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84화 (485/497)

Chapter 484 - 484. 외전 - 설 (2)

지수가 임신한 상태였을 당시에 입덧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누나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황이라 지수뿐만이 아니라 세아나 예린도 내게 뭘 바라는 걸 스스로 부담스러워 했을 때였다.

다행히 누나가 깨어난 뒤로 지수가 원하는 걸 말하긴 했지만, 내게는 그때 느꼈던 미안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잡아온 거대 게를 훌쩍이면서 먹을 정도였으니까. 살이 가득했던 그 게는 이틀도 못 가서 껍질만 남게 되었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걸 억지로 참았다고 생각하니 지수가 뭘 맛있게 먹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거의 사냥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지수, 세아, 예린, 메이벨이 먹고 싶은 것들을 잡아와야 했으니 말이다.

"좋아해서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말해. 저번처럼 눈치 봐서 꾹 참지 말고."

"···응, 고마워."

배시시 웃는 지수. 그녀의 뒤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누가 붓으로 장난친 것마냥 끝부분만 하얀 꼬리가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꼭 부족장처럼 말하네."

세아가 킥킥 웃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하우스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작물들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해도, 신선한 육류를 먹기 위해서는 야생 동물들을 잡아야 했으니까.

사태 이후로 문명이 박살 났는데 마트가 있겠나, 뭐가 있겠나.

그래서 요즘은 통조림에 질린 사람들이 사냥꾼으로 나서는 추세다. 그 사람들이 사냥해온 거대 야생 동물들을 전문적으로 도축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단순 그 상황들만 따지면 원시 부족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수정을 연구하면서 생긴 부산물인 냉장고나 인덕션 같은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부족장 말고 사냥꾼이라고 해줘."

"신분은 부족장이 더 높은 거 아니야?"

"그래도 어감이 그게 더 있어 보이잖아."

아무래도 좋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우리를 비춘다. 달그락 소리 사이에 웃음 소리가 섞인다.

그러다가 문득,

"아, 오빠. 저 이거 가시 좀 발라주세요!"

예린이 내게 살코기가 올려진 그릇을 내밀었다. 예린이 가져온 부위는 지느러미 쪽에 있던 살이었다.

역시 예린이라고 해야 할까. 그쪽 부위의 살이 쫄깃하면서 별미라는 걸 아는 듯했다. 회로 먹는 것도 아니라 구운 것이기는 해도 맛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단지 잔가시가 많을 뿐이지.

"잠깐만. 금방 해줄게."

나는 그 살코기에 젓가락을 콕 찍었다. 그리고 땅울림을 약하게, 매우 약하게 운용했다.

우웅-

약한 진동이 젓가락을 타고 전해진 것과 동시에 비기, 뼈와 살 분리가 발현되었다. 살코기 속에 파묻혀 있던 잔가시들이 밀려나와 순살만 남게 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걸 본 예린은 희희낙락하며 생선 살을 와구와구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귀가 파닥거렸다.

중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오늘도 비기가 무사히 써진 모양이다. 땅울림을 이렇게 사용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에 잡았던 물고기가 잔뼈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써보았던 건데, 그게 순살로 만들어주는 비기일 줄은 누가 알았겠나.

처음에는 강도를 조절하지 못해 물고기 살이 완전 물러졌지만, 요즘에는 살의 탄력은 최대한 유지한 채 가시만 발라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지수야, 오늘 소풍 간다고 했었지? 도시락은 아까 아침 준비하면서 간단하게 만들었으니까 그거 가져가면 돼."

짭조름하게 간이 된 생선 살을 내 밥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준 세아가 한 말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오늘 낮동안만 지아 좀 봐줘요. 혹시 너무 칭얼거리거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주시고요."

"응, 알았어. 그래도 뭐 애들이 워낙 착해서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재밌게 놀다 와."

지수와 세아의 대화. 이번에는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특별한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새해이다 보니 둘만의 시간을 가지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으나, 가끔씩은 나와 둘이서만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하면 어감이 뭔가 이상하긴 한데, 오늘 나와 시간을 보낼 첫 타자는 지수였다.

"현우야, 엘리는 미소 언니네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던가?"

"어. 아마 지금은 어디 산책하고 있을걸?"

나는 세아의 물음에 답하는 한편, 근처에서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을 엘리를 떠올렸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엘리. 그녀는 지수와 세아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현재 최미소와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고.

엘리를 위해 만들어둔 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최미소가 외로워할까 봐 그녀의 집에서 지내고 있는 엘리였다.

우리가 아무리 최미소를 챙기고 있다고 해도, 아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니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나는 미소 언니한테 잠깐 다녀와야겠다. 뭐 좀 받기로 한 게 있거든."

세아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시작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그릇을 한데모아 싱크대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잘 먹었습니다!"

후아, 소리를 내며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는 예린. 아주 만족스럽게 먹은 것인지 얼굴에서 헤실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누나, 오늘 당번 누나지? 도와줄까?"

"응? 아냐. 현우 너는 지수랑 나갈 준비해야지. 얼른 가서 옷 갈아 입어."

메이벨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은 이따 밤에 나를 독차지하면 된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결국 누나의 손에 밀려 어어 하는 사이에 강제로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웃음이 픽 나왔으나, 누나 말대로 지수와 같이 나가기로 한 건 사실이니 얼른 준비해야 했다.

간단하게 씻은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내가 따로 챙긴 준비물인 카메라를 들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오빠! 많이 기다렸어?"

신난 기색으로 달려온 지수가 내게 팔짱을 껴왔다. 그녀는 주로 입던 옷이 아니라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참 잘 어울렸다. 설날, 설날 노래를 부르더니 한복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치마가 조금 짧다는 점과 소매 부분의 재질이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전통 한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한복이었다.

"짜잔! 나 어때? 오빠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는 거야!"

"진짜 잘 어울려. 한복은 언제 맞춘 거야?"

"작년 설에는 바빠서 이런 거 챙길 시간이 없었잖아. 그래서 올해는 한복 한번 입어보자 해서 마음 먹고 만들었지. 이거 조이가 다 만들어준 건 아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나도 손 보태서 만들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뭐라도 준비할 걸 그랬네."

뭘 잔뜩 준비한 지수에 비해 내가 준비한 건 카메라 하나밖에 없다 보니 눈치가 보였다. 아무리 소풍의 꽃이 사진이라고 해도 말이다.

"괜찮아! 내가 다 준비했어! 오빠는 이거 하나만 걸치면 돼!"

상체를 내밀며 으스댄 지수가 내게 내민 건 두루마기였다. 단순 두루마기가 아니라 위에 시스루 재질의 겉옷을 하나 더 걸치는 식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입으면 아래는 어차피 다 가려지니까 이대로 가자. 나도 신발은 편한 거 신었어."

그리 말한 지수는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참 지수다워서 나도 모르게 킥킥 웃고 말았다.

그녀가 건넨 옷을 걸치자 지수는 잠깐 풀었던 팔짱을 다시 껴오며 나를 자연스레 이끌었고, 문을 열었다.

휘이잉···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아직은 살짝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 바람과 봄 바람이 뒤섞인 바람이었다.

***

나와 지수는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목적지는 지수가 찾았다던 신기한 나무를 발견한 곳이었다.

"으아. 벌써부터 지아 금단 증상 오는 것 같아. 오빠는 안 그래?"

집 밖으로 나온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건만. 지수는 아기를 안고 있는 시늉을 하며 내게 물었다. 장난스레 묻는 어투였으나, 마냥 장난은 아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아가 있을 자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긴 한데. 세아가 잘 봐주겠지."

"어어? 누가 보면 나는 세아 언니 안 믿는 줄 알겠어."

"에이,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면서."

나는 토라진 척을 하는 지수를 달래며 손을 잡았다. 바깥 기온에 차가워졌던 손이 서로의 온기에 다시 덥혀졌다.

"오빠."

천천히 걸으면서 봄이 찾아오기 시작한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와중, 지수가 문득 나를 불렀다.

"응?"

"오빠는 루리랑 지아 태어났을 때 무슨 기분이었어?"

"갑자기?"

"그냥. 나도 갑자기 궁금해져서."

"음···."

지수의 손과 깍지를 낀 나는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에 회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첫째, 이루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기 직전, 나는 꿈을 하나 꾸었었다. 일종의 태몽이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용이 나오거나 호랑이가 산을 찢어버리는 거창한 태몽은 아니었다.

그저 반딧불이같은 작은 빛무리가 내 주변을 맴도는 꿈.

그 움직임이 뭔가 나를 혼내는 것 같아 내심 주눅이 든 채로 멍하니 빛무리를 바라보았던 꿈.

이제서야 자신을 신경쓰냐는 듯한 기색을 풍기는 흔들림에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었다. 빛무리가 내 손에 올려진 장면을 끝으로 꿈에서 깼고.

꿈에서 깬 나는 그 작은 빛무리가 유정란 속의 아기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었다. 출산 예정월인 6월을 훌쩍 지난 7월의 어느날이었다.

그 뒤로, 나는 한층 더 알에게 신경을 쏟았다. 이제 아빠가 될 준비를 마쳤으니, 겁 먹지 말고 나와도 된다면서.

다행히 루리는 무사히 껍질을 깨고 태어날 수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가 유독 화창해진 하늘을 품은 8월에 말이다.

둘째, 이지아. 나와 지수의 아이인 지아는 원래 출산 예정일에 딱 맞춰서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루리 때와 마찬가지로 꿈을 하나 꾸었는데 빛무리가 내게 돌진하는 꿈이었었다. 누가 지수가 낳은 아이 아니랄까 봐 아주 활발한 빛무리였다.

알이 아니라 지수가 직접 출산한 아이였기에 탯줄을 내가 직접 끊었던 기억이 난다.

지수와 똑같은 꼬리가 쭈글쭈글 말린 아기.

살짝 붉은기가 남아있고, 귀가 접혀 있던 아기.

못생겨 보이던 그 아기를 눈에 담으니, 문득 웃음이 나왔던 기억도 난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지아라는 이름을 내뱉었을 때, 아이가 보인 반응에 나는 어느새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난다.

아기를 안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자세를 취하고 바보같이 질질 짜는 나를 보며 지수가 어이없어 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지수도 울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전부 눈에 담았다. 세상에 탄생을 알리는 울음 소리를 전부 귀에 담았다. 작디 작은 손이 내 손가락을 쥐는 감각을 전부 가슴에 담았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그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세상이 이 작은 아이에게 묶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기분은 내 세상이 이 작은 아이를 감싸는 기분이었다. 분명 잡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이의 손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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