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9 - 489. 외전 - 설 (7)
킥킥 웃는 예린의 모습에 나, 지수, 세아, 메이벨은 돌아가는 상황의 전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예린이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언니가 한복 말고 따로 준비한 게 있어 보여서 한복은 언니가 이벤트를 하고 난 다음에 전달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진짜에요!"
"예린이, 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던 세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잇기는커녕 황급히 주저앉아야만 했다.
"어어? 언니, 저한테 화내려는 거 아니죠? 옷 내려가요? 더 내려가요? 호잇!"
심상치 않은 기색을 풍기는 세아의 모습에 뒷걸음질을 친 예린이 정령들을 소환했기 때문이었다. 검성의 집을 강제로 점거하고 있는 초록 공룡이 그러는 것처럼 손짓으로 나타난 정령들은 세아의 옷을 물고 늘어졌다.
겨우 옷매무새를 정돈해서 소담한 가슴을 가릴 수 있게 된 옷은 정돈을 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꺅···!"
결국 세아는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옷이 더 내려가지 않게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정령들이 잡아당기는 힘이 생각보다 센 탓에 바니걸 옷은 점점 불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예린아! 옷 찢어져! 찢어진단 말이야···!"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세아의 안색과 옷이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을 때.
"그만, 그만. 예린아, 장난 그만 쳐."
나는 손뼉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정령들을 쫓아냈다. 우르르 나타났던 정령들은 우르르 사라졌다. 그러자 세아가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쉬었다.
"지수 너도 일어나."
꼬리가 강하게 잡혀 다리에 힘이 풀렸었던 지수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녀가 아직 꼬리가 잡힌 여파에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스위치가 완전히 올라가기 전에 꼬리를 풀어주었기에 쪽방의 용도가 바뀌지 않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만족할 때까지 나갈 수 없는 방이 될 뻔했다.
"괜찮아?"
"응···, 난 괜찮아···."
기운이 빠진 채로 답하는 세아. 일단 정령에게 시달린 그녀를 달래야 할 듯싶었다. 마침 사진도 내 손에 들어온 참이니 지수와 세아가 몸을 더 부대낄 필요도 없었고, 상황이 완전히 진정되었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우선 눈짓으로 지수와 예린을 내보냈다. 메이벨은 이미 루리를 데리고 지아가 자고 있는 방으로 피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따로 눈짓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뭔가 묘하게 내 의도를 읽고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수와 예린이 나가고 나와 세아만 남게 된 방. 우리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털썩 앉는 소리와 함께 세아가 몸을 내게 기댔다.
"하아···. 기운이 쭉 빠졌어···."
예전의 세아에게서는 로션이 피부에 배인 내음이 났다면 현재의 세아에게서는 분유에 가까운 우유 냄새가 났다. 루리와 지아. 아기들을 돌보면서 생긴 살내음이었다.
"현우야, 사진···."
"응?"
"사진 어딨어···."
세아가 힘없이 볼을 내 팔에 비비며 한 말이었다. 원래 머리에 씌워져 있던 토끼 귀 머리띠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뭔가 참 안쓰러워 보였다. 저 모습이 예린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한 지금의 세아와 겹쳐 보이는 탓일까.
"나한테 있지."
없어졌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왠지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네가 가지고 있어."
"어? 안 버리고?"
"괜히 버렸다가 예린이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이 주워가면 어떡해. 그렇다고 태우는 건 괜히 또 찜찜한 기분이 들게 만들고."
차라리 잘 되었다며 내가 잘 가지고 있으라 말하는 세아였다.
"알았어."
곧장 이어진 내 대답에 세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감싸안고 있던 내 팔을 풀어주며 일어났다. 이내 그녀가 걸음을 옮긴 곳은 서랍장 겸 간이 테이블의 역할을 하는 가구가 있는 곳이었다.
"현우야, 바니걸 이벤트는 폭삭 망했지만 이거라도 마셔. 미소 언니한테 갔다 오는 김에 한번 만들어 봤어."
세아는 서랍장에 들어있던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하얀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이었다.
"···그거 설마 우유야?"
나는 엘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소 몇 마리를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덩치는 어지간한 집채 못지 않은 녀석들이 순하기는 어찌나 순한지 사람을 매우 잘 따르는 소들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익숙한 듯 보이기도 했고.
그 소들을 구경하면서 겸사겸사 우유를 얻어온 모양이다.
"맞아. 우유야."
나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하얀 액체를 흔들어보았다. 물처럼 맑은 느낌을 주지만, 물보다는 살짝 점도가 있어 보이는 액체가 내 손짓에 따라 찰랑거린다.
유리 단면을 통해서 묘하게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젖을 짜낸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나 보다.
"양은 이게 다야? 다 같이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주먹만한 유리병을 간신히 채울 정도의 양. 덩치가 매우 큰 소의 젖을 짰다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적은 양이었다. 그게 아쉬웠다.
메이벨이 예전부터 우유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최근 들어서는 예린도 우유를 찾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게 다야. 그러니까 일단 현우 너 혼자만 마셔. 다음에는 진짜 우유 얻어와서 마시면 되니까."
그럼 내가 마시는 건 가짜 우유라는 말인가. 머릿속을 스치는 시답잖은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우유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세아가 두 손을 꼭 쥐고 바라보았다. 묘하게 집착성이 짙은 시선이 내 목울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꿀꺽-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않아서일까. 혀에 닿은 첫 맛은 묘하게 비린 맛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비린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소하고 단 맛이 입 안에 채워졌다.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닐 텐데 우유가 생각 이상으로 달았다.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우유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꿀꺽꿀꺽 우유를 마시는 사이에 세아가 입을 열었다.
"현우야, 나 약속 지켰다···? 내가 예전에 우유 먹여주겠다고 했었잖아."
"···약속?"
나는 묘한 어투에 의문을 표하며 우유병을 내려놓았다. 내용물은 이미 다 마신 상태였다. 애초에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어서 몇번 홀짝이는 것만으로도 다 마셔버린 것이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 안 나나 보네. 그럼 됐어. 우유 맛있었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진짜 달고 고소했어. 이거밖에 없어서 아쉬울 정도라니까."
"······나중에 또 줄게."
"응? 어어, 그럼 나야 좋지."
세아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허벅지를 비비적거렸다. 그러다가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뭔가 모텔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유를 모르는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그건 아직 입 안에서 맴도는 우유의 잔향에 의해 사라졌다.
"다 마셨으면 잠깐 나가 있어. 나 금방 옷 갈아입고 나갈게."
싱글싱글 웃고 있던 세아는 예린이 두고 간 한복을 가리켰다. 지수에게 끌려나간 예린이 남긴 옷이었다.
"알았어. 아, 예린이한테 너무 화내지는 마. 아니, 안 냈으면 좋겠어. 내가 따로 말할게."
"에이, 내가 애인가? 화 안 났고, 났다고 해도 네 덕분에 다 풀렸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그리고 내가 안하더라도 예린이는 이미 지수한테 한 소리 들었을 걸?"
그러니 나도 예린이에게 뭐라 할 필요가 없을 거라는 세아. 그녀는 밖에 나가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
밖으로 나가니 거실에는 예린이 손 들고 앉아 있었다. 입을 삐죽 내민 모양새는 지수에게 혼났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세아가 말한대로였다.
"오빠!"
예린이 나를 보자 반색하며 외쳤다. 슬그머니 팔도 내렸다.
"어쭈. 예린아, 지금 팔 내려갔는데?"
"어, 언니가 오빠 나올 때까지만 들고 있으라고 했잖아···."
꼬리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는 지수를 보며 소심한 반항을 하는 예린.
"팔 원위치."
"······."
"원위치."
"원위치···!"
예린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팔을 들어올렸고, 지수의 말을 따라 외쳤다. 그러면서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게 신속한 도움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너무 혼내지는 마. 장난이었다고 했으니까."
나는 직접 예린의 팔을 내려주었다.
"그래도 세아한테 짓궂은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말은 해야 한다? 다 장난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네···! 바로 사과할게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답한 예린은 팔이 얼얼한지 손으로 주물렀다. 혼자서 낑낑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녀의 팔을 대신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예린의 굳은 팔을 풀어주는 모습을 본 지수가 투덜거렸다. 꼬리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바닥을 세게 탁탁 두드렸다.
"오빠는 예린이한테 너무 물러. 이러면 나만 나쁜 사람 되는 거 같잖아."
"지수 네 덕분에 내가 이 정도만 할 수 있는 거지. 자, 너도 주물러줄게."
나는 지수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으로 그녀를 달랬다. 내가 예린이에게 무르다는 건 사실이긴 하나, 그건 지수가 있는 덕분이었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지수가 잘못된 점을 알려주니 말이다.
예린도 눈치껏 지수의 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 야무지게 근육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었다.
"꼬리는 어때? 많이 아파? 미안해, 꽉 잡아서."
"···꼬리는 괜찮아. 정 미안하면 오늘- 아니, 오늘은 안되고, 내일 모레 나랑 같이 방 들어가던가."
"······."
위험을 회피했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만족할 때까지 못 나가는 방의 위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