠지!
네 말대로 그럴지도 몰라.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가 맞으니까.
하지만 그건,
"······오늘은 아니야."
앞으로도 아닐 거고. 우리는 결국 더 나은 답을 찾아내고 말 테니까.
내 대답이 들린 것인지 재앙이 푸른 불을 두른 나를 노려본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그 모습에 나는 숨을 더욱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외쳤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외침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너를, 막는다━━!"
인간이 다뤘다고 하기에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푸른 불길이 세계수의 꽃에 직격했고, 그와 동시에 세계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청화. 인간이 하늘을 향해서 피워낸, 앞서 희생한 자들을 달래기 위한 푸른 꽃이 만개한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늘에 녹아드는 푸른 꽃이.
푸르게, 아주 푸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