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2 - 492. 외전 - 설 (10)
저녁 식사 시간은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떡국을 단숨에 들이킨 예린이 난리를 피웠다는 점을 빼면 단란하게 지나갔다.
뜨거운 떡국에 혀를 데인 예린.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채로 혀를 살짝 내밀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혀만 살짝 데였을 뿐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난 후, 설거지도 순식간에 해치운 나는 샤워와 환복을 빠르게 마쳤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니 오늘 하루 몸에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풀린 몸을 이끌고 거실로 움직이니, 그곳에서는 상의를 살짝 풀어헤친 지수가 지아를 안고 있었다.
"오빠, 빨리 나왔네? 그럼 나 바로 씻으러 갈 테니까 대신 지아 등 좀 쓸어주라. 방금 밥 먹어서 소화시켜야 해."
"그래, 알았어."
나는 지수에게서 지아를 조심스럽게 건네 받았다. 반나절 동안 잠을 잔 지아는 자신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다.
"루리는? 지금 씻고 있나?"
"응, 지금 루리 씻기는 겸해서 언니들도 목욕하고 있어. 원래 나랑 지아도 같이 들어갔어야 했는데,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길래 나만 남아서 밥 먹인 거야."
내가 씻고 나오는 동안 우리 공주님이 배가 고프셨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은 배가 충분히 부른 상태라 칭얼거리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빵긋빵긋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지수에게 걱정 말고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아의 말랑한 볼을 콕 찌른 지수는 잠시 바라보다가 픽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내 세아와 루리가 씻고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자, 소화시키자~."
"꺄우!"
내가 한 말을 알아들은 건지 의미 모를 소리를 낸 지아. 나는 지아의 작은 머리를 옆으로 향하게 만든 후, 어깨에 살짝 걸쳤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아기에 체온이 전해진다. 온전히 내게 몸을 맡겼다는 증거인 무게감도 같이.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세상에는 더 이상 과거의 눈부신 야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빼곡하게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도, 24시간 꺼지지 않는 빌딩의 불빛도, 시끌벅적한 번화가의 네온 사인 간판 불빛도, 규칙적으로 바뀌며 길을 알려주는 신호등의 불빛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빛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맑은 밤하늘에 수없이 수놓인 별들이 제각기 빛을 내고 있었으니까. 사그라든 지상의 빛을 대신하겠다는 듯 수많은 별들이 내는 빛 말이다.
밤이 되면 주변은 더욱 조용해진다. 바깥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매우 나아진 편이었다. 1년 전, 사태가 종료된 지 채 4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는 조용한 것을 넘어 적막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잠자리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변종들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그동안 몸에 학습된 기억이 밤에는 조용하게 지내도록 만들었던 것 같았다.
1년 전에 비해 현재는 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난 상황. 검은 입자에 의해 변형된 변종들은 없더라도, 거대화된 야생 동물들이 인근 지역에서 간혹 출몰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야행성인 동물을 노리고 밤에 사냥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밤거리를 불로 밝히기도 했다. 밤을 밝히는 불의 종류는 대체로 모닥불이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구해온 드럼통 안에 장작을 집어넣고 피우는 불이었다. 간혹 희귀한 자원 채집을 위해 난쟁이들이 따라 붙는다면 수정을 이용한 랜턴으로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기도 하지만, 그 빈도는 적었다.
어찌되었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주변을 둘러싼 위험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루리가, 지아가 점점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세상 또한 점점 안정되겠지. 나는 오늘도 열심히 성장한 아이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귓가에 들리는 지아의 숨소리를 가슴에 담으면서, 내 몸에 전해지는 아이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천천히 지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과식을 했다면 토를 할 수도 있으니 수시로 지아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윽고.
"끅-."
지아의 입이 살짝 벌어지면서 우유 비린내가 나는 트림이 나왔다. 자세도 어긋나지 않고, 등을 최대한 부드럽게 쓸어준 덕분일까. 게워낸 자국은 없었다.
"꺄! 빠! 부!"
내게 안긴 상태인 지아가 기분이 좋은지 통통한 팔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가 너무 흔들리지 않도록 살짝 잡아주었다.
"왜 이렇게 신났어? 배 불러서 기분 좋아?"
"바!"
지아는 그렇다고 말하는 듯이 입을 벌렸다.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젖살로 이루어진 볼이 더욱 빵빵해진다.
내가 지아의 말랑한 볼을 콕 찌르자, 지아도 나를 따라하겠다는 듯 고사리 같은 손은 내 볼에 착 올렸다. 손을 파닥거리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손이 내 볼에 닿은 것이겠지만, 뭔가 통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 두개는커녕, 겨우 하나를 쥘 수 있는 지아의 손은 통통한 볼보다는 아니더라도 매우 말랑했다. 아이가 가진 특유의 젖살이 주는 보들보들한 느낌은 아무리 만져도 질리지가 않았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몇번 이상 만지는 순간, 귀찮게 하지 말라고 바로 울어버릴 텐데, 지아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애초에 잘 울지도 않았고.
볼도, 배도, 손도 다 마음대로 만지도록 해주는 아주 통이 큰 아기인 것이다. 심지어 귀와 꼬리도 어느 정도는 만지게 해주었다.
물론, 선은 지켜야 한다. 지아의 볼이 아무리 말랑한 모찌같다고 해도 쮸와압 빨아들이면 울어버리고 마니까.
이건 내 경험담이 아니라 지수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어느 때처럼 지아와 체온을 나누고 있던 지수가 뜬금없이 지아의 볼을 입술로 앙 물었을 때, 해맑게 웃고 있던 지아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바꾸더니 순식간에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크고, 서럽게 울던지. 그 전까지 사실 우리 아이들은 우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했던 생각들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정도였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지아를 본 지수는 당황했고, 지아를 달래는데 아주 진땀을 빼야 했었다.
그때 지아가 왜 울음을 터트렸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믿었던 엄마가 자기를 잡아먹는다고 생각한 건가?'
입술로 무는 장난이긴 했지만, 그게 아이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거니까. 울음에 서러움이 매우 많이 담겨 있었으니 내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 생각하며 지아를 바라보니, 지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그냥 내 표정을 따라한 모양이다. 맑은 금안에 내 표정이 그대로 비춰져 있어서 알 수 있었다. 표정을 푸니 지아도 따라 표정을 풀었다.
'이대로만 크자.'
최고의 엄마아빠는 아니지만, 좋은 엄마아빠가 되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바라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그냥 딱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나머지는 내가 다 해결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빠, 지아 데리고 와줘! 이제 지아만 씻으면 돼!"
이마를 맞대거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는 것으로 지아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의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지수의 목소리였다.
"···엄마가 부른다. 우리 공주님, 이제 씻으러 갈까?"
"아바! 바바바바!"
지수의 목소리에 반응한 지아. 아이는 기분 좋다는 것을 티내기라도 하는 듯 꼬리를 바들바들 세웠다. 아직 꼬리의 신경이 활발하게 활성화되는 시기가 아니라 살랑거리는 건 무리인가 보다.
"그래그래, 얼른 엄마한테 가자."
나는 꼴에 꼬리라고 일자로 선 지아의 작은 꼬리를 보며 킥킥 웃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일매일 보기는 하나, 이제 곧 지아를 품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뭇내 아쉬워서.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결국 목적지에 다다르는 법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온 나를 지수가 지아를 능숙하게 건네 받았다. 초보 엄마 지수의 자랑거리인 능숙하게 안기가 시전된 것이다.
"지아 트림 잘 했어?"
"어, 제대로 했고 토하지도 않았어."
"오구. 잘했어요, 우리 딸. 오빠도 잘했어. 이제 지아는 내가 맡을 테니까 오빠는 방에 가서 쉬고 있어."
세아, 루리, 예린, 메이벨은 벌써 방에 가서 쉬고 있다고 말한 지수. 그녀는 아기 전용 등받이 욕조에 담긴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안 도와줘도 돼?"
"응, 나 혼자서도 충분해. 세아 언니는 지금 다른 방에서 루리 기저귀 갈고 있을 테니까 오빠는 먼저 침실로 가 있어."
그녀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말과 함께 나를 밀어냈다. 지아도 잘 가라는 듯 팔을 흔들었다.
"오빠. 내일- 아니, 내일 모레 보자."
이해할 수 없는 지수의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도착한 방.
그곳에서는 이불 뭉치가, 정확히는 이불 뭉치로 변한 누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