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5 - 485. 외전 - 설 (3)
나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지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맑은 금안도 멈춰서 나를 기다렸다.
"아이들을 본 순간 느꼈지.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런 말을 하면 좀 부끄럽긴 한데, 내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
"오빠도?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더니, 진짠가 보네. 나도 지아 봤을 때 그렇게 느꼈었는데."
지수는 기분 좋다는 듯 히히 웃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꼬리도 좌우로 살랑거렸다.
아이들이 그다지 칭얼거리지 않고 울어도 금방 뚝 그치는 편이었지만, 엄마아빠 노릇을 하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행동에서 오는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느끼는 피로감이었다.
내가 루리와 지아를 보듯이, 루리와 지아도 우리를 눈에 담고 있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에 절로 조심하게 되는 까닭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몸이 매우 강하다는 것일까. 부모는 초인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에 그치지 않고 진짜로 초인에 가까운 우리였기에 아이들을 챙기는 과정에서 잡다한 문제들은 생기지 않았다.
세아와 메이벨도 같이 육아에 참여하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루리와 지아는 우리의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서 콧노래를 즐겁게 흥얼거리는 지수를 초점에 잡았다. 폴짝 뛰듯이 걷는 지수의 모습. 살짝 흐릿하게 잡힌 상의 윤곽선이 뚜렷해진 순간, 나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지이잉···
그러자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사진 하나를 뱉어냈다. 내가 방금 찍은 지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었다.
"아, 뭐야! 사진 찍을 거면 찍는다고 말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사진을 찍힌 지수도 불만을 토해냈다. 살랑거리던 꼬리도 멈췄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안 나오잖아. 자, 한번 봐봐. 잘 나왔어."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냅다 가져간 지수는 사진이 빨리 나오도록 탈탈 털었다. 이내 드러난 사진을 본 지수는 흠 소리를 내며 감상했다.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걸어가고 있는 지수가 찍힌 사진. 꼬리가 좀 역동적으로 보인다는 점만 빼면 괜찮게 찍힌 사진이었다. 다행히 지수의 기준점을 만족했는지 그녀는 얌전히 사진을 돌려주었다.
나와 지수는 지나가는 배경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볼 때마다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찰칵!
겨울의 순수가 녹으면서 만들어진 작은 개울을 배경으로, 순수를 받아들여 싱그럽게 자라난 새순을 배경으로, 우리처럼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사이 좋게 걷는 풍경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아침부터 신난 기색으로 뛰노는 풍경을 배경으로.
그 외 여러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서 사진을 찍었다. 푸른 하늘이 비춰지는 사진을 말이다.
지수도 잔뜩 신난 기색으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며 사진에 찍혔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진을 찍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숲 속에 들어와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네. 오빠, 저기야. 내가 본 그 나무가 있는 곳이."
지수가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눈길이 향한 곳에서는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주변에 다른 나무는 많지만, 신비롭다는 느낌을 주는 나무는 저 한 그루뿐이었다.
부스스···
우리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지나 나무가 자리잡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풀숲이 우리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 봐봐. 아직 필 시기가 아닌 꽃들이 잔뜩 펴 있어. 아니면 작년에 폈던 게 아직 시들지 않은 건가? 이 나무 덕분인가 봐."
나무는 주변의 식물들을 보호하듯이 보호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꽃들은 그 나무의 보호 아래 여전히 제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서 진작에 시들었어야 할 꽃도 지지 않고 있었다.
나무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느껴지는 포근한 기운. 나는 이제 확실하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거.'
일종의 수호목이었다. 메이벨이 지수의 말을 듣고 내게 알려주기를 이런 영역을 만드는 나무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나와 자신의 존재 때문이라고 했다.
한때 세계수의 씨앗을 품었던 우리는 비록 지금은 그 파편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 잔향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나무와 그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니 나무가 꽃이 시들지 않게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꽃이 지지않게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을 이어나가면서 꽃이 피어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특징은 뭔가 꼭 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나무를 살피던 시선을 다시 지수에게 돌렸다.
"오빠! 이 꽃 진짜 신기해! 향이 꽃이 아니라 잎에서 나!"
나와 눈이 마주친 지수는 꽃을 든 채로 활짝 웃었다. 얼른 오라며 부르기도 했다. 평화로운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예전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내게 있어서 지수는 내 옆을 지켜주는 동반자였다. 나와 함께 앞으로 나서며 위험으로부터 일행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동료 말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바로 옆에서 틈을 만들어내 도와주었던 지수, 힘들어서 포기할 만도 한데, 결코 주저앉지 않고 일어섰던 지수, 온갖 괴물들 앞에서도 기 죽지 않고 기합을 내지르며 맞섰던 지수.
나조차도 힘들어서 주저앉을 뻔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내 곁을 지켰던 건 지수였다. 언제나 그녀가 내 곁을 지켜서, 어쩔 때는 나보다 더 앞서 나가서 움직여주어서,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 토끼다! 아직 새끼인가? 완전 작잖아···!"
포근한 이곳에서 겨울을 편하게 보냈던 것인지 풀숲을 껑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검은 토끼들. 지수는 그런 토끼들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싸울 일이 더는 없어졌기에 지금의 지수를 볼 수 있었다.
경계심도 없이 다가와 지수가 내민 손가락에 코를 대고 찡긋거리는 녀석들. 작은 토끼들은 이내 지수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찰칵-
그 모습을 보며 셔터를 눌렀다. 생소한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든 토끼들은 지수의 손길에 안정을 되찾았다.
도망가지 않은 녀석들을 보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지수. 이럴 때 보면 참, 산책 나와서 기분 좋아 보이는 강아지처럼 보인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검은 토끼 무리들은 가만히 있기 지루했는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사사삭, 움직이는 모양새가 아주 재빨랐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녀석들은 본 지수는 잠시 아쉬워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내 손을 이끌고 수호목의 영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아 보기도 하고, 혹시나 새싹을 밟을까 걱정되어 신중히 발을 내딛어 보기도 하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선 채로 맞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지수가 사진을 찍어 달라며 자세를 취했다.
"······."
나는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려다 말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손을 받침대로 만들어 얼굴에 댄 것이었다.
내가 말문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왜 그런 눈으로 봐! 원래 사진 찍을 때는 부끄러운 포즈도 취해봐야 한다고! 그래야 여러 사진을 뽑아서 그 중 잘 나온 걸 고르지!"
"···그렇긴 하지."
"그리고 오빠, 나도 지금 이 자세가 안 부끄러운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빨리 찍어! 빨리···!"
임신을 하니 사람이 확 달라진 것처럼 다소곳하게 변했던 지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사라졌었다. 남은 건 언제나처럼 활발하게 뛰어다니고 명랑하게 웃는 지수였다. 그런 지수가 포즈를 유지한 채로 지금 부끄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솟은 장난기에 셔터를 바로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까지 부끄러운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지 기다려보았다.
"오빠?"
기다리는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문을 담아서 나를 부르는 지수.
"응?"
"왜, 왜 안 찍어? 나 부끄럽다니까?"
"아, 이게 초점이 잘 안 잡히네? 조금만 더 그러고 있어봐. 초점 잡히면 바로 찍을게."
"······거짓말이구나."
내 장난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장난기를 빠르게 눈치 챈 것인지,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티가 많아 난 것인지는 몰라도 지수가 곧장 도끼눈을 뜨며 경고를 한 것이다.
"오빠, 지금 당장 순순히 찍는게 좋을 거야. 내가 자세를 풀고 나서 살고 싶다면 말이야."
"······."
나는 그녀의 경고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셔터를 곧장 눌렀다. 그와 동시에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밀려나왔다.
"오빠, 필름 아직 많이 남았지?"
다행히 내 장난을 그냥 넘어가는 지수. 그녀는 부끄러운 장면이 찍힌 사진을 품 속 주머니에 넣고 물었다.
"응, 하루종일 찍어도 충분하게 챙겨왔어."
"그럼 타이머 맞춰놓고 우리 둘이 같이 나오게 찍자. 기껏 둘이 왔는데, 사진에 혼자만 찍히는 건 아쉽잖아."
나와 지수는 한동안 카메라를 바닥 혹은 평평한 돌에 고정시켜놓고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사실상 나는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세가 너무 어정쩡하다며 지수가 내 자세를 자기 입맛대로 바꾼 까닭이었다.
평범하게 나란히 앉아서 찍거나, 풀밭에 드러누워 있는 모습을 찍거나, 빈틈없이 서로 꽉 안고 있는 모습을 찍었다.
그 덕분에 숲 속에서는 한동안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사진도 한장 한장 쌓여갔다. 그만큼 추억도 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기 앉아서 잠깐만 쉬자. 오빠 상태 보니까 한번 쉬어야 할 것 같아. 나도 찍은 사진 좀 봐야 하고."
만족할만큼 사진을 건진 지수가 수호목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요구 사항이 까다로웠던 감독 지수에게 시달린 나는 맥이 빠져 말없이 나무에 등을 기대 앉았다. 내 평생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휘이잉···
살짝 서늘했던 아침 바람과 달리 봄 기운이 완연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눴고, 찍은 사진들을 함께 감상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게 또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키득키득 웃었다.
예전에 지수가- 아니, 우리가 바랐던 것처럼,
그 순간, 그 시간, 그 모습 그대로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