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90화 (491/497)

Chapter 490 - 490. 외전 - 설 (8)

뭐라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구해준 건 세아였다.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녀를 본 예린이 꾹꾹이를 하다 말고 곧장 뛰쳐나가서 지수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언니! 한복 진짜 잘 어울려요!"

예린의 말대로 한복은 세아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푸른 하늘을 품은 지수의 한복과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시스루 재질의 옷감이 날개옷마냥 상의를 뒤덮고 있었고, 그 날개옷이 가슴가리개와 치마 말기를 가려주는 형식이었는데, 유독 특정 부위가 도드라졌다.

노출이 어느 정도 있는 상의와 달리 치마는 폭이 넓어 노출이 하나도 없었다. 발목을 최대한 가리려는 모양새였다.

"그래? 고마워."

칭찬을 들은 세아는 부끄럽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 그리고 심한 장난 쳐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에이, 아냐. 언니 화 하나도 안 났어."

예린과 세아는 잠시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사실 화해라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 정말 화가 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세아는 예린이 입은 한복을 보며 상황에 밀려나 미처 하지 못했던 감상을 건넸다. 그녀의 시선이 예린의 한복을 이곳저곳 살폈다.

"근데 예린아,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가슴은 왜 이렇게 세게 조였어? 엄청 답답할 것 같은데."

"···갑자기 언니가 미워지려고 해요. 사실대로 말해요. 언니 아직 저한테 화났죠? 맞죠?"

"뭐? 아니야! 왜 그런 말을 해?"

"몰라요. 세상이 미워요. 왜 하늘은 세아 언니, 지수 언니, 메이벨 언니를 낳고 나를 낳은 거야···!"

신나게 뛰어나갔던 예린은 풀이 잔뜩 죽은 채로 돌아오게 되었다. 좀만 더 크면 두고 보라거나, 잘 크면 지수 언니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다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세아는 그런 예린을 이해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싶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예린아, 그래서 뭐 하자고 했던 거야? 아까 우리한테 뭐 하자고 했었잖아."

"···저희 윷놀이해요! 둘씩 짝지어서 팀전으로!"

예린은 애써 기운을 회복한 후 외쳤다. 그녀의 꼬리도 아직 삐걱거리긴 하지만, 다시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둘씩 팀이면 4명밖에 못하잖아. 우린 5명인데."

"아, 오빠. 나 빼고 해. 그럼 딱 맞겠네. 마침 루리랑 지아 밥 먹을 시간이라서. 세아 언니가 먼저 줬으니까 이제 내 차례거든."

지수는 저고리를 풀면서 루리와 지아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지수를 빼고 소란에 고개를 빼꼼 내민 메이벨을 납치해서 나, 예린, 세아, 메이벨. 총 4명의 윷놀이 참가가 결정되었다.

"윷놀이? 갑자기?"

아이들을 돌보다 끌려나온 메이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랑 같은 팀을 한다는 소리에 헤헤 웃으면서 마냥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세아와 예린은 자연스럽게 한 팀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건 세아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다 같이 한복을 입고 윷놀이 판을 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묘하게 가슴 한 켠이 간질거렸다. 매일 같이 보는 일상에 살짝 변화를 주었을 뿐인데도, 신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나, 한복 잘 어울리네. 이쁘다."

"그래? 다행이다!"

메이벨도 어느새 한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복이 마음에 든 듯 히히 웃고 있었다. 잔뜩 좋아진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팔을 꽉 끌어안고 있는 건 덤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집 안에는 돌풍이 불었을 것이다. 옆에서 둥둥 떠다니는 부유 수정이 그걸 증명했다. 수정은 춤을 추는 것마냥 몸을 흔들고 있었으니까.

"세팅 완료! 다들 룰은 말 안해도 알죠? 벌칙 칸이나 다른 이상한 규칙없이 순수하게 클래식으로 승부를 보는 거에요."

"룰은 다 알지. 어려운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윷놀이 판이 열리긴 했으나, 그저 오늘이 설이니 그러려니 했다. 창고 구석에 박혀 있다가 구출된 것인지 윷이 보관되고 있던 상자는 잔뜩 헤지고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다행히 윷의 상태는 멀쩡했다.

"그리고 진 팀은 이긴 팀 소원 들어주는 거에요!"

"소원?"

툭 튀어나온 소원 이야기에 우리는 너 나 할 것없이 의문을 표했다. 소원 들어주기라니.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게 나쁘지 않을 듯했다. 오히려 좋았다.

자고로 게임이란, 어떤 특별한 보상이 걸려 있어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막 하늘에 있는 별을 따달라거나 그건 불가능한 소원은 당연히 안돼요! 딱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그래, 좋아. 그냥 게임만 하기에는 밋밋하지."

나, 메이벨, 세아, 예린은 각자 전의를 다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가 먼저 던질게요!"

예린이 윷을 위로 던졌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윷들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걸이 되었다. 한번 더 던질 수 있는 윷이나 모를 제외하면 가장 좋은 수. 예린은 말을 3칸 앞으로 움직였다.

"다음은 나네."

시계 방향으로 돌기로 했으니 예린 다음 차례는 나였다. 방금 전 예린이 그랬듯이 나도 윷을 위로 던졌다. 낙이 되지 않도록 모아 던진 윷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어? 처음부터 모?'

감각이 좋은 나였기에 곧 나올 결과가 전부 뒷면인 모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한번 더 던질 준비를 하며 윷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뭐야. 도?"

윷은 모가 아니라 하나가 앞면이고, 나머지가 뒷면인 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분명 모가 확실했는데 계산을 잘못한 것인지 마지막에 윷 하나가 몸을 데굴 굴린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떠도 모가 아닌 도라는 건 변하지 않는 현실. 결국 나는 말을 한 칸만 이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초라한 전진이었다.

이어지는 세아 차례. 그녀는 신중한 표정으로 윳을 던졌다.

'저건 걸이네.'

그리 생각한 것과 동시에 나온 건 걸이 아닌 윷이었다.

"······?"

한번 잘못 볼 수는 있어도 두 번 잘못 보기는 힘들었다. 허나, 지금 나는 벌써 두번이나 틀렸다. 그것도 연속으로.

"와! 윷이야!"

"잘했어요, 언니! 얼른 한번 더 던져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세아와 예린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아직 한바퀴를 완주한 말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윷을 한번 더 던진 세아는 무난한 개를 뽑았다. 착착, 세아의 말은 최선두를 달리며 거리를 크게 벌렸다.

"도!"

누나는 도를 뽑았다. 나오기 힘든 도가 우리 차례에 두번 연속으로 나왔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한데, 메이벨은 나와 똑같은 도가 나왔다는 것에 그저 좋아할 따름이었다.

"현우한테 업혀야지~."

그녀는 자신의 말을 한칸 앞으로 움직여 내게 업혔다. 이로써 우리는 둘이서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내심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이에, 차례는 계속해서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그리고 차례가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나와 메이벨의 차례일 때 던진 윷은 생각보다 낮은 수가 나왔고, 힘겹게 전진한 말은 세아와 예린의 차례일 때 족족 잡혀버렸다.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우리는 4개의 말 중 하나만이 한바퀴를 겨우 완주했고, 상대팀은 4개의 말 중 단 하나만이 남아 결승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

"······."

그쯤되니 마냥 웃고만 있던 메이벨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고 있어서 심술이 난 것 아니었다. 단순히 전부 우리 운이 나쁘다는 걸로 치부하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어떤 수작이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현우야, 소원 들어줄 준비해."

"···아직 게임 안 끝났어."

"앞으로 윷이나 모만 계속 뽑으면 모를까 이 차이를 어떻게 이겨? 이 게임은 우리가 이겼지."

심각한 표정으로 판을 내려다보는 나를 보며 얄미운 웃음을 터트리는 세아와 예린.

"오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상대가 저잖아요. 제가 이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예린의 차례. 여기서 그녀가 걸만 뽑아도 나와 누나의 패배였다. 나와 누나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속에서 예린이 윷을 던졌다.

예린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동작 그만."

누나가 기어코 칼을 빼 들었다.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윷들을 부유 수정의 힘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윷들은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태로 멈췄다.

"어? 뭐, 뭐에요! 이거 반칙이잖아요!"

예린이 펄쩍 뛰며 항의했다.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어허! 말은 바로 해야지. 반칙은 예린이 네가 계속 썼잖아. 그것도 한번에 그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한두 번이면 봐주려고 했는데, 반칙을 계속 쓰는 건 너무하잖아."

메이벨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예린이 한 반칙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우리 차례일 때 재채기를 하는 척 바람을 불어 윷의 방향을 미묘하게 틀었다던가, 그래서 잘 나올 것도 불리하게 나오도록 만든다던가, 반대로 자신들의 차례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을 시켜서 수가 잘 나오도록, 혹은 유리하게 나오도록 윷을 뒤집는다던가.

여러 반칙 행위들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예린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사실 누나가 말한 예린의 반칙 행위들을 제대로 눈치챈 순간부터, 나도 그에 질세라 바닥을 톡 건드려서 땅울림으로 윷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었다. 하지만 메이벨이 옆에서 준 신호에 그만두고 말았다.

"즈, 증거 있어요? 지금 생사람 잡는 거에요!"

"증거는 바로 여기 있지."

메이벨은 허공에 떠 있는 윷을 툭 건드렸다. 가벼운 딱밤에 불과했지만, 그건 윷 안에 숨어있는 정령을 튀어나오게 만드는데 충분한 위력이었다. 윷 안에 숨어있던 정령이 딱밤에 밀려나 데굴데굴 굴렀다.

[애, 애앵···! 삐애애앵···!]

겨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멈춘 작은 정령이 입을 벌리며 울음 소리를 내뱉었다.

나름 포효를 내질러서 자기 나름대로 반항을 하는 것 같았으나, 우리 눈에는 한번만 봐달라는 애처로운 몸짓으로 보일 뿐이었다.

손톱만한 정령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언니! 애한테 왜 그래요! 지금 애기 정령이 기 죽었잖아요."

같은 팀이라고 예린을 감싸는 세아였다. 아니, 이제 보니 예린이 시키는대로 움직였을 뿐인 정령을 감싸는 세아였다.

"아니, 세아 언니···! 언니는 저를 지켜줘야죠! 언니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우리 좋았잖아요!"

예린은 세아의 태도에 반색했다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느새 부푼 꼬리털도 파르르 떨렸다.

"미안. 그냥 네가 따로 준비한 게 있어 보이길래 장단 좀 맞춰준 거야. 들키지 않으면 끝까지 맞춰주려고 했는데,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지. 아, 게임은 재밌었어."

"역시 화난 게 맞았잖아요! 너무해!"

믿었던 팀원의 배신, 들통난 반칙 행위. 예린에게 있어서 완전히 외통수인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시선을 우리에게 향했다. 예린의 꼬리털이 좀 더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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