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원치 않았던 퀘스트
전혀 달갑지 않은 퀘스트다.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냐고? 그럴 리가!
‘보상은 눈 돌아갈 정도로 좋다만…….’
3천 골드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약 360만 원이다. 이는 내가 40일가량을 하루도 쉬지 않고 노가다 뛰어야 얻을 수 있는 수익에 가까운 가치였으니 굉장히 탐이 났다.
하지만 이보다 더 대단한 것은 백작의 사위라는 지위였다.
모든 능력치 +20!
내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스탯은 근력, 체력, 민첩, 지력, 손재주, 평정, 불굴, 위엄, 통찰력으로 총 9가지다. 거기에 품위라는 스탯까지 더해지면 총 10가지가 된다.
이 모든 스탯들을 각 20씩 플러스시켜 준다면, 나는 총 200의 스탯을 얻게 되는 셈이다.
레벨을 하나 올릴 때마다 얻을 수 있는 스탯 포인트는 10개이니, 200의 스탯은 20레벨의 가치가 된다. 덤으로 예쁜 귀족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할 수도 있다 하니 참으로 훌륭한 보상이 아닐 수가 없다.
‘출셋길도 열릴 테지. 하지만…….’
이만큼 보상이 좋은 이유는 바로 고난이도의 퀘스트이기 때문이다.
무려 S급 퀘스트!
‘아슈르 백작의 분노’도 S급 퀘스트였다.
그 퀘스트를 받을 당시의 나는 79레벨이었지만, 난이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퀘스트 진행 중 수십 번을 넘게 죽고 73레벨까지 떨어졌었다.
그리고 소요한 시간은 자그마치 세 달!
-1레벨인 현재 나의 능력으로는 시간제한까지 걸려 있는 S급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단이 전혀 없다. 실패할 게 뻔한 퀘스트를 무엇하러 수락하겠는가?
‘게다가 실패하면 마이너스 2레벨.’
레벨이 -3으로 떨어질 것을 상상하자 두려움과 분노로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근데 도대체 왜 S급 퀘스트가 또 내게?’
S급 퀘스트는 결코 흔히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레벨 200이 넘는 최상위 랭커들조차도 지난 1년간 S급 퀘스트를 받은 횟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방송 인터뷰에서 밝혔던 바가 있다.
한데 난 고렙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은 -1레벨인데 또 S급 퀘스트를 받게 되었으니 의문이다.
나는 도란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야탄의 신전에는 악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지. 하여 평범한 사람들은 잠시만 머물러도 공포에 빠지지 않나? 하지만 내가 관찰해 보니 자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멀쩡하더군. 혼자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아 여유까지 느껴지던데. 자네, 사실은 엄청난 실력자지?’
이 대사에 힌트가 있었다.
일정 시간 이상 야탄의 신전에 머물면서 공포 상태에 빠지지 않는 조건을 충족시켜서 생성된 퀘스트인 듯하다.
이는 상태 이상에 걸릴 확률을 낮춰 준다는 내 칭호 특성과 평정 스탯이 만들어 낸 결과일 터.
좋냐고? 좋겠냐?
‘만약에 강제 발동 퀘스트였으면 난 또 엿 먹었던 거잖아? 이 정신 나간 칭호 특성하고 평정 스탯이 사람 게임 접게 만들려고 안달 났네.’
나는 일고의 고민 없이 답했다.
“난 안 해요. 다른 사람 알아보쇼.”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단칼에 거절했지만 도란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네만 한 인물은 흔치가 않다네.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고 부디 날 도와주게나.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관련된 일일세!”
[도란은 필사적입니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이해하고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개념 상실한 알림창이다. 지금 내가 남의 사정 봐줄 입장으로 보이는가?
나는 눈앞에 뜬 알림창을 곧장 지워 버리고 말했다.
“착각하는 겁니다. 난 약해 빠졌고 무능력한 놈이라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줘요. 그리 알고 혼자 알아서 하쇼.”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야탄의 신도들은 강력한 흑마술을 사용한단 말일세!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로부터 영애를 구출할 수가 없다네! 부디 외면하지 말고 힘을 보태 주시게!”
[도란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난 능력이 없다니깐…….”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너무 겸손하군! 이곳에서 일말의 공포심도 느끼지 않는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어디 흔한 줄 아는가?”
[도란은 당신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가끔 이렇게 끈질기게 나오는 퀘스트 NPC가 존재한다. 저들만의 사정과 사연이 있으니 필사적인 것이다.
그래, 난 지금도 도란의 심정을 이해는 하고 있다. 모시는 주인의 딸내미를 구하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자기도 목이 날아갈 테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내 사정은? 도와줬다가 실패해서 레벨이 또 떨어진다면?
내가 왜 남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 생판 모르는 남보다야 나 자신이 더 중요한 게 당연한 삶의 이치 아닌가! 애초에 도와줄 능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
“부디 도와주시게! 내 이렇게 부탁함세!”
도란은 급기야 무릎까지 꿇었다.
나는 그를 보며 확신했다.
이 인간, 여태까지 내가 한 말을 모두 한쪽 귀로 흘리고 있다.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거나.
‘아무래도 후자겠지. 야탄의 신전에 머물면서 공포 효과에 빠지지 않는 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인 건가? 그 전에 와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네.’
나는 도란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로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내겐 정말로 힘이 부족합니다. 도와줄 수 없다고요.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백작가에 연락해서 원군을 요청해요.”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일세! 백작가에 원군을 요청하러 가는 사이에 영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단 말이네! 내가 의지할 사람은 자네뿐일세! 제발 부탁하네!”
[도란은 구원의 손길을 바라고 있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인내심의 한계다.
“아오, 이 답답한 양반아!! 진짜로 못 도와준다니까? 꼴 보기 싫으니까 저리 가!!”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게!”
“어쭈? 안 가? 젠장. 그래, 차라리 내가 간다. 내가 가!!!”
나는 다시 한 번 퀘스트를 거부하면서 도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실패 시 -2레벨이 돼 버리는 무시무시한 퀘스트, 혹 실수로라도 수락하게 될까 두려워서 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발은 그런 내 마음과 달리 빠르게 움직여 주질 않았다.
소지 무게 한도를 200퍼센트 이상 초과한 탓에 이동속도가 100퍼센트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거북이처럼 느린 내 발걸음을 본 도란이 엄청난 오해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자네, 말은 모질게 하면서도 실은 갈등하고 있었군……. 나를 도와 영애를 구출할지, 말지…….”
“…….”
“갈등은 그만두고 어서 도와주시게!”
[희망을 품은 도란이 다시 부탁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헛소리! 못 도와줘!”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 속도는 변함없이 느렸다.
이를 본 도란의 오해는 깊어만 갔다.
“아무래도 굉장히 바쁜 일이 있기에 갈등하는가 본데, 그래도 사람 목숨 달린 일보다야 중요한 일이겠는가? 제발 부탁함세!!”
“못한다고! 못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시게! 사실은 자네도 고뇌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당장 떠나지 못하고, 걸음에는 망설임이 담긴 게 아닌가!”
“망설임은 개뿔! 그래서 천천히 걷는 게 아니야! 짐이 무거워서 그럴 뿐이지!”
도란은 계속해서 쫓아왔고, 나의 느린 걸음은 도무지 그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퀘스트를…….]
‘뭐 이런 병신 같은 경우가!’
나는 아무리 거절해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면서 점차 초조해졌다. 과감한 결단을 내릴 때다.
‘이렇게 계속 끌려 다닐 순 없어. 그래, 저 녀석과 적대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완강하게 거절하자. 어차피 지속적으로 친분을 쌓아야 할 NPC도 아니니까 적대해 봤자 손해도 없을 거야.’
나는 마몬의 대검을 뽑아 들며 도란을 노려보았다.
“난 분명히 못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둘 중 하난 다칠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도란도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겠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난 정말로 자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도란이 마지막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울컥!
이 빌어먹을 알림창은 대체 몇 번이나 떠야지 직성이 풀리는 거야!
“못 도와줘! 설령 도와줄 수 있더라도 안 도와줘! 안 도와준다고!!”
한계치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더 이상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함을 내지르면서 마몬의 대검을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도란에게 마지막으로 확실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콰작!!
“카악!”
묵직한 타격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오더니 동시에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옆으로 힘껏 돌아가 있는 대검의 검신을 좇아 시선을 돌려 보았다.
그리고 목격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야탄의 신도가 내 대검에 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풀썩 쓰러지고 있는 장면을.
불길함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정신 나간 새끼는 길을 다녀도 왜 하필 칼부림 치는 사람 옆으로…….”
거품 물고 쓰러져 있는 놈을 노려보고 있자니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야탄 교단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야탄의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야탄의 신도들은 당신을 발견할 시 살해할 것입니다.]
신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나는 어느새 수십 명의 야탄의 신도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고, 도란은 멍하니 서 있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고맙네!!”
“어?”
<백작 영애 구출>
난이도:S
스테임 백작의 외동딸 아이린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다. 야탄의 신도들은 신성한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아이린을 이곳 지하로 납치해 왔다.
야탄교를 적대하는 당신은 야탄교의 악행을 용납할 수 없다. 반드시 아이린을 구출해 낼 각오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퀘스트 수락 후 1시간 이내에 아이린을 구출.
클리어 보상:3천 골드, 낮은 확률로 백작의 사위.
*백작의 사위:품위 능력치 개방, 모든 능력치 +20.
백작 영애를 신부로 맞이하여 자작으로 대우받습니다. 권력과 명예가 상승합니다. 귀족들의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매달 품위 유지비를 받습니다. 고위직, 혹은
영주로 올라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퀘스트 실패 시:레벨 -2.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헐.”
이 ‘백작 영애 구출’ 퀘스트, 야탄 교단과 적대 관계일 경우엔 강제로 진행되는 퀘스트인가 보다.
“흐흐흐…….”
욕도 안 나온다. 아니, 이제는 욕할 기운조차 없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또 렙따라니… 마이너스 3레벨이라니!’
지지리 운도 없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다.
“감히 야탄 신을 모시는 자를 해하다니! 야탄 신의 저주가 두렵지도 않느냐!”
“야탄 신은 전지전능하시다! 너의 죄악은 이미 야탄 신에게 발각되었다! 평생토록 구원받을 수 없다!”
“야탄 신을 모독한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야탄의 신도들이 분노에 찬 음성으로 떠들어 댔다. 그들의 광기 어린 눈빛엔 절대적인 적의가 담겨 있었다.
‘바로 죽겠는데?’
야탄의 신도들은 흑마술사다. 흑마술에는 강력한 저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지금 흑마술이 문제냐…….’
현재 내 레벨은 -1. 근력 스탯과 체력 스탯이 각각 1이다.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에 달려 있는 근력 옵션 중 내게 적용되는 5를 더해도 근력이 총 6에 불과하다.
이들 스탯으로 계산되는 내 생명력은 고작 34. 맨주먹에 몇 대만 제대로 맞아도 저승행일 수가 있다.
‘도망칠 수 없을까?
퀘스트의 실패는 어차피 정해져 있다. 나는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1일 2회 사망 시 페널티가 적용되어 12시간 동안 게임에 접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 방법은 이것뿐!
“로그아웃!”
[지금은 게임을 종료할 수 없습니다.]
“썅! 기대도 안 했다!”
시간제 퀘스트를 진행 중에는 게임 종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연한 상식. 강제로 종료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 경우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받기 때문에 시도하고 싶지는 않다.
로그아웃에 실패한 나는 도망칠 경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곳은 적들의 본거지다.
나를 포위하는 야탄의 신도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 갔다. 아무리 관찰하고 계산해도 도망칠 견적이 안 나왔다. 달리기라도 빠르면 모를까, 소지 무게 한도 초과 탓에 이동속도가 거북이처럼 느린 내게 희망은 없다.
“단숨에 지하까지 돌파하도록 하지!”
어찌할 바 모르고 있노라니, 옆에 선 도란이 소리쳤다. 그리고 품에서 2자루 단도를 빼어 지체 없이 앞으로 집어 던졌다. 손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퍼퍽!
“크아악!”
한 자루의 단도는 적 한 명의 미간에, 또 다른 한 자루의 단도는 적 한 명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들과의 간격을 찰나지간에 좁혀 버린 도란이 어느새 새로 뽑아 쥔 단도를 가볍게 휘둘렀다.
“열라 세네.”
목이 그어지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회색빛으로 화해 사라져 버리는 야탄의 신도들.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서 야탄의 신도들이 몇 레벨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신전의 신도 계열 NPC들은 대체적으로 최소 150레벨 이상이었다.
이들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한데 그들을 쉽게 처리하는 도란의 레벨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설마 네임드 NPC?’
도란이 새롭게 보였다. 그에게 의지한다면 이 터무니없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3천 골드! 무려 현금 360만 원이 바로 눈앞에 아른거린다!
백작의 사위! 모든 능력치 +20과 아리따운 마누라를 손아귀에 넣는 모습이 상상된다!
출세 가도를 달려서 나만의 영지를 손에 넣고, 내 영지의 유저들과 NPC들로부터 고액의 세금을 갈취하는 지극히 표본적인 영주가 되리라!
‘금싸라기 땅의 영주가 되면 어지간한 중소기업 이상의 수익을 매달 얻을 수 있을 텐데.’
흥분된다!
나는 도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도란 님, 힘내세요! 저는 당신을 예전부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잉? 예전부터? 나를 언제 봤다고…….”
“앗! 위험합니다! 앞을 보십시오! 옥체 강령하셔야지요!”
“오, 옥체……?”
도란은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우선은 눈앞의 적들을 처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연거푸 발생하는 회색빛이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정말로 강하다!’
도란은 수많은 종류의 암기를 수족처럼 완벽하게 부리며 체술 또한 능했다.
약 두 달 전에 방송에서 크게 다뤘었던 어쌔신 랭킹 1위 ‘노검마’는 도란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아슈르 놈보다도 세 보이는데? 이참에 친해져서 아슈르 암살을 부탁해야지!’
야탄의 신도들은 아무런 위협도 안 되는 나는 무시하며, 오로지 도란만을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란의 질주를 막을 순 없었다. 도란은 마법 주문을 외우는 이들만을 집중 공략함으로써 마법에 공격받는 일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흑마술사가 마법을 못 쓰니 아무런 위협도 되질 않는다.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도란 님, 당신은 나의 신이십니다!!”
나는 저 뒤편에서 몰래 마법 주문을 외우다가 도란이 집어 던진 표창에 주둥이가 꿰뚫리는 흑마술사를 보면서 환호했다.
최고다! NPC의 강함에 의지해서 S랭크 퀘스트를 깰 수 있다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퀘스트다! 이 퀘스트를 거부했던 몇 분 전까지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
잔뜩 들떠서는 느린 걸음으로 도란의 뒤를 간신히 쫓아다니던 나는, 도란이 멈춰 서 준 덕분에 드디어 그의 곁에 찰싹 붙어 설 수가 있었다.
“저 지켜 주려고 기다려 주신 겁니까? 친절하기도 하셔라. 헤헤.”
도란이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놈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했어.”
“네?”
나는 도란을 따라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흑마술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지하의 원통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분노와 원한을 담아 적을 공포에 빠뜨려라.”
“공포에 빠진 자는 다리가 구속될 것이며.”
“정신이 분쇄되어 의지를 상실할지니.”
“영혼 잃은 인형이 되어라!!”
흑마술사들은 혼자서 주문을 외워 봤자 완성하기 전에 도란에게 저지당해 버리니, 애초에 주문을 한 문장씩 여럿이 나눠서 외우고 있었다.
저 문장들이 결국 하나의 주문으로 연결되어 완성되면 마법이 발현될 것이다.
“각오해야겠군.”
나는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도란의 멱살을 붙잡았다.
“각오는 개뿔! 어떻게 좀 해 보쇼!!”
“이미 늦었네.”
“이런 제기랄!!”
코오오오오!!
도란이 선 자리에 핏빛의 마법진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뭉실뭉실 피어오르며 도란을 덮쳤다.
“아, 안 돼! 댁이 죽으면 나도 끝장이라고!!”
도란과 나는 한배를 탔으며, 사공은 도란이다. 사공 잃은 배에 홀로 남게 되면 난 퀘스트 실패라는 처참한 결과를 피할 수가 없다.
“쿨럭!”
나는 저주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면서 피를 토하는 도란에게 소리쳤다.
“염병!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 애초에 기대하게 만들지 말든가!!”
그때였다.
도란이 끼고 있던 반지에서 녹색의 빛이 흘러나오더니 도란의 몸을 서서히 둘러쌌다. 그리고 점차 도란의 안색이 회복되었다.
‘뭐, 뭐야?’
놀라워하고 있노라니, 새로운 주문을 외우고 있는 흑마술사들을 저격해서 처리한 도란이 말했다.
“이 반지는 특별한 것일세. 저주와 독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고, 치료해 주지. 하지만 완벽한 보호와 치료가 아니야. 데미지가 계속 누적되니 마법을 허용하는 일을 최대한 피해야 해.”
“이야, 과연! 위대하신 도란 님은 작은 반지조차도 굉장한 것을 끼고 계시는군요!”
저 반지, 분명히 에픽 등급 이상의 아이템이다. 어떻게 빼앗는 방법이 없을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틈에 도란은 다시금 적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마법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결국 길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 다다른 도란이 소리쳤다.
“어서 가세나!”
“옙!”
힘차게 대답한 나는 의지와 달리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힘들게 도란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흑마술사들이 쫓아왔지만, 그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도란이 암기를 집어 던져 저지했기 때문에 그다지 위협이 되질 않았다.
“아가씨!!”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 간신히 지하에 도착한 도란과 나.
도란은 지하 중앙의 제단에 사지가 구속되어 묶여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를 가로막는 무리가 있었다. 열댓 명의 흑마술사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비웃어 주었다.
“가소로운 놈들!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우리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자, 도란 님! 어서 저놈들을 해치우시죠!”
“물론!”
고개를 끄덕인 도란이 암기를 전면으로 비처럼 뿌리며 전진했다.
비록 도란이 꽤 많이 지치긴 했지만, 적의 수가 너무 적다.
나는 곧 회색빛으로 화할 흑마술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들떴다.
퀘스트 클리어가 바로 목전이다.
“360만 원과 백작 영애야, 이리 오너라!”
타타탕!!
“…엉?”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다.
도란이 집어 던진 암기가 갑자기 발생한 거대한 막에 가로막혀서 지면에 추락한 것이다.
도란이 경계하며 전진을 멈췄다.
“실드?”
방어 계열 마법은 흑마술사가 구사할 수 없다. 2차 전직을 완료한 흑마법사라면 모를까.
당황하고 있자니, 흑마술사들 사이로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극상의 미모를 뽐내는 여자였다.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던 귀족 영애의 미모를 퇴색시켜 버릴 정도로 독보적인 미모였다.
왠지 낯이 익다?
나는 설마, 설마 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해 보았고, 이내 경악했다.
‘핏빛 마녀!!’
통칭 핏빛 마녀.
아이디 유라.
흑마술사 랭킹 부동의 1위이며 통합 랭킹 5위에 빛나는 한국인 유저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실력 덕에 TV에 수시로 출현하는 유명인이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유라가 손을 뻗었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제물은 빼앗길 수 없어요.”
퍼엉!
유라의 손으로부터 검붉은 불꽃이 솟구쳐 나왔다. 그 기세가 맹렬하다.
공격 마법이 별로 없는 흑마술사와 달리 흑마법사는 공격 마법에도 능통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덮쳐 오는 불꽃을 보면서 죽음을 직감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죽게 된다고?’
저 계집이 대체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절망하는 나의 몸을 불꽃이 덮쳤고, 이어서 알림창이 떠올랐다.
[회심의 일격을 당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생명력이 1로 고정된다.
잠시 잊고 있던, 또한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여 반신반의하고 있던 칭호의 특성이 적용되면서 나는 일시적으로 불사의 몸이 되었다.
마법을 정통으로 맞고도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자 유라의 표정 없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분명히 크리티컬이 터졌는데……. 장비를 보면 고작 80레벨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당신이 어떻게 그 공격을 받고도 멀쩡한 거죠?”
도란의 역습을 대비해서 흑마술사들의 뒤로 몸을 숨긴 유라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TV에서는 항상 차분한 미소만 보이던 그녀가 당황하는 꼴이라니, 나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리라.
나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서 도란에게 외쳤다.
“빨리! 5초 내로 끝장냅시다! 제가 몸빵할 테니까 도란 님께서 저들을 처치해 주세요! 믿습니다, 도란 님! 나의 신이시여!”
유라를 비롯한 모든 흑마술사들의 주문이 엉금엉금 걸어가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이로써 도란은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다. 최상의 전개다.
‘그래, 어디 한번 때려 봐라! 아무리 때려도 난 절대 죽지 않아!’
평범한 유저에 불과하기만 했던 내가 최상위 랭커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나는 연속해서 나를 공격해 오는 온갖 저주 마법과 공격 마법을 저항하면서 유라와의 간격을 좁혔고, 내가 만든 길을 뒤따라오면서 흑마술사들을 모조리 해치운 도란은 내 등을 밟고 도약하며 그녀를 덮쳤다.
유라는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질 않자 혼란을 느끼고 있는 상태.
반면 도란의 기세는 매섭다.
‘이길 수 있어!’
근데, 도란한테 밟힌 등이 유난히 아프다?
[사망하였습니다.]
“……?”
엉? 어어엉?!
나는 이 상황을 거부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잿빛으로 변해 버린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실패!]
[레벨이 2 하락했습니다.]
[레벨이 -3이 되었습니다.]
[24시간 내에 2회 사망하여 12시간 동안 게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하, 어쩐지 잘 풀린다 했다.
나는 도란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시선을 내 쪽에 두고 있는 유라… 아니, 핏빛 마녀 계집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으면서 눈을 감았다.
흑마술사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은 53.
Satisfy에 현존하는 12만 가지의 직업들 중에서 평균 레벨이 가장 낮은 직업 중 하나가 바로 흑마술사였다.
흑마술사는 전투 계열 직종이면서도 방어력이 매우 취약하고 공격력도 부족해서 파티를 맺지 않으면 사냥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라는 경이로운 마법 조합 센스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컨트롤 실력을 뽐내며 저렙 때부터 파티도 없이 혼자서 사냥을 해 왔다. 사냥터를 선별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20억 명 이상의 유저들을 제치고 랭킹 5위까지 오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3시간 전.
유라는 드디어 230레벨이 되었다. 이로써 새로운 날개를 달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제 나도 방어 마법을…….’
유라는 어렵사리 구해 놓았던 A급 마법서를 확인했다.
‘다이아몬드 장벽’.
이것은 마나를 다이아몬드에 맞먹는 경도로 물질화시켜서 방어막을 생성하는 마법으로, 흑마술사 계열 직업이 230레벨이 되어야 비로소 최초로 습득할 수 있는 방어 계열 마법이었다.
레벨 업 후 다이아몬드 장벽을 익힐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유라는 곧장 야탄의 신전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유저들의 발길이 가장 뜸한 외곽 지역의 신전으로.
거리가 멀어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워낙 유명세를 탄 탓에 유저가 많은 곳에 가면 꼭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얼굴과 아이디를 가리더라도 어찌 그리들 잘 알아보는지 놀라울 지경.
2시간 이상 말을 달려 야탄의 신전에 도착한 유라는 미리 준비해 온 마법서를 펼쳐 제단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야탄 신에게 다시금 깊은 신앙을 고한 뒤 새로운 마법을 습득하는 순간이었다.
[야탄 신을 적대하는 어리석은 무리가 신전 내부에 출현하였습니다.]
<신전의 수호자>
난이도:S
야탄 신께 바칠 제물을 노리고 신전에 침입한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야탄 신의 축복을 받은 당신, 야탄 신을 모독하는 침입자들에게 단죄를 내리어 야탄 신의 위엄을 수호해야만 한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침입자들을 격퇴, 혹은 1시간 동안 제물을 수호.
클리어 보상:칭호 ‘야탄 신전의 수호자’.
*야탄 신전의 수호자:신앙심 +300, 생명력 +1,000, 지력 +60.
야탄 신의 위엄을 수호함으로써 다른 신도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야탄 신은 당신을 더욱 축복할 것이며, 신도들은 당신을 경배합니다.
퀘스트 실패 시:레벨 -2, 신앙심 -250.
유라는 레벨이 230이 되는 동안 단 3번밖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S급 퀘스트가 갑자기 발생하자 놀라고 말았다.
저 멀리서 소란이 들려왔다.
‘침입자의 출현으로 자동 발생한 퀘스트인 걸까? 마침 찾아온 신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운이 좋았어.’
유라는 의욕이 넘쳤다. 중요한 능력치들을 큰 폭으로 상승시켜 주는 야탄 신전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제물의 위치를 파악한 유라는 이어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레더 아머를 무장한 NPC가 야탄의 신도들을 무참하게 살육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3차 전직까지 마친 NPC야.’
과연 S급 퀘스트답게 난이도가 높았다. 천하의 유라에게도 도란이라는 이름의 NPC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신도들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만약 침입자의 숫자가 많다면 성공하기 힘든 퀘스트이겠는걸.’
오래간만에 받은 S급 퀘스트이건만, 아쉽게도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아니, 섣부른 추측은 금물.’
유라는 침착하게 마나를 움직여서 신전 전체로 퍼뜨렸다.
흑마술을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마나를 가진 자들. 즉, 적을 탐지하기 위함이었다.
섬세한 마나 조작 능력이 있어야만 사용 가능한 탐지 스킬이었는데, 유라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도란을 포함해서 단 두 명.’
적의 숫자를 파악한 유라의 시선에, 마침 도란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유저 하나가 포착되었다.
아이디는 그리드. 무장하고 있는 장비를 살펴보니, 잘 쳐줘야 80레벨 전후의 유저였다.
정황상 이 S급 퀘스트를 발동시킨 장본인 같았건만 의외로 저레벨인 것이다.
주의해야 할 존재는 도란뿐이다. 그렇다면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다.
유라는 적들이 신도들과의 전투에 집중하는 사이, 신전의 지형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이내 판단을 내리고 제물이 위치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상은 너무 넓고 엄폐물이 많아서 행동이 날렵한 도란에게 유리하였으니, 상대적으로 좁은 지하에서 인질을 방패 삼아 도란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마법의 적중률을 높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고 있던 도란과 그리드가 드디어 지하로 입장했다. 지상의 신도들을 상대하느라 도란은 이미 상당히 지쳐 보였다.
“가소로운 놈들!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우리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자, 도란 님! 어서 저놈들을 해치우시죠!”
그리드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도란이 암기를 사방에 뿌리며 전진했다.
“360만 원과 백작 영애야, 이리 오너라!”
그리드는 퀘스트 클리어를 확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유라는 초면인 그에겐 다소 미안했지만, 자신 또한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방해하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타타탕!!
조금 전에 막 새롭게 습득한 다이아몬드 장벽을 펼쳐서 도란이 던진 암기들을 막아 낸 유라가 경악하는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제물은 빼앗길 수 없어요.”
도란은 강하다. 그와의 일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그리드를 먼저 처리해 놓는 편이 현명했다.
유라는 지체 않고 업화의 불길을 소환해 공격했다.
[크리티컬!]
대검은 전사 계열 직업에게 특화된 무기였다. 이를 보아 그리드의 직업은 전사임이 분명했다.
80레벨 전후의 전사라면, 아무리 좋은 장비를 끼고 있더라도 최대 생명력이 4,000 근처일 터.
하지만 그리드의 장비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3,000 내외의 생명력일 것이다. 더군다나 전사는 마법에 굉장히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
유라는 마나의 5분의 1을 소모하는 업화의 불길 한 방으로 그리드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계산하고 있었다. 확인 사살하듯이 크리티컬까지 터졌으니 그리드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만 정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리드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어떻게?’
운이 아주 좋아서 턱걸이로 살아남았다고 치자. 하지만 캐릭터가 한 번의 공격으로 40프로 이상의 데미지를 입을 경우 스턴 상태에 빠지는 게 상식이다.
한데 그리드는 체력이 40프로도 달지 않았다는 듯이 스턴조차 걸리지 않고 멀쩡히 서 있었다.
“분명히 크리티컬이 터졌는데……. 장비를 보면 고작 80레벨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당신이 어떻게 그 공격을 받고도 멀쩡한 거죠?”
유라는 20억 명이 넘는 유저들을 제치고 랭킹 5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며, 지금 당장은 4위와의 격차를 큰 폭으로 좁히고 있었다. 그녀의 게임 실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 데미지 계산이 결코 틀릴 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Satisfy를 플레이하면서 자신의 계산이 틀려 본 경험이 전무했다. 지금이 첫 경험이다.
그로 인한 혼란은 크게 작용했다.
‘어째서 저럴 수 있지? 그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에 비해 실제 레벨이 월등히 높은 걸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S급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굳이 낮은 레벨의 장비를 착용하는 여유를 부릴 리가……. 내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뭐지?’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냉정하게 사태를 분석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그리드는 뭐라고 고래고래 소릴 치면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근접전에서만 강력한 전사인 주제에 마법사를 상대로 서둘러 간격을 좁힐 생각도 하지 않고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온다.
이는 랭킹 5위인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지금 그리드의 행동은 유라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문을 외울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 최고의 마법을 사용해서 전력으로 덤벼 봐라.’
엄연한 도발!
자존감 강한 유라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리드의 소원대로 최상위급 공격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도란과 함께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각오였다.
“위대하신 암흑의 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이 청합니다. 이곳을 어둠으로 물드십사 저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시고, 저들이 당신을 경배할 수 있도록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소서.”
마법의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하자 지하의 어둠을 물리쳐 주고 있던 횃불들이 일제히 빛을 잃었다.
횃불 자체가 꺼진 게 아니다. 마법의 기운이 불꽃마저 검게 물들였을 뿐이다.
곧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보통의 적이라면, 이 주문의 부가 영향을 받아 시야를 상실하고 공포에 빠져 행동을 멈출 터.
실제로 그리드의 뒤를 쫓으며 흑마술사들을 해치우던 도란도 잠시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3차 전직을 마친 NPC보다도 높은 상태 이상 저항력을 가진 것이다.
‘대체 정체가…….’
아이디가 너무 낯설다. 랭커일 리가 없다. 한데 어찌 저리도 강한 것일까?
혼란은 가속화되었고, 유라는 쉽게 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문은 완벽하게 완성했다.
“다크 스톰!!”
쿠콰콰콰콰쾅!!!
어둠 속에서부터 휘몰아치며 모든 것을 난도질하는 묵색 태풍이 순식간에 그리드를 덮쳤다.
태풍의 영향으로 지하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들이 휘청거리고, 벽에는 균열이 일어나며 지면의 돌들이 솟구쳐 올랐다.
이대로 신전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준의 위력!
현존하는 최상위급의 암흑 공격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콰앙-!!
이미 흑마술사들에게 집중적인 포화를 받고 있던 그리드의 전신이 묵색 태풍에 휩쓸렸다.
유라는 그리드가 난도질당하여 당연히 회색빛으로 화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리드는 멀쩡했다. 기색 하나 변하지 않고서 태풍을 꿰뚫고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반면 그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도란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를 악문 채, 반지에서부터 솟아나는 녹색 빛에 의지하여 간신히 그리드를 뒤쫓고 있었다.
3차 전직 NPC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마법을 정면으로 부딪치고도 멀쩡하다니!
“당신은… 당신은 뭐죠!!”
유라는 영리한 여자였다. 논리와 인과가 얽힌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지난 21년 인생 동안 만나 온 모든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미모가 뛰어났기 때문만이 아니고 명석한 두뇌에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통찰력에 문무양도를 더하니, 어디에서든 중히 쓰일 인재란 평을 일찍부터 받아 왔다.
그만한 여자가 결국 택한 길은 Satisfy지만.
어쨌든, 그토록 뛰어난 유라로서도 그리드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현재의 Satisfy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존재야. 이처럼 압도적인 존재가 NPC도 아니고 인간이라니……. 설마 버그 유저? 아니,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라는 모르페우스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Satisfy에 버그가 존재할 리 없어. 분명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얻은 힘일 텐데? 대체 어떤 과정으로?’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을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혹스럽다. 그리고 궁금하다.
유라에게 그리드라는 사내가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그리드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어느덧 그녀에게 가까워져 왔다.
유라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으나 포기할 수 없다는 일념만으로 대항하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그리고 도란은 그리드의 등을 밟고 도약하며 그녀를 공격했다.
까앙!
방어 마법으로 공격을 막아 내고, 저주 마법으로 도란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제약한 유라가 그리드의 공격을 예상하며 다급히 시선을 돌린 찰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리드의 몸이 회색빛에 휩싸이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
이후, 큰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도란과의 사투 끝에 간신히 제압한 유라.
그녀는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창에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리드가 사라진 장소만을 응시했다.
‘다크 스톰을 맞고도 멀쩡하던 그가 갑자기 죽었을 리가 없어. 페널티를 각오하고 강제로 로그아웃한 게 분명해. 도대체 왜?’
생각해 보던 유라의 표정이 점차 나빠졌다.
“퀘스트를 내게 양보한 건가……?”
무력감을 느꼈고, 동정까지 받았다.
유라의 견고하던 자긍심이 산산조각 난 최악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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