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7 - 487. 외전 - 설 (5)
달칵-
빠져나가려는 지수의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집으로 들어오니 포근한 집 내음이 우리를 반겼다. 옅은 목재 냄새와 달콤한 우유 냄새가 섞인 냄새였다.
"이상하네.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애가 아니란 말이지."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루리와 지아 사진을 정리하던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오늘 낮에 찍은 사진들 중 잘 나온 것들을 골라 벽면에 걸고 있었다.
"뭘 자꾸 수상하대."
"진짜로 수상하다니까? 내 도그 센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그럼 주인 말 잘 들어야지. 강아지니까. 예린이는 너무 신경 쓰지마. 뭐, 위험한 일을 몰래 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달래듯 턱 밑을 살살 긁어주자 지수는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냈으나, 이내 마지못해 수긍하는 몸짓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순순히 보내는 건 아니지 않나. 그냥 말 한 마디로 지수의 멘탈을 침몰시켜 버렸는데.
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예린이 그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내심 놀라기는 했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정령이 알려준 건가?'
정령들은 밤낮 구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 미어캣 같은 정령이 우리를 보고 말해준 것일 가능성이 있긴 있었다.
애써 잡념과 함께 옷에 묻은 먼지를 마저 털어낸 우리가 찍은 사진을 벽에 장식하고 있을 때.
"현우야, 지수야. 잘 놀고 왔어?"
메이벨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루리를 안고 있었는데, 루리는 나를 보자마자 옹알이를 하며 손을 뻗었다.
"응, 사진 진짜 많이 찍고 왔지. 나중에 다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
누나에게서 루리를 건네 받은 나는 사진 중 일부를 나눠주었다. 누나는 항상 붙어있는 부유 수정으로 여러 사진을 허공에 띄워서 감상하기 시작했다.
"꺄! 빠빠부부!"
나는 해맑게 웃는 루리를 제대로 안았다.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우리를 바라보는 루리. 지수는 루리의 젖살이 빵빵한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그게 귀찮을 법도 한데 루리는 투명한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며 계속 웃었다.
세아와 똑같은 자안에 나와 지수의 얼굴이 비춰진다. 보이는 것이 그대로 눈망울에 비춰지는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귀여워."
풀어진 얼굴로 헤헤 웃는 지수.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루리의 얼굴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했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눌렸다가 원상복구 되었다.
"누나, 지아는?"
"지아는 쿨쿨 자고 있지. 루리도 방금 전까지 자고 있다가 너희 들어오는 소리에 깬 거야. 정확히 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더라. 아빠가 왔다는 걸 아나 봐."
메이벨은 어느새 지수에게 안겨 있는 루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원래는 감각이 뛰어난 지수의 아이인 지아가 일어나는 것이 맞지만, 지아는 아직 귀가 접혀 있는 상태라 주변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게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기 때 원치 않는 소음을 전부 듣는 건 몸에 무리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 지수도 한때 감각이 뛰어난 부작용으로 고생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감각이 한번에 개방되는 것보다 차근차근 단계를 높여서 몸에 적응을 시키는 편이 좋지 않겠나.
누나는 수호목이 크게 찍힌 사진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허공에 확 펼쳐져 있던 사진들이 한 곳으로 모여 정리되는 건 거의 동시였다.
"현우야, 그래서 이 나무 어땠어? 내 예상이 맞았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사진으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네."
"어, 누나 말이 맞더라. 우리 영향을 받은 건 확실해 보였어. 해는 안될 것 같아서 일단은 그냥 두고 왔지."
"잘했어. 그 나무를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나랑 같이 가서 결정하자."
"응."
나, 지수, 메이벨은 자리를 옮겼다. 언제까지고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거실로 향하니 코 끝을 자극하는 우유 냄새가 진해졌다.
"그나저나 세아는? 집에는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 우유 냄새는 세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세아가 이곳을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열려있는 방문 너머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세아도 너희처럼 집에 온지 얼마 안 됐어. 방에서 뭔가 하는 것 같더라."
최미소의 집에 다녀온 세아는 무언가를 가져왔는데, 누나는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부엌에 잠시 들렸다가 부리나케 쪽방으로 달려간 까닭이었다.
사실 쪽방이라고 지칭하는 것뿐이지 그 방은 다른 방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방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빈 방이라고 보면 되었다.
"아, 맞다. 세아가 너 오면 자기 방으로 잠깐만 보내달라고 했었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나온 메이벨의 말이 끝난 직후,
"응?"
손가락으로 루리와 놀고 있던 지수가 귀를 쫑긋거렸다. 무언가를 포착한 쫑긋거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수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세아가 향했다던 쪽방으로 냅다 달렸다. 잔뜩 흔들리는 꼬리가 신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떻게 저게 아이를 낳은 엄마의 달리기라는 말인가. 언니의 위엄도, 엄마의 모습도 없는 달리기였다.
"어어? 지수야! 어디가! 세아가 혼자-! ···세아가 현우 혼자 오라고 했었는데···."
메이벨이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은 지수의 꼬리 프로펠러에 갈려 사라졌다. 사라진 지수의 자리를 잠시 멀뚱멀뚱 보던 나와 누나도 지수를 따라 움직였다.
세아가 있는 쪽방 문을 곧장 열어젖힐 것이라 생각했던 지수는 예상 외로 복도 중간에 멈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더니."
"아니, 생각해보니까 세아 언니도 나처럼 이벤트 준비한 것 같은데 내가 망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뭘 준비했는지는 알 것 같지만, 처음으로 보는 건 오빠여야 맞지."
지수는 얼른 가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한복이겠지?'
전부터 지수가 한복 한복 노래를 불렀었기에 만약 세아가 뭔가를 준비했다면 지수와 맞게 한복을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가 한복을 자기 것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예린이 것도 마련해 놓았었으니, 세아나 메이벨 것도 챙겨 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똑똑-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살살 두드렸다.
"세아, 나 불렀다며? 지금 들어갈까?"
"어, 어! 현우야! 자, 잠깐만!"
바삐 움직이고 있는지 방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아가 방에 들어오라는 말을 한 것은 우당탕 소리가 멈춘 이후였다.
"들어와···!"
묘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을 곧장 열었다. 그와 동시에 흠칫하며 얼어붙었다.
"세, 세아 토끼는 배가 고파요···."
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복장을 입은 세아가 무언가를 입에 문 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노출이 조금 있는 한복을 입었겠거니 생각했던 게 불과 몇 초 전인데, 흔히 바니걸이라 부르는 옷을 입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침대 위에서, 또 나름 귀엽게 꾸며보겠다고 병아리 그림을 그린 방에서, 직접 만든 것 같은 토끼 머리띠와 리본을 착용하고, 특정 부위가 도드라지는 자세를 한 채로 말이다.
"······."
내 시선은 세아가 입에 물고 있는 것에 고정되었다. 참 묘한 기분을 선사해주는 물건이었다.
"······??"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지수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세아의 말에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방 안의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니?"
지수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심하게 당황한 듯한 모양새였다. 경악한 것을 볼 때나 나오던 꼬리의 반응이 그걸 증명했다. 지수의 꼬리는 현재 털이 오소소 일어나 있었다.
"······어? 지수야? 왜, 왜 현우 혼자가 아니라···."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지은 세아. 그녀가 마주 당황하며 입을 작게 벌리자 입에 물고 있던 것이 떨어졌다. 그건 바닥이 아니라 가슴골에 끼워졌다.
잠깐 입에 물고 있는 사이에 침이 살짝 묻었는지 그것은 가슴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팔을 고정시킨 탓에 더욱 소담하게 보이는 가슴 사이에 안착한 것이다.
"······."
"······."
우리 사이에 지독한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이 이어질수록 세아의 가슴골에 파묻힌 그것은 점점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지금 상황이 수렁에 빠졌다는 걸 대신 알려주는 것처럼.
모르는 척 해주고 싶어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어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언니, 그건 뭐에요? 콘돔? 우리 그런 거 안 쓰잖아요."
"코, 콘돔 아니야···. 블루베리맛 비타민···."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세아는 몸을 숨길 생각도 못하고 그저 딱딱하게 굳힌 채 답했다. 현 상황을 인지하려는 뇌에 과부하가 와서 고장이 난 모양이다.
세아 말대로 보라색 레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비타민이 맞았다. 나는 비타민이 가슴에 잡아 먹히기 전에 구출했다. 비타민은 지금 상황에서 죄가 없었다.
"그럼 그 옷은 뭐에요···?"
"뭐, 뭐냐니. 지수야, 우리 이벤트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벤트하기로 했잖아···?"
"···이벤트가 맞긴 한데, 그, 다 같이 한복 입으면 이쁠 것 같아 가지고."
지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한복 치마를 펄럭거렸다. 부드러운 옷감이 흔들릴 때마다 세아의 눈빛도 흔들렸다. 커질대로 커진 자안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었다.
"······바니걸이 아니라? 왜? 올해는 흑토끼의 해잖아. 그럼 한복보다는···! 바니걸이 맞는 거잖아···! 그리고 예린이가 분명···!"
지수의 답에 세아의 자안은 빛을 잃어버렸다. 떠듬떠듬 뭔가 말하려고는 하지만, 나오는 문장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는 바니걸이라는 걸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걸요. 언니, 그걸 입고 안에서 돌아다니려고 했어요? 막 은쟁반 위에 컵 올려 놓고? 토끼 꼬리 실룩실룩 흔들면서?"
지수의 말에 어째서인지 당황한 건 세아 혼자만이 아니었다. 쥐 죽은 듯이 있던 메이벨이 세아와 같이- 아니, 세아보다 더 크게 몸을 움찔거렸던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루쯤은 현우를 위해서 이렇게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니, 그리고 이런 복장으로 돌아다닐 생각은 하나도 안 했거든?!"
세아는 자신은 그저 내게만 잠깐 보여주려고 입었던 것이라 주장했다. 허나, 그 주장에는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단단히 준비한 흔적이 방 내부 이곳저곳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이야, 우리 언니. 진짜 대단하네···."
"메이벨 언니···! 제가 현우 혼자만 보내달라고 했었잖아요···!"
슬그머니 도망치려는 메이벨을 그제서야 발견한 세아. 이제는 얼굴이 완전 새빨갛게 달아오른 세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미안."
"나 어떡해···."
메이벨이 시선을 회피하며 한 사과에 세아는 침몰했다. 이불에 얼굴을 묻어 낯빛만 겨우 숨긴 그 모양새가 꼭 꿩 같았다.
그래봤자 자신이 지금 바니걸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숨겨지지 않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