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88화 (489/497)

Chapter 488 - 488. 외전 - 설 (6)

나, 지수, 메이벨의 시선이 세아에게 집중되자 세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토끼 머리띠를 꽉 붙잡은 채로.

"······."

"······."

전보다 더 숨막히는 침묵이 이어진다.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은 오히려 주변의 인기척을 더 드러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바로 그때.

찰칵!

카메라 셔터 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지수가 들고 있던 카메라로 세아를 찍은 것이었다.

"······."

우리는 소리에 이끌려 멍하니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인쇄된 사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 사진 잘 나왔다. 사진 제목은 '한세아, 바니걸 입고 대낮부터 오빠 유혹하려다가 경비견 지수한테 걸림.' 이게 좋겠어. 액자에 끼워 놔야지~."

"······! 지, 지워줘!"

그제서야 화들짝 제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킨 세아. 그녀는 하얗게 질린 안색을 한 채 다급히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간단히 피했습니다! 그렇게 느려서는 못 잡지~ 안 되지~."

지수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날리며 세아의 손을 피했다. 간발의 차로 놓친 정도가 아니라 애초부터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에 세아의 손은 그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세아는 이대로 지수를 놓치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오랫동안 박제되고 말 거라는 미래를 상상한 듯했다. 부끄러워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긴박함에 하얗게 질린 안색이 번갈아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익···! 현우야!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

"어, 어!"

나는 세아의 외침에 무의식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수의 꼬리를 잡았다. 콱, 움켜잡듯 꼬리가 붙잡히자 지수는 그 즉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뒤로 도망가려다가 잡힌 것이기에 의도치않게 꼬리가 강하게 잡아당겨진 탓이었다.

"끄, 하으읏···!"

털썩 주저앉은 지수가 무언가를 참는 듯한 신음을 내면서 몸을 웅크렸다. 웅크린 몸을 잘게 떠는 그녀는 카메라와 사진만큼은 빼앗기지 않게 손을 위로 쭉 뻗었다. 그렇게 세아의 손을 또 피했다.

그와 동시에.

"아흐, 윽···! 오빠, 하지마···!"

사진을 사수한 지수가 나를 향해 외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세아가 뻗는 손을 얄밉게 쏙쏙 피하고 있었다. 세아의 표정이 점점 다급하게 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를?"

"왜 모르는··· 척, 해···! 그거 말이야! 꼬리 잡지 말라고···!"

"이거?"

괜스레 장난기가 돋은 나는 그녀의 꼬리 끝부분을 살살 쓰다듬었다. 누군가 붓처럼 콕 찍은 것처럼 하얀색 털이 있는 그 부위는 지수를 고장낼 수 있는 부위였다.

그 증거로 지수는 사진을 점점 더 지키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진짜···! 난 경, 고 했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많은 걸, 흐읏-, 할 수 있지···."

"···어?"

"오늘 밤에도 잠 못 잘 줄 알아. 바로 셋째 만들러 가? 방문 잠궈? 마침 세아 언니도 준비된 것 같은데 바로 시작해? 와, 여기 메이벨 언니도 있네. 어떻게 되고 싶은지 알고 싶으면 꼬리 계속 잡고 있어 봐. 응? 계속 잡고 있어 보라고. 어떻게 되나 보게."

"······."

서슬 퍼런 지수의 경고에 나는 세아의 눈치를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세아는 자기가 카메라와 사진을 손에 넣을 때까지 꼬리를 절대 놓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녀의 가슴도 그리 주장했다.

"지수야, 미안."

"오빠! 믿었는데···!"

나를 회유하는 것에 실패한 지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나, 지수, 세아는 카메라 하나, 사진 한장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방 안에서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모두 카메라가 부서지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힘보다는 기술이 주로 사용되었다. 애들이 노는 것처럼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고, 기습 공격으로 간지럼을 태워 몸에 힘이 쭉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지수가 찍은 세아 사진을 소장하고 싶은 쪽이긴 했지만, 막으려는 시늉을 보여줘야 나중에 세아와 원만한 합의를 이룰 수 있었으니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이벨 언니도 도와줘요! 언니도 연구 가운 안에 바니-읍! 으읍!"

"쉿! 쉬잇! 도와줄게! 도와줄 테니까 제발 쉿···!"

루리를 안은 채 어쩔 줄 몰라하던 메이벨마저 난장판에 난입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부유 수정에 의해 둥둥 떠다니는 루리는 뭐가 그리 웃긴지 꺄르륵 웃었다.

아기의 맑은 웃음 소리와 서로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섞이고 있는 상황은 개판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이리 줘! 아니다, 카메라부터 봐야겠어. 이리 내!"

"어어? 언니! 그렇게 세게 잡으면 카메라 망가져요!"

"그럼 얌전히 주면 되잖아! 사진도!"

지수는 세 사람에 깔린 채로 용케 카메라와 사진을 지키고 있었다. 3대1의 상황인데도 많이 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아슬아슬한 몸놀림으로 사진을 지켜내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3대1이 아닌 탓이 제일 컸다. 세아를 도와주는 척 나섰던 나는 말 그대로 도와주는 척일 뿐이었으니까.

사진이 메이벨이나 세아의 손에 잡히기 직전이 될 때마다 나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지수를 도왔다. 세아가 모르게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2대2인 셈이다. 세아가 나를 아군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내가 이 판도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컸다.

"현우, 너···!"

메이벨은 이미 눈치를 챈 듯 내가 엄한 짓을 할 때마다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내게 뭐라 말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메이벨이 사진을 잡는 것에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는 순간, 세아가 입을 열어 어떤 말을 내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누나는 세아보다 더 다급한 안색이 되어 사진을 뺏는 것에 더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리는 상황.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지수가 찍은 사진을 내가 가지고 싶은데.

내가 잠시 한눈을 판 그때.

"잡았다!"

메이벨이 카메라를 낚아챘다. 이제 남은 건 사진 한장뿐. 그 사진이 잡히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도 잡았어요!"

지수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사진 끝부분을 잡은 세아. 그녀는 나름 필사적으로 사진을 잡아당겼다. 질긴 필름인지라 아직까지 찢어지지 않고는 있으나, 그것도 금방일 듯했다.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사진이 늘어나다 못해 찢어지려고 했으니까. 좌우로 벌어지는게 마치 비명을 지르는 모양새였다.

사진이 찢어질 위기에서 구한 건 예린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예린이 막대기 4개를 가지고 오면서 다다다 달려온 것이다.

"언니! 오빠! 우리 윷놀-! ······뭐해요? 자리 비켜줘야 하는 상황이에요?"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지수가 이상한 사진을 찍어서···!"

"아닌 게 아니라 맞는 것 같은데. 세아 언니, 옷 내려갔어요."

"뭐?"

세아는 눈을 내려 복장 상태를 확인했다. 예린의 말에 내 시선도 세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바니걸 옷이 몸싸움 과정에서 내려간 것과 세아의 가슴이 탈출하기 직전인 것이 보였다.

아니, 이미 탈출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세아는 몸을 웅크려 상체를 가렸다. 그건 곧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걸 알리는 비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끄응···. 오빠, 사진 얌전히 줄 테니까 이제 꼬리 좀 풀어줘···. 진짜. 진짜로 더 참기 힘드니까."

"어? 으, 응."

내가 잡고 있던 지수의 꼬리를 풀어주자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다들 그 짧은 순간에 어찌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어지간해서는 가쁘게 내쉬지 않는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는 중이었다.

꼬리가 괴롭힘을 당한 탓에 기진맥진해진 지수. 그녀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채로 입을 열었다.

"헤엑··· 헥···, 세아 언니···. 제가 준 한복은 어딨어요?"

"하아··· 하아···, 응?"

"제가 준 한복 말이에요. 한복 대신 난생 처음 보는 바니걸을 입고 있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한복? 무슨 소리야?"

복도 벽에 등을 기대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던 세아가 의문을 표했다.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본 지수가 당황하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아침에 나가면서 예린이한테 언니에게 한복 좀 나 대신 전해··· 달라고···."

지수는 말을 하는 도중 뒷말을 흐렸다. 그러면서 예린을 바라보았다. 예린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작은 입을 벌렸다.

"아, 맞다! 깜빡했네! 언니, 미안해요!"

예린은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눈꼬리가 축 처진 걸 보니 정말로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린아, 너 그 손 내려 볼래?"

하지만 세아는 뒤에서 살랑거리는 예린의 꼬리를 보며 무언가 탐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 손을 내려보라고 말했다.

"미안하다니까요."

그리고 손이 내려간 예린은 킥킥 웃고 있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예린의 꼬리는 한층 더 신나게 살랑거렸다. 자신이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것에 잔뜩 신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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