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7 - 477. 메이벨 (8)
"으윽···."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불현듯 부상한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황무지로 이루어진 세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멀리까지 돌아보지 않아도 당장 하늘에 떠 있는 발광원이 여러 개 였으니까. 태양인지 달인지 모를 발광원들이 어스름하게 빛나며 지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와 함께 이곳에 떨어졌을 재앙은 다른 좌표로 떨어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살아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나 혼자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락···
손에 잡히는 건 오직 마른 모래뿐. 그나마 잡혔던 모래 한 줌마저 떨리는 손 밑으로 흘러내려 사라졌다.
털썩-
주저앉기까지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계였기 때문이다.
문의 영향력에 붙잡힌 현우를 구하기 위해 망가진 몸을 강제로 움직이면서 얻은 부상, 아무리 쥐어짜도 더 이상 입자 한 톨조차 나오지 않게 된 심장 속 씨앗 파편.
내가 할 수 있는 건 간신히 숨을 내쉬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뿐이었다.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메마른 바람이 상처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품은 모래 알갱이가 상처를 자극하니 옅은 고통이 느껴졌다.
입안은 이미 바싹 말라붙어 옅은 신음 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
나는 다 헤진 가운을 최대한 여며 어느 바위의 틈에 숨었다. 그렇게 두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자니 주마등처럼 예전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현우와 처음 만난 날의 기억부터 떠올랐다.
···처음에는 의무감이었다.
언제나 집에 늦게 들어오시는 아빠가 어느 날 집에 데리고 온 남자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었다. 오늘부터 같이 살게 되었다고 말한 아빠는 다시 일하러 나갔으니, 그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일단 아빠가 시키는 대로 그 아이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색함에 말을 걸어 보아도 겁이 많은 건지, 소심한 건지 아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는 나중에 차차 물어보면 되겠지.
어느새 밤이 되어 잘 시간이 되었고, 나는 간단하게 씻긴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방에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내게 복잡한 기분을 주었다. 의무감으로 시작되었던 그 느낌이 오래지 않아서 착각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금방이었다.
누군가를 내 공간 안에 들인다는 것. 그건 무감각한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낯선 느낌이었고, 동시에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차가웠던 공간이 다른 사람의 온기로 채워진다는 건 정말로, 생소한 경험이었다.
항상 혼자 지새우던 밤에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느낌은 어색하긴 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장가를 흥얼거리자 아이는 내 손을 꽉 잡았다. 10살 때의 기억이었다.
아이가 나랑 1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때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같은 학교로 전학 온 아이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소문이 퍼진 건지,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는 기가 죽어 소심해졌다.
결국 그런 행동은 괴롭힘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고, 약했던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어느 날은 구석에 몰려서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길래 아이를 놀린 애들을 혼쭐내주었다. 퍽퍽, 애들 싸움은 기선 제압이 중요한 터라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쌍 코피가 터진 나쁜 애들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집에 가자 외쳤다. 기 죽지 말고, 다음부터는 그냥 주먹을 날리라는 말에 아이는 나를 얌전히 따라왔다.
왜 바보같이 당하고 있었담? 그냥 소리만 질러도 도망가겠구만. 항상 내가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여전히 기가 죽어 있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아이의 손을 끝까지 붙잡은 채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언제나 혼자 들어가고 혼자 지냈던 집이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14살의 기억이었다.
어느 날, 현우가 뜬금없이 사탕을 줬다. 흔하게 맛 볼 수 있는 오렌지 맛 사탕이었다. 나는 바로 입에 넣어서 우물거렸다. 사탕이 생각보다 달아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을 때, 은근슬쩍 다가온 현우가 이제 자신이 더 크다며, 이제 자신이 지켜 줄 수 있다고 한 말에 순간 부끄러움이 확 올라왔다.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괜스레 얼굴을 구기면서 옆구리를 꼬집었다. ···너무 아프게 꼬집은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황했던 것 같다. 17살의 기억이었다.
어느새 키가 확 커진 현우가 내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와 같은 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난리를 좀 피웠더니 현우가 실실 웃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그동안 내가 옆에 착 달라붙어서 공부를 시킨 보람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같이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 마음이 간지러웠다. 20살의 기억이었다.
흔히 까까머리라고 하는 머리가 된 현우가 손을 흔든다. 어느 훈련소 앞이었다. 항상 같이 붙어 있다가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리불안 증세이기라도 한 것일까.
현우는 얼른 가보라며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쉽사리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저 녀석이 군대 생활을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힘든 건 매한 가지일 텐데.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걱정되어 고개를 돌리니 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나쁜 놈. 포옹이라도 해주고 가지. 26살의 기억이었다.
시간이 흘러나는 아버지가 일하는 연구소에 채용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히 요 근래 들어 아버지가 왜 이렇게 바쁘게 일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외계인이라니? 아니, 그보다 차원 문이라니? 마법이라니? B급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에 나는 한동안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시간이 더 흘러 현우가 연구소로 들어왔다. 연구원으로 채용된 건 아니고, 프로젝트 참가자로서 들어왔다고 한다. 불완전한 기술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는 나는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현우는 되려 나를 안심시켰다.
오랜만에 받는 포옹에 나도 모르게 허락한 것이 실책이었다. 이미 허락한 이상 어쩔 수 없으나, 적어도 현우 담당자는 내가 맡고 말 거다. 엘트라 팀장님 밑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현우를 넘보는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내 옆에 둬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 프로젝트들이 위험성 제기로 인해 하나, 둘씩 폐기되고 있을 때. 세계수의 씨앗이 폭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너무,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서 일어났으니 말이다.
현우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에게 파편을 이식했다. 나도 파편을 이식했으니, 혹시나 떨어지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 수 있겠지. 그런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 된 상태. 내게 이식된 씨앗 파편은 문을 넘어오면서 망가졌기 때문이다. 현우가 품은 씨앗 파편도 3번의 기회를 전부 쓴 탓에 더 이상 제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을 거다. 그러니 지금과는 더욱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과 최근 기억들의 회상이 끝나자 눈에 들어온 건 황무지였다. 내게 남은 건 앞으로 있을 아름다운 미래도, 항상 꽉 잡아주었던 손도 아니었다.
···그저 텅 비어 버린 세상이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내 말로다. 그리고 이래야 하는 게 맞았다. 수많은 사람을 위한 답시고, 그들이 내민 손을 붙잡아주지 않은 죄다.
모든 일이 잘 끝났잖아.
현우도 구하고, 사람들도 구했잖아.
단지 내 여정의 끝이 여기인 것뿐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있다고 각오도 했었잖아.
그래, 내 여정의 종착지는 여기다. 여기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
······.
······.
하지만.
"······있잖아, 현우야."
그럼에도 나는,
"···살, 고 싶어······."
살고 싶었다.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나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큰 소리로 울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건만,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였다. 그래도 흐느끼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살고 싶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다.
기껏 다시 만난 내 동생을, 현우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란히 걷고, 시답잖은 이야기에 웃어 보기도 하고, 여름이 되면 바닷가에 가서 물도 끼얹어 보고 싶었다.
가을이 되어 나뭇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면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서 어느 나무 밑에 같이 앉아 있고 싶었다. 단순히 앉아 있기만 해도 시간이 잘 가겠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면 잠도 솔솔 올 거야. 바람이 차도 현우가 곁에 있을 테니 춥지도 않을 거고.
그렇게 하루하루 추억을 쌓아 가다가 겨울이 오면, 눈을 모아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눈사람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눈 내리는 풍경을 따뜻한 안쪽에서 구경하기도 하고. 서로 온기를 나누다가 꾸벅꾸벅 조는 너를 보는 맛도 있을 거야.
추운 겨울이 지나 생명이 탄생하는 봄이 오면, 너에게 문득 물어보고 싶어.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그럼 너는 슬그머니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말하겠지. 꽃은 잘 모른다고. 내가 원하는 답이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야.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줘서 입을 삐죽 내민 나를 달래줬으면 좋겠어.
어두운 밤을 같이 보내고, 아침에 같이 눈을 뜨는 일상이 내 미래였으면 좋겠어.
아침에 눈을 뜬 너를 보고, 내가 입을 맞춰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어.
애써 꼭꼭 억눌러놓았던 바람들이 한번 비집고 나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 는···."
재미없는 영화를 같이 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나서야 불평을 하고.
너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끌벅적한 거리를 걷고 싶어.
가끔은 놀이공원에 가서 같이 신나게 뛰어다니고 싶어.
가끔은 너와 함께 산에 올라가서 답답함을 풀 수 있는 외침을 내지르고 싶어.
언젠가는 너를 닮은 아이와 함께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놀이를 보면서, 그땐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힘들었던 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원해.
"이대로 사라지는 건 싫어···."
하고 싶은 것도,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도 너무나 많은데. 사실 나 많이 무서웠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대로 나 혼자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그럼 바람을 아무리 속으로 되뇌어도,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내 몸을 건드는 바람이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이 세계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건지, 금방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바로 그때.
···저벅
모래 밟히는 소리와 함께 듣고 싶었지만, 들려서는 안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찾았네. 왜 여기서 바보같이 울고 있어. 가자,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