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491화 (492/497)

Chapter 491 - 491. 외전 - 설 (9)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튀어나오자 예린은 결국 반칙을 썼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사실 반칙 썼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아두세요. 고양이는 윷놀이 판을 찢어요."

그녀는 궁지에 몰린 쥐- 아니,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꼬리털도 점점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부피를 키워나가는 그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만 좀 찢어. 예전부터 뭘 자꾸 그렇게 찢는대. 사람도 찢는다 그랬었고. 그건 이미 고양이 범주가 아니잖아."

"오빠, 원래 고양이들이 가구 박살내는 거 몰라요?"

"너는 사람이잖아."

"야옹-. 지금은 고양이에요. 그리고 고양이는 아주 빠르죠."

그리 말한 것과 동시에 예린은 순간 몸을 뒤로 날려서 도망갔다. 아니, 도망갔을 것이다. 도중에 세아와 메이벨이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익! 이거 놔요!"

고양이가 아주 빠른 것처럼 예린도 아주 빨랐다. 허나, 세아와 메이벨이 덫을 놓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채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대롱대롱 들리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리려는 다리는 그저 허공을 허우적거릴 수만 있었다.

[삐애앵···!]

예린이 윷에 심어 놓은 꼬마 정령은 도망가지 못한 예린을 보며 비통한 울음 소리를 토해냈다.

"어딜 도망가려고 해. 반칙을 썼으면, 벌칙을 받아야지. 그게 기본 규칙이잖아."

"···벌칙?"

"자, 지금부터 생전 고양이인 예린의 벌칙 매드무비가 있겠습니다. 다들 착석해주세요."

세아는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린의 옆구리에 손을 올렸다. 자연스레 예린의 눈은 더욱 불안해졌다. 곧 닥칠 상황을 직감한 듯 동공이 크게 커지기까지 했다.

[삐-! 애, 애앵······]

예린을 보며 울음 소리를 토해내던 정령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시, 싫━ 끄아아아앙···!"

뭐라 말하려던 예린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바닥을 뒹굴었다. 세아가 오늘 느꼈던 창피함을 전부 풀려는 것처럼 예린의 옆구리를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

"꺄하하하하핳! 그, 그만···! 꺄하하핳! 잘못, 했어요···! 한복 늦게 준 것도···! 반칙 쓴 것도···!"

예린은 속절없이 당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신나서 웃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의해 강제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기에 중간중간 힘들어하는 신음도 섞여 있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사람의 말로였다.

"그마안···! 잘못- ···했다구요···! 흐웃! 언니, 제발···!"

예린의 간절한 애원에도 세아의 손가락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급한대로 세아의 손을 붙잡아서 멈추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체구 차이와 아래에 깔려 있다는 위치의 특성상 예린은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손으로 붙잡았다고 하기보다는 손을 얹어놓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가뜩이나 몸에 힘이 쭉 빠진 상태라 더욱 그러했다. 한마디로 의미없는 저항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꺄하하핳···! 우욱···, 꺄하핳!"

그러는 사이에도 간지럼은 계속 이어졌고, 예린은 발버둥치면서 원치 않는 자극에 발을 오므렸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짧은 한복 치마가 위로 말려 올라가는 일이 발생했으나, 그건 세아의 폭 넓은 치마에 의해 가려졌다.

보이는 건 종아리까지 드러난 다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모습이었다. 발이 애타게 바닥을 밀어내는 듯한 몸짓도 보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 아···. ······아."

바들바들 떠는 손이 도움을 바라는 듯이 뻗어졌다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제서야 세아는 속이 후련해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헥···, 헤엑···. 그마안···. 흑, 흐윽···."

흐느끼는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는 예린. 약한 부위를 강제로 자극당한 그녀는 지금 기절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멍하니 천장을 보는 눈은 풀려 있었고, 부풀었던 꼬리털은 어느새 기가 죽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예린은 이제 그만 해달라며, 잘못 했다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망가진 인형이 되고 말았다. 오래 지속된 웃음에 눈물샘이 자극을 받았는지 눈물 자국이 보이는 인형이었다.

"너무 심하게 괴롭힌 거 아니야?"

메이벨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세아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세아도 망가진 예린을 보더니 그제서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미안한 표정 한 켠에는 숨길 수 없는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벼르고 벼르다 쌓인 한이 한번에 터진 모양이었다.

"···예린아, 괜찮아?"

나는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는 예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미리 떠다 놓은 물 한잔을 건넸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예린의 얼굴을 살살 닦아주었다.

그 잠깐 사이에 엉망진창으로 당한 그녀는 땀에 푹 젖어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부드러운 옷감으로 이루어진 한복이 땀에 젖으니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오빠···, 역시 절 생각해주는 건 오빠밖에 없어요···."

땀이 송골송골 맺힌 탓에 이마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자 예린이 한 말이었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낯빛을 한 채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으힛-, 흐히힣."

예린은 숨을 고르는 한편, 푼수같은 웃음을 흘렸다. 하도 간지럼을 당하다 보니 그 감각이 몸에 각인이 되었고, 그 탓에 아무런 자극이 가해지지 않아도 웃음이 뜬금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방심을 틈타 나도 한번 간지럽혀볼까 생각했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까지 그런 행동을 하면 예린이 왕-하고 울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내가 도중에 태도가 돌변해서 자신을 간지럽히지 않을까 살짝 경계를 하던 예린은 이내 경계를 완전히 풀고 내가 건넨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이 많이 탔는지 시원하게도 마셨다. 컵이 작은 것도 아니건만, 물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푸하!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고마워요, 오빠."

그녀는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속이 좀 진정되었는지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던 웃음을 그쳤다.

"후아···."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안정을 되찾은 예린.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던 그녀의 꼬리도 조금이지만 기운을 얻었다.

"예린아, 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반칙까지 쓴 거야?"

나뿐만 아니라 세아와 메이벨도 그건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비밀이에요."

예린은 그녀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세아가 다시 손을 들었다. 예린을 망가트렸던 손이었다. 그리고 단숨에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는 손이기도 했다.

"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에요···."

자동 반사로 몸을 바싹 웅크려 옆구리를 보호한 예린은 이것만큼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며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도 단호하게 말하는 통에 우리는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반칙을 쓰면서까지 이겨서 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굳이 게임의 보상인 소원이라는 형태로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냥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지.

'처음부터 이길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그리 생각하자 옆에 있던 누나가 뜬금없이 킥킥거리면서 말했다.

"거짓말."

"응? 뭔 소리야? 거짓말이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메이벨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의문을 담아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때.

"다 놀았어? 해 지는데 슬슬 저녁 준비하자. 나 배고파."

지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루리와 지아를 돌보면서 잠시 눈을 붙였던 듯 그녀는 눈가를 비볐다. 승자가 없는 윷놀이 게임이, 예린의 벌칙 시간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꺄! 빠빠빠! 부부-!"

푹 자고 일어난 지아가 루리와 함께 옹알이를 했다. 투명한 금안이 우리를 보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고, 착 접혀 있는 귀를 피려는 듯 얼굴에 힘을 주기도 했다.

"그래, 알았어. 지금부터 준비하면 딱 맞겠다."

주홍빛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거실. 우리는 다 같이 부엌으로 이동해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탁탁탁-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코 끝을 자극하는 떡국 냄새가 퍼졌다.

일어날 힘이 없어 드러누워 있던 예린이 그 냄새를 맡고 몸을 일으켰고, 식탁에 수저를 놓았다.

아기 전용 의자에 앉은 루리와 지아는 자신들 앞을 지나다니는 나, 지수, 예린, 세아, 메이벨을 구경했다.

"아부! 바바!"

단순히 왔다갔다 하는 것뿐인데, 질리지도 않는지 우리를 따라 투명한 눈망울을 실룩실룩 움직였다. 눈을 아주 똘망똘망하게 뜬 것이 엄청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식사 준비를 끝냈다.

"잘 먹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밥을 먹기 전에 하는 말을 다 같이 외치며 수저를 들었다. 루리와 지아는 수저를 드는 대신에 손뼉을 짝짝 쳤다.

"오늘 나는, 한 살을 더 먹는다···!"

맑은 아기 웃음 소리와 함께 이어진 비장한 선언. 예린은 그 말과 동시에 떡국을 들이켰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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