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79화 (480/497)

Chapter 479 - 479. And

일주일이 흘렀다.

고작 7일에 불과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매우 정신없이 보낸 나날들이었다.

최미소에게 세계수의 나뭇잎을 전해주었던 일.

세계수의 묘목이 어느 틈에 붙여둔 것인지 몰라도 작은 나뭇잎 하나가 문을 넘어가는 내게 딸려 왔었다. 칼카타의 유산을 전해주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의 유산이 그의 고향에서 묘목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나뭇잎을 전해주니 최미소는 아기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에 가서 정말로 다행이라면서.

부디 그녀의 마음 속 응어리 진 감정이 이걸로 조금이나마 달래질 수 있기를 바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난쟁이 칸을 비롯한 사람들과 세계수가 불타는 걸 구경한 일.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캠프 파이어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구경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안타깝게도 술은 마시지 못했다. 다들 부상이 심각해 술을 마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염된 세계수가 불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신아현과 까악이가 의왕시 생존자 캠프로 돌아간 일.

당초 그녀가 원했던 대로 신아현은 겨우 기동만 가능한 전차를 끌고 돌아갔다. 포탄은 전부 소모해서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 대신 연료는 가득 채워줬다. 여분의 연료도 넉넉하게 말이다.

그녀를 배웅하는 것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아현에게 듣자 하니 여기저기 흩어진 캠프를 결집시킬 거라 했으니 아쉬워도 보내주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위풍당당하게 돌아간 신아현이 그녀의 언니인 신아진에게 너무 혼나지 않기를 바랐다.

엘리가 여행을 떠난 일.

오염된 세계수가 불타는 광경을 울면서 지켜본 그녀는 다음날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알렸다. 이 세상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아직 세상이 안정화된 건 아니라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이었으나, 우리가 말려도 떠날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돌아오고 싶으면 마음 편하게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이틀 전, 엘리는 조심히 다녀오겠다는 쪽지를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부디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그 외 사람들이 더 이상 벙커 안에서만 지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과 난잡한 거리를 청소하는 일들이 있었다. 지수와 세아가 나를 부르는 호칭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유는 겨울이 오기 전에 시설을 재정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훗날, 캠프를 이곳에 집결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이봐! 그 자재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천천히! 천천히 내려! 아니, 천천히! 천천히 내리라고!"

"여기 잔해 좀 치우게 다들 모여봐!"

사방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운 자재를 들기 힘든 노인과 어린 아이들은 공사 현장에서 한 켠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인부들에게 필요한 도구를 가져다주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구슬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재를 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은 연대장이었다. 정확히는 이제 전 연대장이었다.

사태가 끝난 이후, 우리에게 본인의 이름이 김석진이라고 알려준 그는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외팔이라 힘든 공사 일을 어떻게 하나 싶었건만, 기우에 불과했다.

나름 군인이었다는 것인지 남들보다 배는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텅 비어있던 곳에는 건물 뼈대가 잡히고 있었다.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건물을 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어느새 높게 뜬 태양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빛이 투과되는 구름들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빛이 너무도 밝아 오래 바라볼 수는 없었다. 태양빛에 달아오른 내 얼굴을 식혀주려는 건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번에는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입자가 변형시킨 나무 인간들이나 각종 변종들은 세계수가 불타자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거리를 배회하는 괴물들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변이된 야생 동물들은 그대로였기에 개인 행동은 아직 삼가야 할 때였다. 그나마 그것들은 영역이 정해져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그때.

"오늘은 웬일로 밖에 나왔구나."

사람들에게 한창 지시를 내리고 있던 난쟁이 칸이 내게 다가왔다. 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흙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흔적이었다.

"밖에 좀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안에만 있으면 안 아플 것도 아프게 된다면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누나 옆에서 보냈더니 결국 한 소리 듣고 말았다. 내 꼴을 보다 못한 지수, 세아, 예린이 바람 좀 쐬고 오라며 나를 쫓아낸 것이다.

누나 옆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그녀들에게 충실했다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뭐, 이렇게 바깥에 나와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답답함이 좀 가시는 기분이긴 했다.

"벌써부터 잡혀사는구나."

"에이, 잡혀살기는요. 저희들이 얼마나 화목한데요."

"그래, 팔은 좀 어떻고?"

아무렴, 하고 킬킬거리던 난쟁이 칸은 이내 내 팔을 눈에 담았다. 검은 구체와 직접 접촉했던 내 팔은 당시에 매우 엉망이었었다. 수정으로 치유가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이 자재와 잔해를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싶은 내가 여기에 가만히 앉아있는 이유였다. 상처가 덧나기라도 해서 그걸 들키기까지 한다면 여러모로 피곤한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그나마 지금은 자연 치유력으로 호전된 상태였다. 붕대도 조만간 풀 수 있을 듯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면 붕대 풀어도 된대요. 솔직히 지금 풀어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러면 또 세아가 뭐라고 할 테니 시키는 대로 하려고요."

"거 봐라, 잡혀 사는게 맞다니까. 나중 가면 어찌될지 아주 훤하구나."

"그럴 일은 없어요. 제가 이기거든요."

"애들 싸움도 아니고 뭘 이긴다는 거냐."

"있어요. 그런 게."

칸이 어처구니 없는 시선으로 날 봤지만,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딱히 그녀들에게 휘둘리는 건 아니다. 요즘은 세아에게 중요한 시기였기에 최대한 맞춰주는 것뿐이었다.

지수나 세아가 하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고, 온전히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으니 내심 기분 좋기도 했다.

"······."

"······."

나와 칸은 잠시 아무 말없이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시끌벅적한 공사 소리와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런 아이들을 보던 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메이벨은 아직 자고 있느냐?"

"네. 아주 편하게 자고 있어요."

"깨어날 기미는 없고?"

"아직은요. 그래도 금방 깨어날 거에요. 금방 일어나겠다고 저랑 약속했으니까."

메이벨은 문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잠에 들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잠든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새옷으로 갈아입혀주는 거랑 푹신한 침대에 눕혀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나머지는 누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나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지.

그렇게 누나가 눈을 뜬 순간에는 내가 옆에 있을 거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최대한 만들어주마."

"매번 신세만 지네요. 감사합니다."

"무얼. 나중에 애기나 자주 보여주거라. 나는 그거면 족해."

칸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좀 더 쉬시지. 오전부터 계속 일하셨잖아요."

"내가 안 가면 작업이 진행이 안돼. 엉덩이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일어나서 마저 일해야지."

"땅울림은 아직도 안 쓰고 계세요?"

"그래, 그걸 쓰면 쉽게 끝나니까. 쉽게 얻은 건, 쉽게 잃는다는 것과 같아. 정확히는 잃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지. 어떻게 되찾은 집인데, 쉽게 잃어서 쓰겠느냐? 그렇게는 안되지."

과정이 조금 힘들거나 어려워도 일이 다 끝나면, 성취감이 올 것이고, 그 성취감은 곧 자부심이 되어 이곳을 지키는 자긍심이 된다고 말한 칸. 그는 여기서 더 늦었다가는 탄 녀석이 또 툴툴거릴 거라는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을 보니 난쟁이 조이와 탄이 칸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슬슬···.'

어느 정도 바람을 쐬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배고프기도 했고.

휘이잉···

나를 스치듯 니간 바람이 내게 곳곳에서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를 전달했다. 나로 모르게 코를 킁킁거릴 정도로 고소한 냄새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집에 도착했다. 나, 지수, 예린, 세아, 메이벨이 함께 사는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엌에 있던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왔고, 나를 반겼다.

"오빠, 어서 와. 확실히 밖에 나가서 햇빛 좀 쬐고 오니까 훨씬 낫네."

그녀가 손을 흔드는 모습 뒤편으로 액자가 하나 보인다. 부러진 소방 도끼가 들어 있는 액자였다. 검은 광선을 쳐낸 이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진 도끼를 액자에 담아 보관하는 것이었다.

난쟁이 르한이 수리해주겠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지수는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했었다.

"그래? 다행이네. 세아는?"

"언니는 방금 막 잠들었어.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 임신해서 그런가? 아무튼 배고프지?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언니 몫은 따로 빼뒀으니까 예린이 나오면 같이 밥 먹자."

"밥···!"

지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고 도도도 튀어 나오는 예린. 아이는 빠른 움직임으로 식탁 위에 수저를 놓기 시작했다.

나와 지수는 한결 같은 아이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서로 마주보게 앉아서 식사 시간을 보냈다.

단란한 식사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세아의 상태를 보기 위해 그녀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최대한 조용히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아는 곧장 일어나며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그녀도 나처럼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수정탄을 발사한 반동으로 뼈에 금이 간 탓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은 상태였다.

"···현우구나···."

바싹 경계하는 눈은 나를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눈이 되었다. 임신이 확실시된 이후 다가오는 사람들을 거의 다 경계하게 된 세아. 그녀가 경계를 푸는 사람은 지수, 예린, 최미소, 나 뿐이었다. 그 외에는 접근을 불허한다고 보면 되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나 보네."

"으응, 아니야."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얼굴에 손을 올리자 세아는 아기새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마냥 내 손에 볼을 비볐다. 살짝 체온이 높은 듯싶었으나, 이 정도면 정상 범위 내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나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널 돌봐줬는데."

"그러게.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었지. 그때 먹은 계란죽 맛은 아직도 기억나."

"이, 이건 먹으면 안된다···? 유정란이란 말야."

양팔로 배를 감싼 세아가 나를 경계하면서 밀어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니 나는 그녀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는 어때? 배고프다거나 아프다거나."

"배는 안 고프고···, 아픈 것도 없어. 아, 따뜻한 수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알았어. 금방 가져다 줄게."

나는 아직 부엌에 있는 지수에게 덥힌 수건 좀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곧장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세아가 킥킥 웃었다.

"말은 직접 가져다 줄 것처럼 하더니?"

"너 지켜주는 사람은 있어야지."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그럼 여기 앉아서 오늘 뭐했는지 이야기나 해줘."

세아는 자신이 앉아있는 침대 한 켠을 툭툭 쳤다. 바싹 붙어 앉아 달라는 신호인 것 같아 나는 침대가 너무 흔들리지 않게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세아가 팔짱을 껴왔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는 그 상태에서 오늘 본 것들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별 대단한 것들은 없었다. 내가 본 것이 곧 세아도 본 것이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킥킥 웃어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따뜻하게 덥힌 수건을 들고 온 예린이 합류했고,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온 지수도 자연스레 방에 들어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어느새 함께 모여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아니, 문득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누나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내 마음이 순간 드러난 것인지, 처음부터 티가 났던 것인지. 지수가 못 말린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아와 예린도 지수의 행동을 따라했다.

"오빠, 메이벨 언니한테 한번 가봐. 내가 아까 보고 오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른 가서 보고 와. 자고 있다고 하지만, 혼자 두는 게 영 신경 쓰여서 그래."

"···고마워."

한 눈을 파는 내가 미울 수도 있는데, 배려를 해주는 지수가 고마웠다. 세아도,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얼른 보고 오겠다며 말한 뒤 방을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누나가 있는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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