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8 - 478. End
"······현우야?"
내 말에 누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나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역시 내 생각대로 어디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었다. 아직도 눈가에 물기가 자욱한 걸 보니 내내 울었던 모양이다. 아주 새빨갰다.
"대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너 몸이···!"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내 걱정부터 하는 누나. 그녀의 시선은 새까맣게 타다 못해 거의 숯이 된 내 팔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런 누나의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재앙은 다른 곳에 멀리 떨어진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일까.
문을 넘어온 나도 누나 바로 옆에 떨어진 것이 아니니 아주 멀리 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소멸했을 수도 있고. 내가 누나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 희미한 연결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게 중요해? 가자. 가서 이야기하자."
"나, 나는···."
누나는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망설이는 몸짓을 보였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메이벨은 내게 따박따박 말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현우 너! 여기는 왜 왔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널 어떻게! ···어떻게 구했는데···. 몸도 다쳐가면서 왜 왔냐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 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제멋대로 군 사람이 대체 누군데.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몸을 다시 웅크렸다. 안 그래도 가녀린 몸이 웅크리고 있으니 더욱 가냘프게 보였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게 맞아. 그래야만 해."
"맞기는 뭐가 맞아. 괜한 소리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 누나 안 오면 안 가."
언제 문이 닫힐지 모르기에 나는 일단 메이벨의 손을 잡았다.
"아흑···!"
그러나 누나는 일어나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했다.
"뭐야, 왜 그래. 괜찮아?"
"아파···."
나는 황급히 누나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 강하게 잡지도 않고 살짝 잡기만 했을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누나의 옷 위에 쌓인 흙먼지였다. 결코 단시간에 쌓였다고 할 수 없는 양이 누나의 옷에 묻어 있었다.
몸에 새겨진 상처들 중 일부는 이미 상당히 곪아 있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분명 누나가 사라지자마자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왔건만, 시간 축의 흐름이 다른 것일까. 누나는 생각보다 이곳에 꽤나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생각이 머리에 닿는 것과 동시에 나는 여기서 더욱 빨리 나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만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면 여기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일은 없지 않은가.
나는 누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그러자 누나가 발버둥쳤다.
"이, 이거 놔아!"
나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메이벨에게 어린 아이처럼 굴지 말라는 말 대신 나를 밀어내는 그녀를 그대로 안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서야 전했다.
"고마워."
"······!"
누나는 발버둥을 멈췄다. 숨 쉬는 것조차 그만둔 채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 노력해줘서. 내가 살아있는 건, 사람들이 살아남은 건 전부 누나 덕분이야. 진작에 말해 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
나는 여기에 왜 왔냐는 누나의 외침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내 접근조차 모를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흐느끼면서 내 이름을 되뇌고 있었으니까.
나를 본 누나의 눈망울에 새겨진 건 짜증이나 화가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안도감과 슬픔이었었다.
"······아니야."
"그동안 마음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고생 많이 했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문 누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이 되지 못한 표현은 이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빨갛게 부은 눈가가 더욱 부었다.
누나가 입을 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나, 사실 많이 무서웠어.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간신히 몇 마디 내뱉은 메이벨은 이내 숨 넘어갈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아직도 울 힘이 남아있는지 참 크게도 울었다.
"내 친구도, 가족도 죽고, 나 혼자만 남아서 자리를 지키는 게 힘들었어! 천장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서 무서웠어···! 잔해에 깔려서 입은 상처가 너무 아팠어···. 너무 어두워서 혼자만 있는게 너무 싫었어···."
"응, 이제 괜찮아."
"너무 무서워서 사실 도망치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러면 너를 다시 보지 못하니까 그게 또 무서워서, 결국 아무데도 가지 못했어···."
어린 시절 내 영웅이었던 메이벨. 그녀에게 의존하기만 했던 내 유년기는 끝났다. 이제는 내가 누나의 영웅이 될 차례였다. 여기저기 다치고, 볼품없는 나이지만, 내 가족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지금 누나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위로의 말이나 설득이 아니다. 약간의 힘이라도, 자그마한 확신이라도 줄 수 있는 몇 마디의 말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말은 나만이 건넬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다시는 혼자 두지 않을게. 누나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 돌아가자, 집으로."
"정말···?"
"응, 함께 걸어가자. 누구 하나가 앞서 걸어가는 것이 아닌, 옆에서 나란히. 그렇게 걸어가자."
단호하게 답한 나는 누나를 들어올렸다. 메이벨은 온기를 찾는 아이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옷깃을 꽉 붙잡는 건 덤이었다.
"나 무거운데."
코를 훌쩍이는 와중에도 자기 무게가 신경 쓰이는지 엉뚱한 말을 내뱉는 누나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치고 들어오는 건 어찌 보면 누나답다고 할 수 있었다.
"무겁기는 무슨."
코웃음을 치며 누나를 번쩍 든 나는 내가 내뱉은 말과 달리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털썩 앉고 말았다. 이것 참, 멋있는 척 좀 해보려고 했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 무겁다고 했잖아. 자, 일어나. 서로 부축해주면서 가자."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울어댄 주제에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누나가 풋하고 웃었다.
우리는 서로 부축하면서 걸어갔다. 황지로 변한 벌판을 나란히 걸었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이 모래 바람에 지워진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려고···? 문도 없는데···."
"있어. 문."
"있다고?"
"가보면 알아."
누나는 내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누나의 시야에 나무 한 그루가 들어온 순간부터 말이다.
내가 대지에 심은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그게 문을 유지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닫혔으면 어쩌나 싶었건만, 다행히 아직 열려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세계수?"
"정확히는 그 묘목이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칼카타의 유산도 같이 떨어졌는데 그게 문을 유지시켜주더라. 그러다가 스스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렸고."
풀 한 포기 없던 황무지 배경에 어느새 옅은 녹음이 생겨난 것이 보인다. 내 심장 속 씨앗 파편을 흡수한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묘목으로 성장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이래서야 나뭇가지를 회수할 수도 없게 되었다. 저걸 들고 갈 힘도, 그럴 이유도 없어졌으니까.
칼카타의 유산인만큼 최미소에게 가져다 주고 싶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나. 잘 자라고 있는 묘목을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 문만 통과하면 우리 집이야."
우리는 검은 구체가 아닌 푸른 구체를 향해 다시 걸었다. 묘목으로 자란 세계수의 가지가 우리의 귀환을 환영하듯이 새순을 흔들었다. 내가 누나를 찾으러 간지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묘목은 매우 빠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세상도 메마른 황무지가 아니라 언젠간 봄이 찾아오겠지.
봄이 오면, 생명들이 모일 거고 다시 한번 힘을 합쳐 살아가겠지.
푸른 구체 앞에 다다랐을 때.
"있잖아, 현우야. 돌아가게 되면 나 좀 오래 잠을 잘 지도 몰라."
불쑥 튀어나온 누나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
"···죽는다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진짜 말 그대로 잠을 자는 것뿐이야. 조금 오래? 수정에서 깨어난 후에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신체가 불균형해졌거든. 그것만 해소하면 다시 일어날 거야."
누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나를 안심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를 어딘가에 감금시켰을지도 몰랐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문제가 생기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안에 가둬두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지만, 그만큼 누나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나도 그래. 최대한 빨리 일어나보려고 할게."
"알았어. 기다릴게. 이번에는 내가, 누나를."
누나가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누나를 기다릴 차례였다. 메이벨은 여전히 문 너머에 있는 지구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 이끌려 따라오긴 했어도 아직은 납득하지 못한 거겠지.
정말로 자신이 이 황무지가 아니라, 문을 넘어가서 계속 살아가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이리라. 그건 나중에 내가 해결해주면 그만일 일이다. 메이벨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아, 너 애 아빠 됐더라. 조금 상태가 불안정해서 내가 살짝 손을 썼어.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세아씨 말하는 거야?"
"응. ···가만 생각해보니까 너 완전 나쁜 놈이잖아. 결혼도 안 했으면서 덜컥 임신부터 시키고 말이야. 그리고 처음은 내가 되었으면 했는데···. 나쁜 놈."
"······."
할 말을 잃어버린 나는 말없이 누나의 손을 잡았다. 누나는 손을 꼼지락거려 내게 깍지를 껴왔다. 상처투성이 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며 단단하게 굳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구체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수많은 별들을 지나치면서 퓨즈가 나갔던 의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느낀 건,
"아저씨!"
"현우씨!"
"오빠!!"
내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지수, 한세아, 예린이 나를 덮치는 감각이었다. 그녀들은 작게 흐느끼며 나와 누나를 같이 안았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울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내가 넘어간 순간부터 불안에 많이 떨었는지 나를 놓칠 새라 꽉 붙든 채로.
"이겼다━!"
다른 곳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제서야 멍한 정신을 차린 나는, 나를 둘러싼 온기가 내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나서야 우리가 이겼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온 몸에 가득 들어찼던 긴장이 이제서야 풀리며 극심한 탈력감을 선사했다. 의식이 흩어지려고 했으나, 어떻게든 붙잡아 정신을 유지했다.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 주홍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많지는 않아도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을 사람들이 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끝난다. 우리는 더 이상 오늘만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내일이라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움직인다.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진 채,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나는 끊임없이 달려왔다.
그래,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내가, 우리가, 사람이 가만히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순간을.
그런 하늘이 눈부셔서일까.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절대로 잊지 마라.
지금 눈에 새겨지는 건 흉터다. 겨우 되찾은 아이들의 세상이다.
지금 볼을 타고 흐르는 건 의지다. 지금 이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앞서 희생한 자들이 보내는 찬사다.
다시는 놓지 마라.
지금 손에 잡혀 있는 건 기적이다. 끝내 붙잡을 수 있었던 누나의 생명이다.
오후 5시가 주는 특유의 색채와 함께 온 세상이 은방울꽃으로 뒤덮였다. 서로가 서로의 색으로 물든 세상은, 은방울꽃을 금색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떠올렸다.
이를 테면, 코로 맡아지는 선선한 가을의 향기나 우리가 잃어버린 집의 내음 같은 것들.
끝내 되찾은 우리의 별을, 우리의 집을,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편하게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곳,
하루를 끝내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푹 쉴 수 있는 곳, 괴물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함에 떠는 곳이 아니라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우리는 그런 공간을 집이라 부른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집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