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76화 (477/497)

Chapter 476 - 476. 그라운드 제로 (12)

화르르륵!

세계수가 불탄다. 푸른 불을 품은 파동이 퍼지면서 거대한 나무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가 오염된 세계수를 완전히 뒤덮었다.

쿠구구궁······

중력을 이겨 내지 못한 세계수의 껍질이나 나뭇가지들이 지상으로 떨어져 푸른 불이 뒤섞인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불이 번진다. 한낱 불씨에 불과했던 것이 불길이 되어서.

[끼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엑!]

지상의 변종들은 불길이 옮겨 붙자 괴성을 내질렀다. 아니, 그것은 단말마였다.

단순히 불이 붙은 탓은 아니었다. 내가 세계수에게 낙하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충돌이 재앙의 꽃을 불사른 탓이었다. 꽃과 이어진 변종들이 명령계의 중추가 되는 꽃이 불타자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었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푸른 불길이 나와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검은 유기체로 감싸져 있던 수정은 내가 내지른 창에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 파편들은 서서히 기화되어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푸른 불길이 넘실거리며 아직 정화하지 못한 구역을 마저 태운다.

삐이이이-

지속되는 이명이 머리를 괴롭힌다.

후두둑-

핏방울이 몸을 관통한 가시를 타고 뚝뚝 떨어진다. 충돌 직전, 재앙이 내게 박아넣은 것들이었다.

"끄, 윽···."

그런 상황에서 나는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들이켜 몸에 숨을 불어넣었다. 한계까지 쪼그라들었던 폐가 강제로 펴지면서 뚝뚝 끊어지는 고통이 전해졌다. 너무 강한 고통에 의식이 수없이 점멸되는 느낌이었다.

"쿨럭!"

내 아래에 깔린 재앙이 피를 토했다. 담고 있는 악의만큼이나 검고 끈적한 피였다. 그리고 그것의 가슴팍에는 내가 내지른 무기가 박혀 있었다.

인간의 의지가, 염원이 담긴 창이 오염된 세계수, 재앙의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우리가 이겼어."

재앙과 마찬가지로 입에서 피를 쏟아낸 나도 상태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승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하, 이현우. 너만 없었어도······!"

내가 중얼거린 말에 발작하며 소리치는 재앙. 그 외침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대신 울컥 터져 나오는 모양새로 검은 피와 검은 입자를 토했을 뿐이었다.

"···아니, 내가 없었더라도 누군가가 대신 막았을 거야."

재앙이 여기서 나를 막아 냈더라도, 결국엔 내 발자취를 따라온 누군가가 재앙을 막아 냈을 거다.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그런 거니까. 처음부터 질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인간은 고작 나무 따위에게 지지 않아."

너는 그냥 큰 나무일 뿐이라는 내 말에 재앙은 나를 비웃었다.

"그런 허울 좋은 소리를 언제까지 지껄일 수 있을까."

꽃도 불타 사라지고, 내게 깔렸으면서 아직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것인지 손을 들어 올리는 재앙. 비록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무슨 수작을 부리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긋난 초점, 흐린 시야, 산소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는 폐, 힘이 충돌한 여파에 갈기갈기 찢긴 살갗과 근육.

한계를 넘어 혹사시킨 심장 속 조각이 과부하로 인해 탈진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가장 엉망인 건 내 손이었다. 무기를 끝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켜잡은 내 손은 충격에 의해 살점이 뭉텅이로 날아가 버렸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입을 열 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세아씨!! 바닥에 강화탄 발사!! 제가 부순 수정은 진짜 심장이 아닙니다! 진짜는 그 아래에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철컥-

녹슨 장전음이 들려왔을 따름이었다. 그 소리는 이내 커다란 발사음이 되었다.

타-아앙!

고작 재앙의 속임수에 넘어가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움직이지 못 하는 나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 강화탄은 세계수의 표면을 뚫고 무언가에 닿았다.

그동안 우리가 가했던 공격에 비하면 약하다고 할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효과는 탁월했다.

강화탄이 표면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부순 것과 동시에 지상의 변종들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의체가 숨기고 있던 심장이 기능을 정지한 모양이다.

정확히는 오염된 세계수의 씨앗 파편이었다. 보조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던 커다란 수정이 아니라.

사람들은 처음에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것도 잠시 기세를 완전히 빼앗아 괴물들을 공격했다. 하나, 둘씩 쓰러지는 변종들 사이로 잔뜩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움직임은 비록 피로와 부상에 의해 미약했을지언정 부릅뜬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 혼자는 안 죽어."

그 광경을 본 재앙은 더 이상 흉흉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거나 증오로 점철된 속삭임을 내뱉지 않았다. 되려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게 중얼거리면서 나를 붙들었다.

"수많은 것들을 버려가면서 버텨 왔는데, 오직 하나를 얻기 위해서 버텨 왔는데, 여기서 나 혼자 죽는 건 너무 아쉽잖아. 그러니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하나가 되자. 현우야."

"······!"

진작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몸 상태인 의체가 끔찍한 집착과 광기를 드러내며 나를 옭아맸다.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했으나, 어디서 힘이 나오는 것인지 나를 붙든 재앙의 손길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가 품은 씨앗 파편이 서로 공명하며 나와 재앙 사이에 검은 구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게 불완전한 문의 형태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더욱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이미 공명을 시작한 씨앗 파편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 몸의 제어권이 제 3자에게 넘어간 느낌이었다.

"···씨앗이 한 자리에 모였어. 이제 씨앗은 온전한 하나가 되어 세계를 잇는 문이 될 거야."

재앙이 마지막까지 재앙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때.

···퍼억!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밀쳤다. 나는 속절없이 밀려나 바닥을 엉망진창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알겠어. 네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바닥을 구르는 탓에 시야가 잔뜩 흔들린다. 나를 밀쳐낸 누나의 모습이 끊기듯 보이고, 내 귓가로 누나의 말이 들려왔다.

"메이벨···! 마지막까지 나를 방해해···!"

"그러게 나를 함부로 잡아먹지 말았어야지. 은방울꽃에는 독이 있거든."

한참을 구르던 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누나가 가진 씨앗 파편과 공명을 시작한 검은 구체가 점점 커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거리가 멀어져 구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누나와 재앙은 아직 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누나! 빨리-"

도망치라는 말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검은 구체가 크게 확장된다. 메이벨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지. 너는 오래오래 살 거라고. 오랜만에 봐서, 이렇게 눈으로 직접 봐서, 정말 좋았어. 현우야, 너는 더 이상 책임질 필요 없어. 마지막은 내 몫이야.'

누나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전달되는 것과 동시에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폭사 되었다.

━━━━!

구체가 누나를 집어삼켰다. 빌어먹을 재앙과 함께.

내가 뻗은 손 너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깔아뭉개고 있던 재앙의 의체도, 기화되고 있던 수정 파편들도, 검은 구체도. 그리고 누나마저도.

남은 건 오직 구체가 주변을 집어삼킨 흔적인 크레이터뿐이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머리가 인식하지 못했다. 재앙이 나를 문 너머로 데려가려고 했고, 누나가 나를 밀쳐 재앙의 수작이 뒤틀렸다는 것까지는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 상황 속에서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나가 나 대신 희생했다는 것. 이것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바닥을 기었다. 거친 표면을 긁으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손톱이 벗겨져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바닥을 기던 나는 어떻게든 일어나 달렸다. 누나가 사라진 곳을 향해서.

씨앗 파편의 힘을 다 끌어다 쓴 검은 구체는 크기가 확연히 줄어들어 손바닥보다 작아져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닫힌 건 아니니 아직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

그리 믿은 나는 망설없이 구체에 손을 뻗었다. 문이 닫히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내 손이 구체와 접촉하는 것과 동시에.

파지지지지직!

강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검은 스파크가 일어나며 구체를 잡은 팔의 피부를 검게 태웠다. 작열통, 생살이 지져지는 끔찍한 고통이 곧장 머리로 전해졌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근육이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꿈틀거렸고, 그럴 때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치를 넘은 몸이 쉴 새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내가 구체를 잡은 손에 힘을 푸는 일은 없었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다시는 누나를 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 으으윽···!"

"아저씨!!"

내가 닫히려는 구체와 한참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전투에서 이탈 당했던 지수와 예린이 합류했다. 강화탄으로 심장을 마무리했던 한세아를 부축하고 있던 그녀들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이내 상황 파악을 마친 듯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내게 달려왔다. 그 순간 내게 보인 건 예린이가 들고 있는 수정 파편들이었다. 싸움에 도움이 될까 유실되었던 수정들을 수거해온 모양이다. 내게 있어선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수정!! 가지고 있는 수정 전부 이리 줘! 빨리!"

"네, 네!!"

나는 예린이 건넨 수정 파편을 한 손에 뭉쳐 깨부쉈다. 내부의 푸른 입자들이 터져 나오자 금방이라도 닫힐 것처럼 굴던 문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모자란 에너지가 조금이나마 충족된 듯했다.

그래도 내가 들어가서 누나를 데리고 나오기에는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

내가 쓸 수 있는 기회는 전부 쓰고 없다. 누나의 말대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횟수가 3번이라면 말이다.

아직 내 심장 속 파편은 제 기능을 하는 상태. 이것이 뜻하는 바는 결국 처음부터 누나는 내게 거짓을 말했다는 것이다.

남은 기회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내가 품은 씨앗의 마지막 조각. 그걸로 문을 연다.

이미 심장과 하나로 융합된 그 조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 남은 기회는 공백이 아니었다.

···파삭

그리 마음먹자, 내부에서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말라붙어 있던 씨앗 파편이 산산조각나 부서지는 소리였다.

끼긱- 끼기기긱··· 끼아아아아아-

강제이긴 해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고, 공간 너머에 있는 검은 입자들이 다시금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망설임 없이 나를 노렸다.

"아저씨는 문에만 집중해!"

"나머지는 저희가 맡을게요!"

지수, 한세아, 예린이 검은 입자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막았다.

쾅! 쾅!

콰콰쾅!

더 이상 안 들을 줄 알았던 굉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내 몸이 휘청거렸다. 여전히 내 시선은 문 너머를 향한 채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문 너머가 보인다. 빛이라고 한 점도 없는 공간. 저기에 누나가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누나는 생각보다 눈물이 많았다. 내 앞에서는 최대한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를 쓰지만, 나는 그녀가 구석에 숨어서 종종 울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 사람이 오직 혼자서, 아무도 없는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모든 것이 파괴된 곳에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걸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누나는 초인이 아니다. 내 앞에서는 초인처럼 굴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도달했는데.

이게 누나가 내게 말한 답이야?

혼자 짊어지고 죽는 게?

나는 인정 못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해야만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런 결말은 인정 못 한다고.

나는 어설프게 열린 엔딩보다, 해피와 새드 사이의 어중간한 엔딩보다 확실하게 행복한 결말이 좋다.

그러니 사라지지 마.

나와 당신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의 종착지 또한 여기가 끝이 아니다. 앞으로도 살아서, 언제나처럼 내 곁에 있어 줘야 했다.

그것이 내 욕심이자 결심이었다.

당신을 대신해 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고, 사람들의 희생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 없었다.

나는 오롯이 내 의지로 이곳에 왔다.

책임감에 잡아먹힌 것이 아니라, 당신을 구하기 위해.

당신은 언제나 나의 이정표였다. 항상 내가 나아갈 길을 비춰주었던 당신. 이제는 내가 당신의 이정표가 될 차례다.

이제는 내가, 당신보다 앞서 나가 길을 알려주겠다. 당신이 넘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이제는 내가, 당신의 길을 밝혀주는 불이 되겠다. 당신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그 하나의 염원을 담아 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과거 인간이 불을 피워내며 바랐던 것처럼,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기를 바라면서.

어둠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눈 부시도록 하얀 불이 어둠 사이에서 빛을 낸다. 비록 힘이 모자라 푸른 불이 되지 못한 불이었으나, 어둠을 밝히기에는 충분한 불이었다.

하얀 불은 그 어느 때보다 나와 공명하고 있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 현우야, 나는 네가 커서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람이야.

과거에 누나가 내게 바라고, 내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미안,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못 돼. 그릇이 작거든. 누나가 바란 등대는 되지 못하겠지만, 등불 정도는 되어 줄 수 있어.'

나는 곁을 지켜 주는 당신의 작은 등불이라도 되고 싶었다. 제멋대로에, 바보같이 구석에 숨어서 우는 당신을 달래줄 수 있는 작은 등불이라도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를 뒤덮는 것이 아닌, 문 너머로 향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닌, 빛에 의해 멀리, 점점 더 멀리 퍼지는 그림자였다.

그러니까 내 손 잡아.

메이벨.

마지막까지-

아니.

마지막만큼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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