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6 - 486. 외전 - 설 (4)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점심 때가 되었길래 나와 지수는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다. 간단하게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신경을 쓴 티가 많이 나는 도시락이었다.
걷기와 사진 찍기. 단순한 행동을 반복했을 뿐이건만, 체력을 꽤나 많이 소모한 우리는 도시락을 빠르게 해치웠다.
지수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카메라를 챙겨 오긴 했으나, 이렇게 잔뜩 신나서 수십 장을 찍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두자리 수를 넘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따로 챙겨온 필름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으니까.
도시락을 순식간에 해치운 후, 우리는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딱히 쓰레기라고 할 것들이 생기지도 않아서 그저 몸만 일으키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지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꼭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혹시 반지나 목걸이를 잃어버렸나 싶어 지수를 살펴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두개는 지수가 몸에서 떨어트린 적도 없었고.
"지수야, 뭐 잃어버렸어?"
"아니, 잃어버린 건 아니고 아까 그 토끼들 어디 갔나 한번 보고 있었던 거야."
"토끼? 걔들을 왜?"
"하나 잡아가서 오늘 저녁으로 먹을까 했지."
"······."
지금 그게 방금 전까지 토끼를 귀엽다고 말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던가. 이제 보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건 지수가 아니라 나인 듯했다. 할 말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나도 다른 동물들을 몇번 잡아본 입장이라 토끼를 잡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귀여운 동물에서 한순간에 비상 식량으로 전락한 토끼들이 순간 불쌍해졌을 뿐이었다.
나는 뭐라 말하는 대신 조용히 지수의 손을 잡고 걸었다. 내가 지수를 붙잡아 둔 틈에 토끼 녀석들이 멀리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냉장고에 자리없어."
"응? 오늘 아침 많이 차려서 자리 생겼을 텐데?"
"아니야. 없어. 그냥 가자."
나는 미련이 남은 지수를 강제로 둘러안았다. 날씬한 체구가 품에 들어온다. 내게 안긴 형태가 된 지수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히히 웃었다.
탁- 타타타탁-
그녀의 꼬리가 내 다리를 탁탁 두드리기도 했다. 좀 과하게.
"뭐야? 이거 지금 납치하는 거 아니야? 이러면 안돼. 난 이미 주인이 있어서."
안된다는 말과 다르게 앞뒤로 살살 흔드는 그녀의 다리는 공주님 안기로 안아준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주인이 나잖아. 다리 너무 흔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나는 괜한 소리 말라며 지수를 고쳐 안았다. 지수의 목걸이에 내 손때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데, 내가 주인이 아니면 누가 주인이라는 말인가.
"노력해볼게!"
내가 고쳐 안는 과정에서 잠시 흔들린 그녀는 몸을 단단하게 고정한 팔에 자신을 맡겼다. 빈틈없이 꽉 안아주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내가 무게 중심을 쉽게 잡을 수 있게 양팔을 안쪽으로 모았다. 그러면서 멍멍 소리를 내더니 혼자 헤실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그 상태를 유지한 채로 집으로 되돌아갔다. 전보다 더 화창해진 하늘을 눈에 담으면서.
***
지수를 안은 채로 도착한 집 앞. 그녀는 이제 내려달라는 말과 함께 몸을 꾸물거렸다. 그 꾸물거림에 나는 그녀를 조심히 내려주었다. 이내 지수의 신발이 땅을 단단하게 딛었다.
"세아 언니는 미소 언니네 갔다 온다고 하더니 벌써 돌아왔나 봐. 집 안에서 들리는 큰 발소리가 둘이야. 애매한 건 예린이 소리인 것 같고."
지수는 그리 말하며 귀를 쫑긋거렸다. 집의 방음이 허술한 것도 아니건만, 여기 바깥에서도 안쪽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그녀의 감각이 좋다는 건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나, 이럴 때마다 내심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현관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1층에 있는 창문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어디가?"
"쉿! 조용히 하고 따라와 봐."
지수가 향하는 쪽은 예린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왜 그쪽으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움직였다.
"왜? 왜 그러는데?"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우리 행동을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우리가 앞으로 할 행동이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멈춘다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예린이한테서 뭔가 이상한 낌새 못 느꼈어?"
지수의 말에 나는 잠시 아침의 예린을 떠올려보았다. 여전히 잘 먹고, 여전히 배터지게 먹는 예린이 떠오른다. 먹는 양에 비해 큰 폭으로 성장하지 않는 예린이었다.
"내 동생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단 말이야. 아침에는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갔지만, 이왕 기회가 생긴 거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야겠어."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지수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정작 그런 말을 한 본인도 내게 뭔가를 꾸미고 있는 주제에.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지수의 감을 무시하는 것보다 따라가는 게 맞겠지. 지수는 대놓고 뭔가 꾸미고 있다고 말했으나, 예린은 아무도 모르게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대놓고 하는 것과 몰래 하는 것.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낸 우리는 예린의 방 창문이 있는 곳으로 기척을 죽인 채 걸어갔다. 아주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 소리는 풀 밟는 소리에 묻혔다.
이윽고, 우리는 창문 바로 앞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지수가 먼저 고개를 빼꼼 들어 내부를 살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뭐 보여?"
"응, 예린이."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뭐하고 있는데?"
"그냥 내가 가져다 준 한복 입고 누워 있는데? 정령들이랑 같이. 오빠도 한번 봐봐."
지수가 뒤로 빠지고 내가 빈자리를 채웠다. 자리 교환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지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고개를 살짝 들어 안쪽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놓인 화분들과 함께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중인 예린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린은 지수가 말했던 것처럼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조금- 아니, 많이 짧은 게 아닌가 싶었다.
흑토끼의 형상을 한 정령들이 예린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한 마리는 독수리를 경계하는 미어캣처럼 몸을 일으킨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예린의 머리를 침대 삼아서 축 늘어져 있었다. 나머지 정령들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모르겠는데.'
귀를 기울이니 콧노래 소리가 작게 들리긴 한다. 허나, 그뿐이었다.
수상한 낌새는커녕 인형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굳이 묘한 점을 하나 따지자면 예린이 만지작거리는 인형이 나를 본뜬 인형이라는 점일까.
바로 그때.
인형을 주물럭거리면서 살며시 웃고 있던 예린이 히죽 웃었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타고 흐를 정도로 수상한 웃음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애앵···!]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정령이 갑작스런 예린의 난동에 휘말려 허공에 붕 뜬다. 그리고 그 정령과 눈이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
[······!]
나와 정령은 서로 놀랐다. 내가 황급히 몸을 숙이고, 정령이 울음을 토해낸 건 거의 동시였다.
[삐애애앵! 삐애앵!]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 경보음.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토끼 형상의 정령이 하강하는 독수리를 본 미어캣마냥 호들갑을 떨어댔다.
"뭐야, 들켰어?! 들키면 어떡해!"
지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하고 몸을 바로 내빼려고 했지만, 내가 지수를 붙잡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오빠···! 나라도 살아야지···! 여기서 들키면 언니의 위엄이 사라진단 말이야!"
"부부는 일심동체라면서.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그 위엄 사라진 지는 꽤 됐어."
나는 발버둥치는 지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미 몰래 도망치기는 그른 상황인데, 나 혼자 모든 걸 뒤집어 쓸 수는 없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으니 지금이 바로 그 뜻을 함께 할 때였다.
어차피 예린도 움직임이 느린 게 아니라서 내가 지금 와서 지수를 놓아준다고 해도 늦었다.
벌컥!
"······오빠, 언니. 둘이 여기서 뭐해요?"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창문이 확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낮게 가라앉은 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히죽 웃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딱딱하게 굳은 예린의 시선이 우리를 바라본다. 너무 많은 비밀을 알아차렸다며 이제 우리를 죽이겠다고 말할 것 같은 시선. 우리는 몸이 절로 위축되었다.
"아."
예린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지수가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한 모양이다.
"들었어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질문이 날아 들어왔다. 그 탓에 우리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되물어야만 했다.
"들어? 뭐를?"
"못 들었구나. 그럼 됐어요. 목줄도 안하고 있는 걸 보니 산책 플레이는 아닌 것 같은데,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요."
우리를 유심히 살핀 예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활짝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조용히 닫힌 창문에 패닉에 빠진 지수가 비춰진다. 하얗게 질린 손이 나를 붙들었다.
"오, 오빠. 어떡해. 그때 우리 봤었나 봐···! 언니로서의 위엄이···!"
"···언니의 위엄은 그것보다 더 진작에 사라졌으니까 걱정하지마."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도끼눈을 뜨며 나를 퍽퍽 때린 지수는 반항도 못하고 얻어맞는 나를 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추궁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지 않은가.
하지만 어쩐지 찜찜함이 더 늘어난 기분은 피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