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화 (5/1,794)

제8장

광명

체다카 길드가 주축이 된 레이드 파티는 원정길에 오르고 3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숲의 수호자를 해치울 수 있었다.

쿠르르르릉!!

전신에 푸른색 광물을 두르고 있던 숲의 수호자가 단순한 돌덩이로 전락해 무너져 내리자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울리며 숲이 들썩였다.

그에 놀라 우왕좌왕하거나 엉덩방아를 찧은 파티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골렘들에게 저항조차 못하고 죽어 나갔다.

“으악!”

“사, 살려!”

레이드에 성공했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공포에 빠지는 이들.

숲의 수호자의 잔해에 올라 전황을 살피는 지슈카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머저리들,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이 꼴이야?”

지슈카는 숲의 수호자와 대면하기에 앞서 주의 사항과 대처법을 파티원들에게 철저히 주입해 주었었다. 하지만 노고가 무색하게도, 길드원들과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허둥대다가 나자빠졌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원숭이 이하의 판단력과 학습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그냥 죽어 버려.”

본심이지만,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고만 있다간 길드의 평판이 나빠질 우려가 있다.

“칫.”

내키지 않는단 표정을 역력히 드러낸 그녀가 시위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속사가 뻗어 나가며 파티원의 목숨을 하나씩 구했다.

신궁이라 불리는 궁사 랭킹 1위의 위용이다.

그녀에게 뒤질세라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주먹을 내지르는 권성 레가스, 포효하며 쌍도끼를 휘두르는 파괴전차 반트너를 비롯한 체다카 길드원들의 활약 덕분에 파티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총 75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길드원도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멍청하게 죽은 다른 녀석들과 달리 숲의 수호자와의 교전 중에 당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끝났네.”

정말로 힘겨운 싸움이었다.

우월한 방어력과 체력, 그리고 광역 스킬로 무장한 숲의 수호자는 파티의 주력을 묶어 두었고, 그사이에 끊임없이 증식한 골렘들은 파티 전체를 압박했다.

지슈카와 레가스의 압도적인 활약이 없었다면 레이드는 100퍼센트 실패했을 것이다.

숲의 수호자가 드롭한 아이템을 확인한 지슈카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한숨을 쉬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해치며 이틀을 전진한 끝에 마주친 숲의 수호자와 꼬박 하루를 싸웠고, 힘겹게 숲의 수호자를 쓰러뜨린 뒤에는 새롭게 나타난 골렘들 탓에 곤혹을 치렀다.

그토록 고생한 것에 비하면 전리품이 볼품없었다. 흑철광 30개와 오리하르콘 7개, 그리고 푸른 오리하르콘 하나가 전부였다.

레가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수정 방패는 이번에도 안 나왔군요.”

체다카 길드가 2주에 한 번씩 숲의 수호자 레이드에 꾸준히 도전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수정 방패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체감하기로 드롭률이 최악이었다.

‘S급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똑같은 S급 퀘스트라도 단발 퀘스트와 연계 퀘스트의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입맛을 다신 반트너가 푸른 오리하르콘을 집어 들고 말했다.

“그나마 운 좋게도 이게 하나 나와 줬군.”

<푸른 오리하르콘>

오리하르콘에 숲의 수호자의 마력과 달빛이 깃들어 탄생한 광물입니다.

이미 숲의 수호자의 마력에 침식되어 새로운 마력을 부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모든 광물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경도와 강도를 지녔습니다.

무게가 가볍고, 어두운 곳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고급 대장장이 기술을 익히고 있어야만 제련이 가능합니다.

무게:3

현재로서는 정확한 가치를 매길 수 없지만, 언젠가 고급 대장장이가 등장한다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될 물건이다.

아쉬움을 떨친 지슈카가 지친 파티원들을 이끌어 마을로 복귀했다. 마을 광장에는 앞서 사망했다가 부활한 파티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토반이 드롭된 광물들의 가치를 시세대로 매겨서 돈으로 환산을 한 후, 파티원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간신히 적자를 면한 수준이었다. 길드원들이야 아무런 불만도 없었지만 일반 유저들은 보상이 적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쩌랴? 결과가 그럴진대.

수습하고 파티를 해산시킨 지슈카가 길드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네 번째 레이드가 성과 없이 끝났어. 레이드에 참가했던 일반 유저들 사이로 숲의 수호자 레이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다음 레이드부터는 참가하는 유저의 수준이 더욱 떨어질 거야. 이대로는 힘들어.”

체다카 길드는 길드원 전원이 상위 랭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명성이 낮은 이유는 소규모 길드였기 때문이다.

Satisfy가 출시되기 전 성행했던 L.T.S 시절부터 함께해 온 체다카 길드의 구성원은 고작 17명. 그들의 힘만으로는 숲의 수호자 레이드에 도전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반 유저들을 끌어들였던 것인데 이제는 그조차도 안 될 판이다.

길드의 참모를 맡고 있는 172레벨 팔라딘 토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계 퀘스트를 위해서는 자수정 방패가 꼭 필요하지만 어쩔 수 없죠. 당분간은 숲의 수호자를 포기하고 길드 전력 증강에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방어형 직업을 선택했으면서 방패는 무장하지 않고 쌍도끼를 휘두르는 수호 기사 랭킹 2위, 반트너가 호응했다.

“맞아. 이 상태로는 조급해해 봤자 소용없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숲의 수호자에 대한 화제가 사그라질 때까지 시간을 좀 갖자.”

길드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모두 같은 의견인 듯했다.

다만 레가스만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싸울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생각해 본 지슈카가 선포했다.

“앞으로 세 달 동안 레이드를 포기하고 각자 레벨 업과 장비 강화에 힘쓰도록 한다. 레이드를 재개하게 될 세 달 후까지 15레벨 이상 올리지 못하는 놈들은 죽인다? 레가스, 너는 20레벨 올리렴.”

지슈카가 화사하게 웃었다. 반달로 그려지는 눈매가 섹시했다. 하지만 길드원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대장이 까라면 까야 된다. 못 까면 진짜로 뒈진다.

지슈카가 얼마나 흉포한 여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길드원들은 마른침을 삼켰고, 레가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독촉했다.

“어서 수련의 길을 떠납시다!”

그렇게 체다카 길드는 뿔뿔이 흩어졌다.

곧 혼자가 된 지슈카는 길드 전용 창고로 향했다. 남미 여인 특유의 건강미와 풍만한 몸매가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명한 랭커이기도 한 그녀에게 사인 한 번 받아 보겠답시고 치근거리는 무리가 급격히 늘어났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시뿐이다.

지슈카는 남들이 쳐다보든, 따라오든 신경을 끄고 창고에 푸른 오리하르콘을 맡겨 둔 후, 이번에는 경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오리하르콘이야 훗날 시세가 오를 게 뻔한 아이템이었기에 당장 팔지 않는 것이고, 흑철광과 오리하르콘은 지금 시세가 최고조였다.

광물들의 경매 등록을 마친 지슈카가 창구의 관리인에게 요구했다.

“야파 화살 목록을 보여 줘.”

지슈카의 시야에 반투명한 모니터가 나타났다. 모니터 속에는 현재 경매장에 등록되어 있는 야파 화살 목록이 떠올라 있었다.

모든 야파 화살의 즉시 구매 가격은 개당 6실버.

화살 가격치고는 엄청나게 비싼 시세였지만, 야파 화살을 한번 사용해 보면 다른 화살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성능이 기가 막혔다.

지슈카는 목록의 야파 화살들을 모조리 싹쓸이했다.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위 랭커답게 돈을 투자해야 할 곳과 아껴야 할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뭐야, 이 또라이는?”

목록 맨 아래에 있는 야파 화살의 입찰 가격을 확인한 지슈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유일하게 즉시 구매 가격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그 야파 화살은 총 99개가 개당 18실버로 입찰 중인 상태였다.

지슈카는 어떤 미친놈이 야파 화살을 시세보다 3배나 비싸게 입찰한 건지 궁금해하다가, 화살의 이름이 흰색이 아니고 보라색으로 표기된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잘못 본 거겠지?’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보라색이다.

그녀는 다급히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특급 야파 화살>

등급:에픽

공격력:35~42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강철에 소량의 야파를 섞어 제작한 화살입니다.

강철과 야파의 합성 효과로 인해 극도로 상승한 관통력이 적의 방어력을 일부 무시합니다.

*일정한 확률로 적의 방어력 완전 무시.

무게:0.1

“……!”

지슈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미리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면 볼썽사납게 비명까지 질렀을 것이다.

‘이럴 수가!’

지슈카는 감탄을 넘어 경악했다.

지난 반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Satisfy를 플레이했고 온갖 사람과 모험을 겪었다. 그리고 길드원들과 함께 현금을 풀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픽 등급의 화살이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화살은 무조건 노멀 등급의 아이템이라고 확신했다.

직접 재료를 들고 이름난 대장장이에게 찾아가 수천수만 개의 화살 제작을 부탁했지만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화살조차도 모조리 노멀 등급이었으며, 실제로 상위 등급의 화살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들어 본 바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레어도 아닌 에픽급 화살이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성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지슈카는 당장에 입찰했다. 개당 입찰 가격은 무려 35실버였다.

화살은 소모품이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웠지만 희소성을 고려해야 한다. 강적을 만났을 때 비밀 병기로 활용할 경우 큰 효율을 보일 수 있으리란 믿음도 있었다.

‘이걸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구지?’

처음 떠오른 인물은 2명이었다.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와 2위 스텡.

하지만 그들은 명성이 상당히 높았으니,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라는 설명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들을 초월하는 대장장이가 숨어 있는 거야.’

캐릭터 레벨이 낮아서 상위 랭킹에 오르지 못했을 뿐, 피를 토하는 노가다를 통해 스킬 레벨만 잔뜩 올려놓은 대장장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가졌다’는 설명은 그녀를 강하게 유혹했다.

‘그를 찾는다면…….’

지슈카는 흑철광과 오리하르콘의 경매 등록을 취소했다.

‘숲의 수호자 레이드를 재개하면 광물은 꾸준히 모여.’

그녀는 에픽급 화살을 제작한 대장장이에게 최상급 광물들을 미끼로 던져 포섭할 계획인 것이다.

{대장장이 랭킹 100위권 내의 인물들과 접촉해서 그들의 스킬 레벨을 가늠해 봐. 그리고 레벨에 비해서 스킬 레벨이 높은 자들을 간추려서 명단을 만들어.}

길드 채팅창에 떠오른 지슈카의 명령이 길드원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밑도 끝도 없이 대장장이라뇨?}

{렙업하라며!}

지슈카가 반발을 일축했다.

{까라면 까! 엄청난 실력자가 숨어 있어! 그를 찾아서 포섭할 수만 있다면 숲의 수호자는 문젯거리도 아니야!}

{엄청난 실력자라니?}

{판미르와 스텡보다 뛰어난 대장장이야. 그가 제작하는 아이템의 성능은 기존의 아이템들을 가뿐히 상회할 가능성이 높아. 여태까진 수면 위로 올라온 적 없는 인물이라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테지만, 이젠 아니야. 대륙의 모든 길드가 그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될 거라고. 결코 뺏길 수 없어……. 찾아! 누구보다 먼저 찾아서 반드시 회유해!}

{마스터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어마어마한 놈이겠군. 좋아, 찾아보자고!}

체다카 길드는 원칙적으로 새로운 길드원을 받지 않았다. 소수 정예를 표방하는 그들은 L.T.S 시절부터 함께해 온 자신들끼리만 인정하고 의지했다. 소수라는 것이 큰 제약이 되어 길드의 성장은 더뎠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대규모 길드처럼 성을 차지하진 못할지언정 누구라도 두려워할 무력을 쌓으리라.

대규모 길드만큼의 명성을 얻지는 못할지언정 무력으로써 권위를 손에 넣으리라.

Satisfy를 시작하고 단 반년 만에 각 직업 랭킹 1~3위를 점령한 체다카 길드원들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L.T.S 시절, 단 17명이서 각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최강 용병 길드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발족 이래 최초였다.

“그새 누가 또 입찰 가격을 올렸네?”

특급 야파 화살의 입찰에 실패했다는 알림창을 확인한 지슈카가 망설이지 않고 다시금 입찰했다.

최초의 에픽 등급 화살!

입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Satisfy는 난리가 났다.

이름난 길드들이 수수께끼의 대장장이를 찾아내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다. 각종 언론에서는 에픽 등급 화살의 등장을 이슈 중 하나로 다뤘고, 인터넷도 소란스러웠다.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대체 누구인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헤맸지만 행방은 요원했다.

‘남들보다 힘든 길을 걸어왔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뛰어난 대장장이가 존재하다니?’

판미르도 비록 단 두 번이었지만 에픽 등급 아이템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다. 최초의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자라는 타이틀은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에픽 아이템 설명에는 ‘장인’이라는 언급이 없었다.

랭킹 1위인 자신에게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장인의 호칭을 부여받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따앙! 따앙!

판미르는 이름 모를 대장장이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면서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을 받게 된 당사자 신영우는 인력소에 출근하기 전 들른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쥐 좆만 한 컵라면을 무슨 천 원씩이나 받아 처먹는 거야? 나 같은 놈은 굶어 죽어라 이거냐? 어휴,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못 살겠네.”

투덜거리면서도 후루룩 짭짭 잘 먹는다.

*-*-*

새벽 5시 반.

일요일이건만 인력소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아저씨들로 바글거렸다. 학생들이 쉬는 날 하루 알바하러 오는 풍토가 사라진 탓이다.

힘든 일을 외면하는 요즘 젊은이들!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가 꿰찬 지 오래이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다.

‘머리 아프게시리.’

이른 시간부터 매캐한 담배 냄새와 코를 찌르는 술 냄새를 맡는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빨리 일하고 집에 가서 게임하고 싶다.’

입을 댓 발 내밀고 앉아 있자, 건설 작업복을 입은 내 또래 젊은 사람이 들어와 외쳤다.

“신우빌딩 건설 현장에서 잡부 네 분 구합니다!”

건설 현장 잡부는 청소를 하거나 벽돌, 철근, 목재, 모래 옮기기, 혹은 삽질 등을 한다.

육체노동이 가혹하고 흙먼지를 꽤 많이 먹게 되는 일이며 자칫 어리바리했다간 욕먹는 일이 잦지만, 가장 많이 해 본 일이고 무난해서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저 할… 컥!”

알코올중독자, 혹은 골초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면서 나를 밀쳐내는 아저씨들!

그들에게 떠밀려서 구석에 찌그러지게 된 나는 건설 현장에 고용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아저씨들 참 매정하시네! 젊은 놈 신세 불쌍해서라도 먼저 보내 줄 것이지!”

짜증 나서 신경질을 부리고 있자니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중년인이 들어와 말했다.

“타일 조공 세 명 구하니까 붙으쇼. 웬만하면 경력자로.”

타일 조공은 타일 공사하는 기술자를 따라다니면서 보조하고, 현장에 미리 타일, 시멘트, 모래 등의 자재를 옮겨 놓는 일을 한다.

재수 없게 헛소리만 늘어놓는 기술자를 만나면 짜증 나고,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깨져 버리는 타일 나르기가 피곤하지만 꽤 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저 타일 조공 열 번 넘게 해 봤… 억!”

나는 또 아저씨들에게 떠밀려 구석에 찌그러졌고, 그사이에 나보다 경험 많은 아저씨 셋이 나선 탓에 나는 또 고용될 기회를 놓쳤다.

“공구리 칠 사람 있어요?”

“저요! 제가 할… 악!”

이후 여러 업체에서부터 인력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나는 계속된 방해로 인해 고용되지 못했다.

“아, 나! 이 나잇값 못하는 양반들아!!”

인력소의 아저씨들은 나를 대놓고 따돌리며 방해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보기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내가 굳이 이런 곳까지 따라와 밥그릇 뺏어 가려 하니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누군 여기가 좋아서 오는 줄 압니까? 내가 다른 젊은 놈들처럼 유흥비나 벌잡시고 알바하러 온 줄 알아요? 나도 아저씨들처럼 생계유지하러 나오는 거야! 나도 좀 먹고 삽시다!”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귀만 후벼 대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나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른들이다. 심한 말은 못하고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큭큭.”

책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소장이 나를 보며 히죽거린다. 나이는 서른 초반쯤 되었을까?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무실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간이다.

인력소에 10번 출근 도장 찍으면 그중 3번을 허탕치고 돌아가는 나를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밥맛이다.

그를 힐끗힐끗 노려보고 있자니 다른 현장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전기 풀링 작업 하실 분? 경력 없어도 됩니다. 일당 11만 원 드릴 테니까 얼른 갑시다.”

보통 잡일보다 무려 2만 원을 더 준단다.

하지만 나는 혹하지 않았다. 돈을 더 얹어 주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저거 엄청 빡센데.’

나는 전기 풀링 작업을 딱 한 번 해 봤다.

간단히 말하면 거대한 전기 케이블을 지시된 곳까지 당겨 가는 일인데, 매우 단순한 작업이긴 해도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만든다. 케이블 굵기가 구라 안 치고 내 손목 두께고, 무게는 또 더럽게 무겁다.

그걸 낑낑거리면서 당겨 대는 짓거린데… 목장갑을 껴도 손에 물집 잡히는 건 기본이요, 나름 노가다에 적응된 육체일지라도 이틀 동안 근육통에 시달리게 만든다.

‘겨울에 오아시스를 봤었지…….’

나는 작년 겨울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도리질 쳤다. 그리고 다른 인력 아저씨들은 먼 산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담배 피러 나갔다.

“아무도 없어요?”

인력 구하러 온 사람이 난처한 얼굴로 재차 묻자, 아저씨들이 짜기라도 한 듯이 일제히 나를 가리켰다.

“요 젊은 녀석이 일을 참 잘하더라고.”

“그치. 현역 출신이라서 그런지 체력도 아주 끝내줘.”

“쟤 전기 풀링 많이 해 봤을걸? 숙련자야, 숙련자.”

이 정신 나간 인간들이!

내가 관두라는 뜻으로 눈을 부라렸지만 아저씨들은 개의치 않고서 계속 나를 추천했다. 그러자 인력 구하러 온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를 지목했다.

“거기, 총각, 같이 가자고? 우리 참도 잘 나와.”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려서 따라갔다간, 오늘 나는 지옥을 겪게 된다.

한쪽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소장을 보고 울컥한 나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수신 전화 한 통 없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네, 신영우입니다. 어이쿠, 자리가 났다고요? 네, 당장 가…….”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

다른 일자리가 생겼다는 듯이 당당하게 허공을 향해 외치던 내 귓가로 S사 핸드폰의 기본 벨소리가 들려온다.

결국 빵 터진 소장이 배를 잡고 웃어 젖혔고, 다른 아저씨들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 댔다.

그리고 인력 구하러 온 사람은 싱글벙글 웃었다.

“자, 갑시다.”

대체 어떤 인간이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질이야! 평소에 내 전화기가 자주 울리면 말이라도 안 해! 어떻게 한 달 만에 온 전화가 하필이면 이딴 타이밍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던 나는, 발신자 번호가 익숙함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엄마 마음 행복 금융입니다. 신영우 고객님, 이자 납기일이 내일인 거 알고 계시죠?)

“…벌써요?”

(설마 잊고 계셨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그런 가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려는 건 아니죠?)

“다, 당연히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꼭 돈 부칠게요.”

(감사합니다, 호갱… 아니, 고객님. 그럼 행복한 하루 되세요. 엄마의 마음으로 고객님 앞길에 축복이 있길 빌어 드릴게요~)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이런 염병…….”

휴일 내내 게임하면서 현실을 외면했더니 내가 빚쟁이 신분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이자라도 제때 갚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힘든 일, 쉬운 일 가릴 처지가 아니다.

“저기… 진짜로 11만 원 주실 거죠?”

“그럼!”

“진짜로 참도 잘 나오나요?”

“당연하지! 일하다가 배고플 일 없을 거야!”

나는 결국 지옥을 향해 떠났다.

그날 저녁.

“오, 오빠?”

녹초가 되어 돌아온 나를 본 세희가 휘둥그레졌다.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면서 이를 갈았다.

“씨펄… 참이 잘 나오긴 개뿔……. 사람을 그렇게 혹사시키면서 고작 크림빵 하나 주냐……? 그것도 우유도 없이……! 대체 세상의 어떤 인간이 크림빵을 맹물에 먹는다고, 이 염병할 놈들아아아!!! 아, 아으윽……. 게임해야 되는데……. 화살… 팔렸을라나…….”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

눈을 뜨니 마치 철근에 짓눌려 있는 듯한 무게감을 느꼈다. 나는 곳곳이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시 20분을 넘기고 있었다.

“윽!”

큰일이다. 우리 집과 인력소의 거리를 감안하면 늦어도 단단히 늦었다.

나는 서둘러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늦게 나갔다간 좋은 일자리들을 아저씨들이 선점하고 나만 어제처럼 더러운 곳 걸릴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으악~! 다녀올게요!!”

이자를 입금하고 나면, 내 수중에 남는 돈은 단 9,220원뿐이다. 일주일 후에 게임 정액비 결제하려면 돈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

씻지도 않고 신발을 신고 있노라니, 어머니께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아침 먹어라.”

“안 돼요, 늦었어요.”

“영우야.”

갑자기 진지한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

나는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는 내 이자 납기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왜 게임 따위에 중독돼서 학교까지 휴학하고, 빚을 만들어서 이 꼴로 사는 거냐며 슬퍼하실 거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보니,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웬일인지 침착하고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밥 먹어.”

“왜, 왜 이래요? 나 인력소 빨리 나가 봐야 돼.”

그때 안방 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신문을 펼쳐 들며 식탁 앞에 앉으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오늘은 쉬어라.”

“쉬라뇨? 무슨 날이에요?”

“큼큼.”

아버지께서는 헛기침을 하시며 신문만 보실 뿐이다.

멀뚱멀뚱 있자니 어머니가 귓전에 속삭여 주셨다.

“어제 네가 녹초가 돼서 돌아왔잖니. 아버지께서 너 침실로 옮겨 놓으시면서 말랐다고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응?”

“아빠도, 엄마도 아무리 못났어도 하나뿐인 아들자식 몸 상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단다. 어제 고생했잖니? 오늘은 하루 푹 쉬렴.”

“어, 엄마…….”

지난 1년 동안 못난 모습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랍시고 챙겨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자 나는 감동받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하품하면서 방에서 나온 세희가 내게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파스였다.

“붙여. 어제 고생해서 쑤시는 데 많잖아?”

“세, 세희야…….”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애란 말인가!

엄마와 세희를 와락 껴안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 오로지 혼자뿐이라고 생각했건만 내 곁엔 이렇게 따스한 가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아들이자 오빠를 이토록 챙겨 주는 가족들은 마치 천사 같았다. 내가 이들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감사했다.

“뭐, 뭐야. 누굴 껴안는 거야? 오, 오빠가 껴안아 봤자 기분 조금밖에 안 좋… 아, 아니, 기분 나쁘거든?”

세희는 투덜거리면서도 가만히 내 등을 토닥여 주었고, 어머니는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후,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식탁 앞에 앉은 나는 몇 달 만에 먹어 보는지 모를 사골 곰탕의 찰진 맛을 느끼면서 물었다.

“아버지, 그러면 저 빚 갚아 주시는 거예요?”

뻐억!

묵묵히 식사하시던 아버지께서 표정 하나 변치 않고 숟가락을 집어 던지셨다.

그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내가 비명을 삼키고 있는 사이, 새 숟가락을 가져와 아버지께 건네 드린 어머니가 쯧쯧, 혀를 차셨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니? 우리는 네가 자립심을 기르길 원한단다. 네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야. 자기가 벌여 놓은 일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지.”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하기에 한번 슬쩍 말해 본 건데 바로 숟가락이 날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연신 이마를 문지르고 있자 아버지께서 봉투를 건네주셨다.

“오늘 하루 일당만큼의 용돈은 챙겨 주도록 하마. 오늘 네가 쉬게 된 건 우리 때문이니깐,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지.”

“아버지…….”

감동이다. 평소엔 무뚝뚝하기만 하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시다니. 나는 기꺼이 감사하게 용돈을 받았다.

‘그런데…….’

내 예리한 손끝의 감촉을 통해 파악되는 봉투 속 지폐의 개수가 약간 적은 것 같다?

슬그머니 봉투 안을 살펴보자 만 원짜리 7 장이 들어 있었다. 실망한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요즘 노가다 기본 일당이 최소 9 장인데요…….”

아버지께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허, 그래? 미안하다만 지금 가진 현금이 그게 다구나. 그거로 만족하거라.”

부족한 부분은 나중에 채워 주시겠다는 말씀도 안 하신다.

잊고 있던 부분인데, 아버지께서는 예전부터 씀씀이가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치킨 한 마리를 시킬 경우, 네 식구가 꼭 세끼에 걸쳐서 나눠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지니신 분!

나는 7만 원의 용돈으로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주시는 게 어디야.’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채소 가게를 운영하시는 부모님께서는 곧바로 출근하셨다.

그러고 보니 평소엔 새벽 5시쯤 나가시던 두 분이 오늘은 상당히 출근이 늦다.

‘아들놈과 아침 한 끼 드시기 위해 늦으신 건가.’

감동의 쓰나미가 다시금 밀려오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던 나는 갑자기 노곤함을 느꼈다.

오래간만에 배에 기름칠을 해서 그런지 포만감이 장난 아니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세희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세희는 그야말로 청초한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쁘단 말이야.

“…뭐야? 왜 사람을 보면서 실실거려?”

“너만 보면 흐뭇해서. 어쩜 그리 잘 자랐냐.”

“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얼굴이 시뻘게진 세희가 팔뚝을 막 때린다.

뭐야?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근데 이거 시원하다?

나는 세희한테 얻어맞는 부위의 근육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안마를 받는 듯한 감각!

“아아, 좋아! 더 때려 줘! 더! 계속 때려 줘!”

“꺄악! 변태!!”

철썩!

…왜 갑자기 싸대기를 때리는 거야?

따끔거리는 뺨을 붙잡고 넋 놓고 있는 내게 세희가 소리쳤다.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 놨으니까 들어가! 그러면 몸이 좀 풀릴 거야! 이 변태 같은 오빠야!”

“어, 으, 응…….”

때리고 화내면서도 챙겨 주긴 또 잘 챙겨 주는 녀석이다.

근데 왜 나보고 변태라는 걸까?

나는 등교하는 세희를 배웅해 준 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피로가 쫙 풀리는구나.”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계좌이체로 대출 이자를 납부했다. 피땀 흘려 번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자니 맨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크윽… 이 지옥 같은 세상…….”

안정이 필요하다.

나는 서둘러 캡슐에 앉아 Satisfy에 접속했다.

화살 얼마에 팔렸을라나?

“로그인.”

지잉-

캡슐의 문이 닫히고, 시야가 서서히 검게 변한다. 그리고 익숙한 시스템 음성과 음악이 귓가에 울리면서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공기 좋다.”

중세 유럽의 아기자기한 마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곳에서 기분 좋게 눈 뜬 나는 곧장 명령어를 외쳤다.

“상태창.”

이름:그리드

레벨:3 (75/500)

직업:파그마의 후예

*아이템 제작 시 추가 옵션을 더하는 확률이 상승합니다.

*아이템 강화 확률이 상승합니다.

*모든 장비 아이템을 조건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 등급에 따른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상태 이상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일 때 잘 죽지 않습니다.

*쉽게 인정받습니다.

생명력:336/336 마나:87/87

근력:24+5 체력:22 민첩:16 지력:29

손재주:55 끈기:21

평정:14 불굴:16 위엄:14 통찰력:14

능력치 포인트:60

무게:3,095/1,000

*소지 무게 한도가 200퍼센트를 초과하여 이동속도가

100퍼센트 하락합니다.

몸이 무거워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상태 이상 ‘쇠약’에 걸릴 확률이 극도로 높아집니다.

“3레벨이라……. 후훗, 과연 그럴까?”

에픽 등급 아이템을 제작함으로써 상승한 스탯과 우월한 기본 스탯. 그리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60개의 스탯 포인트를 감안하면 실제 내 레벨은 26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에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할 경우, 50레벨 이상의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이게 바로 특별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우월감이란 것이군? 후후훗…….”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

현실의 가혹함을 잊고 들뜬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한쪽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분위기 있게 웃었다.

마침 지나가던 여자들이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수군거렸다.

“저 사람 뭐야? 이상한 포즈 취하고 혼잣말하면서 웃고 있어.”

“자아도취에 빠진 표정 보여? 설마 저 얼굴로 왕자병에 걸린 거야?”

“추해. 아마도 애인 없을 거야.”

평소 같으면 낯 뜨거워했을 나지만 지금은 너무 기쁜 나머지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고 이어서 각종 스킬들의 경험치를 확인해 보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Lv.1(3.7%)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 Lv.1(2.0%)

최고급 스킬이니만큼 경험치 오르는 속도가 굉장히 더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이 올라 있었다.

‘에픽 아이템을 제작한 덕분인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경매장을 향했다.

경매장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얼마에 낙찰됐을라나…….”

야파 화살의 시세는 개당 6실버다. 하지만 내가 만든 야파 화살은 무려 에픽 등급! 나는 최소 3~4배 이상의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 장비 아이템 같은 경우 레어 등급이 노멀 등급보다 평균 3배 이상 비싸고, 에픽 등급은 노멀 등급보다 평균 7배 이상 비싼 점을 고려해 보면 나름 타당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걱정했다.

주머니 빵빵한 헤비 유저라도 고작 화살 사는 데 많은 돈을 쓰려고 할까?

애초에 소모품을 장비 아이템과 비교해선 안 된다.

‘그래, 너무 기대는 하지 말자.’

나는 한 2배 정도의 가격으로만 팔렸어도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 경매창을 열었다.

그리고…

“커, 커헉……!”

야파 화살의 입찰 확정 가격을 확인한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날 보며 수군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아까 광장에서 혼자 웃던 그 사람 아니야? 어머, 어떡해. 턱 빠졌나 봐.”

“꺄악~! 침 흘리고 있어! 더러워!”

“추하네……. 애인 없을 게 분명해.”

“아으… 으어어…….”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어 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특급 야파 화살> (99개)

입찰 가격:개당 72실버.

일반 등급 야파 화살의 시세보다 무려 12배나 비싸게 팔린 화살들!

“어… 으… 어억…….”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인벤토리를 뒤졌다. 그리고 모든 유저들에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아이템,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99×72=?

“…7,128…….”

100실버당 1골드다.

7,128실버는 즉, 71골드 28실버라는 뜻이다.

참고로 100골드는 현금으로 약 12만 원의 가치다.

‘화살 100개 만드는 데 하루 좀 안 걸렸었지?’

게임 시간으로는 하루 정도. 현실 시간으로는 6시간이 채 안 되는 동안 현금 84,000원 이상을 벌어들였다는 계산이 된다.

“하… 하하하…….”

찌릿찌릿하다.

전율이 밀려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푸하하하하핫!!!”

“저, 저 사람 드디어 미쳤어!”

“추해! 애인은커녕 아는 여자 한 명 없을 게 분명해! 핸드폰에 등록된 전화번호에 여자라고는 엄마 한 명이 유일할 거라고!”

컥, 저렇게 예리할 수가?

아니, 저딴 계집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마음껏 지껄여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수치스러운 말을 듣더라도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으니까!

‘확실한 길이 보인다.’

빚?

“게임으로 갚아 주겠다!”

굳이 인력소에 출근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 아이템 제작하면서 돈 버는 게 훨씬 더 이득이다.

과연 파그마의 후예는 황금알 낳는 거위가 맞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전율에 몸을 떨고 있노라니, 창구의 경매관리인이 내게 번쩍이는 금화와 은화들을 건네주었다.

근데 어째 액수가 많이 부족하다?

“왜 60골드 59실버밖에 안 주는 거야?”

그 물음에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 지은 경매 관리인이 설명해 주었다.

“판매 수수료 10골드 69실버를 제한 액수입니다. 에픽 등급 아이템의 판매 수수료는 15퍼센트거든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멀 등급 아이템의 판매 수수료는 8퍼센트, 레어 등급 아이템의 판매 수수료는 10퍼센트다.

그에 비하면 에픽 등급 아이템의 판매 수수료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유니크 등급이나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의 판매 수수료는 대체 얼마나 한다는 거지?’

문득, 경매장과 엄마 마음 행복 금융이 겹쳐 보였다.

있는 놈들의 착취는 현실이나 Satisfy나 똑같다.

“제기랄… 나도 꼭 성공해서 약자를 착취하는 사람이 되겠어…….”

파그마의 후예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제작할 수 없는 레전드리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날!

Satisfy의 20억 유저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워 주리라!

“하지만 그건 먼 훗날 이야기일 테고. 크윽!”

당장 15퍼센트의 수수료를 생각하자 피눈물이 흐른다. 전날, 인력소에 출근하느라 시간이 촉박하여 노점을 열지 못하고 경매장을 이용했던 것인데, 그 선택이 천추의 한이 됐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돈을 챙긴 나는 그대로 마차를 구해서 윈스톤 마을로 향하려다가 멈추고 고민했다.

‘이곳에 머물면서 야파 화살만 만들어도 돈을 꽤 모을 수 있을 텐데, 굳이 마을을 옮길 필요가 있을까?’

내가 마을을 옮기려고 했던 이유는 내게 적합한 사냥터가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템 제작이 이토록이나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작금, 굳이 사냥과 레벨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곳에 머물면서 쭉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

스미스가 게이라는 사실!

‘그 게이 영감탱이랑 단둘이 붙어 있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지금에 와서는 사냥이 급한 게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 레벨에 적합한 마을에 거주하는 편이 마음 편하기도 하다.

결국 예정대로 윈스톤 마을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나는 마부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가슴 아픈 사연을 무장하며 가격 흥정을 시작했다.

“병든 누이가 윈스톤 마을에서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저런! 그럼 한시 빨리 출발해야겠구려! 어서 이 마차에 오르시오!”

“근데 지금 제 수중에 돈이 7골드뿐이라…….”

“이크, 생각해 보니까 예약 손님이 계셨었지. 미안하오.”

첫 번째 흥정은 실패!

“제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돌아가셨던 친할머니의 제사가 바로 오늘입니다. 당장 윈스톤 마을로 가야 하는데 제 수중에 돈이 7골드 50실버뿐이라…….”

“으음, 당신의 명성이 제법 높고 사정이 딱하니 내 도와주고 싶지만, 7골드 50실버만 받고 윈스톤 마을을 다녀오기엔 내가 감수해야 할 손해가 너무 크오. 미안하게 됐소.”

두 번째 흥정도 실패!

돈독이 올라서 정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초콜릿 파이라도 먹여 줘야, 아, 이게 정이구나! 깨달을 놈들 같으니라고!”

결국 원하는 만큼의 가격 흥정을 실패한 나는 그나마 값을 가장 적게 부르는 마부의 마차에 올라탔다.

“어서 윈스톤으로 출발합시다! 지불한 돈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신속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최대한 봉사하는 마음으로 운행하쇼!”

“…거 참, 기껏 운행비 깎아줬더니 감사한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군.”

여행은 항상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덜컹덜컹, 연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마차의 승차감과 불친절한 마부의 태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정작 내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오후에 출발해서 다음 날 오전에 도착한 윈스톤 마을은, 마을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바이란 마을에 비하면 4배 이상 면적이 컸고, 번화가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요새 도시 파트리안에 비견될 정도!

나는 마차비로 8골드 90실버나 받아 처먹은 마부에게 합당한 고객 서비스를 요구했다.

“질문 하나 합시다.”

“물어보쇼, 아는 한도 내에서 가르쳐 드릴 테니까.”

“윈스톤은 왜 도시라고 불리지 않는 거요?”

“원래 이곳은 바이란보다 작은 마을이었소. 하지만 근처에 초보자를 비롯한 중급 여행자들이 모험하기에 적합한 장소들이 많아서 유명세를 탔고, 몰려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점차 규모가 커진 거요. 이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도시로 격상된다는 소문이 있소이다. 듣자 하니 스테임 백작 가문의 후계자께서 새로운 영주로 파견된다고 하던데……. 그쯤부터 도시로 불리겠지.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스테임 백작 가문? 근래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하도 많은 일을 한 번에 겪어서 그런지 최근 일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기란 골치가 아프다.

“뭐,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마부와 헤어진 나는 창고 관리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관리인에게 내 창고의 등록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 주자, 관리인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수고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이래서 창고를 사용하기 싫다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30실버를 지불하자, 금액을 확인한 관리인이 마법 지팡이로 작은 원을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공간 마법과 텔레포트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 사각 형태의 자그마한 창고가 내 눈앞으로 소환되었다.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슈르 놈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석 달 동안, 물약 값을 마련한답시고 힘들게 모아 뒀던 잡템들을 모조리 처분한 탓이다.

Satisfy가 오픈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1년 동안을 쭉 플레이한 초창기 유저 중에서 창고에 먼지만 날리는 사람은 오직 나만이 유일할 터!

“크윽…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거지라니…….”

좌절한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보았다.

<마몬의 대검>

등급:에픽

내구력:88/204 공격력:178~301 공격 속도:-16%

*크리티컬 시 물 속성 데미지 추가.

파미앙 호수의 수호자 마몬이 애용하던 대검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호수에 잠겨 있던 영향으로 물의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65 이상, 근력 260 이상, 체력 150 이상.

무게:1,050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

등급:레어

내구력:51/180 방어력:165 이동속도:-2%

*근력 +10

요새 도시 파트리안의 대장장이 멩겔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방어력을 살리고 무게를 낮췄습니다. 착용자는 멩겔이 작품에 담은 의지를 느끼고 힘이 솟아납니다.

사용 조건:레벨 60 이상, 근력 180 이상.

무게:1,203

<중급 물약> (34개)

다섯 종류 이상의 약초를 배합해서 조제한 물약입니다.

체력을 1,500 회복시켜 줍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20초.

무게:306

<상급 물약> (27개)

열 종류 이상의 약초를 배합해서 조제한 물약입니다.

체력을 4,000 회복시켜 줍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20초.

무게:324

<중급 힘의 물약> (2개)

오우거의 피 소량과 온갖 약초를 배합해서 조제한 물약입니다.

5분 동안 근력을 50 상승시켜 줍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없음.

무게:62

<중급 민첩의 물약> (3개)

하피의 피 소량과 온갖 약초를 배합해서 조제한 물약입니다.

5분 동안 민첩을 50 상승시켜 줍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없음.

무게:90

<특급 야파 화살>

등급:에픽 (1개)

공격력:35~42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강철에 소량의 야파를 섞어 제작한 화살입니다.

강철과 야파의 합성 효과로 인해 극도로 상승한 관통력이 적의 방어력을 일부 무시합니다.

*일정한 확률로 적의 방어력 완전 무시.

무게:0.1

<야파> (3개)

야파 원석을 제련하여 얻은 금속입니다. 경도와 강도가 약하여 단일 금속으로는 위력적인 아이템을 제작할 수 없지만,

강철과 혼합할 경우 속성이 변합니다.

무게:60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이것들이 내 인벤토리 내용물의 전부다.

나는 소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창고에 맡기려다가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감정해 보지 않았었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스킬은 아이템의 숨겨진 기능을 밝혀낸다.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가 이미 감정이 되어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도,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스킬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면 덩달아 이해도도 오를 거고.

나는 지체하지 않고 두 개의 아이템을 감정해 보았다.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마몬의 대검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와 제작법,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마몬의 대검에 대한 이해도가 33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와 제작법,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에 대한 이해도가 65퍼센트가 되었습니다.]

현재 나는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의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른 페널티로 인하여 마몬의 대검을 장착할 경우 공격력의 30퍼센트가 하락했고,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는 방어력이 20퍼센트 하락했었다.

하지만 이해도가 대폭 상승한 지금은 달랐다.

[직업 특성의 효과로 <마몬의 대검>을 장착하였습니다.]

[아이템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마몬의 대검>의 공격력이 20퍼센트 하락합니다. 옵션 효과가 절반만 적용됩니다.]

[<마몬의 대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페널티가 줄어듭니다.]

[직업 특성의 효과로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하였습니다.]

[아이템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의 방어력이 8퍼센트 하락합니다. 옵션 효과가 절반만 적용됩니다.]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페널티가 줄어듭니다.]

“호오라.”

이해도가 높아진 만큼 페널티가 즉각적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내가 장착한 마몬의 대검은 143~240의 공격력을 발휘하고,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는 152의 방어력을 보유한다.

옵션 효과는 여전히 절반만 적용됐지만, 기본 능력치에 대한 페널티가 줄어든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기쁘지만은 않았다.

도끼나 곡괭이는 감정 한 번으로 이해도가 100퍼센트 올랐었지만,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는 이해도가 너무 적게 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실망스럽다.

‘기왕이면 더 올랐으면 좋았을 것을.’

뭐, 너무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이해도는 아이템을 감정, 분해하는 방법 외에도 사용, 수리, 탐구함으로써 올릴 수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일단 수리부터.”

마침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는 내구력이 하락한 상태다.

나는 2개 아이템의 이해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 전설적 대장장이의 수리 스킬을 사용했다.

그런데…

[수리 도구가 필요합니다.]

“아, 놔! 수리 도구라는 게 따로 있는 거였어?”

수리 도구는 또 얼만데? 염병! 그놈의 돈! 돈! 돈!

전사 시절에는 수리 스킬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템 수리를 무조건 대장장이 NPC에게 맡겼었다. 그래서 수리하는 데 수리 도구 아이템 같은 게 따로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수리비가 비싼 이유가 있었구만!’

나는 아이템 수리를 다음으로 미루도록 했다. 기껏 30실버를 지출해서 소환한 창고인데, 수리 도구 사러 간답시고 창고를 다시 물려 버리면 30실버를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되는 거니까!

미련을 털어 낸 나는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창고에 맡겼다.

장비 아이템 보관료는 개당 10실버.

가히 공포스러운 지출이 연이어진다.

“세상엔 도둑놈 천지야…….”

고작 창고 소환해 주는 일에 30실버, 아이템 하나 맡아 주는 데 10실버씩이나 받아 처먹다니!

엄마 마음 행복 금융이나, 경매장이나, 창고 관리소나 내 눈엔 죄다 똑같은 도둑놈들이다.

“내 50실버가… 내 50실버가……!”

50실버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600원이다. 그만한 액수면 200밀리리터 우유 한 팩을 사 먹음으로써 허기진 배를 달랠 수가 있고, 동시에 뼈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그처럼 의미 있는 금액을 고작 무게 때문에 아이템 2개 보관하자고 사용하게 되다니!

“크으윽…….”

치가 떨린다.

나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싱글벙글 웃는 창고 관리인을 노려봐 준 후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에는 갓 캐릭터를 생성한 초보 유저들부터 시작해서 100레벨대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유저들에 이르기까지, 제법 폭넓은 레벨대의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가상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달밤에 체조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사람들,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퀘스트 공유를 원하는 사람들, 단순히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는 예술가, 구걸하는 거지, 사랑을 속삭이는 몰지각한 연인들 등등! 온갖 군상들이 보였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그들을 관찰했다.

초보 유저들은 대체적으로 동쪽 거리를 이용하고 있었고, 중레벨 유저들은 남쪽 거리를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서쪽과 북쪽 거리는 레벨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애용했다.

동쪽 거리에는 초보자용 퀘스트를 주는 NPC들이 있으며 동문 바깥에는 초보자들에게 적합한 사냥터가 있다는 뜻이고, 남쪽은 중레벨 유저들에게 적합한 퀘스트와 사냥터가 존재한다는 뜻일 터다. 서쪽과 북쪽은 전 레벨을 아우르는 퀘스트, 혹은 상가가 밀집된 지역일 테고.

“대장간도 서쪽이나 북쪽 거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렇게 결론을 내릴 때까지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더니 알림창이 떠올랐다.

[통찰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통찰력 스탯은 대상을 간파하거나 위험을 예측시켜 준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 성능을 체감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스탯이 정말로 효용성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올랐으니 좋은 거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며 걸음을 옮긴 나는 서쪽 거리와 동쪽 거리를 차례대로 둘러본 끝에 동쪽 거리에서 대장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건물 외관만 봐도 엄청난 규모다.

2층짜리 건물인데 바이란 마을의 작은 대장간과는 비할 수가 없는 크기다. 스미스 혼자 일하던 바이란 마을의 대장간과는 달리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이 함께 일하고 있을 듯하다.

‘그 수십 명의 대장장이들을 이끄는 대장이라면 최소한 중급 이상의 대장장이겠지?’

그렇다면 나를 알아보고 호의적으로 대할 것이다. 바이란 마을에서와 달리 좋은 환경에서 아이템 제작법을 익힐 수 있으리라.

들뜬 나는 대장간에 입장했다.

끊이지 않는 풀무질 소리와 활력 넘치는 망치 소리, 그리고 뜨거운 열기를 상상하면서.

하지만 입장해서 본 대장간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열기는커녕 망치질 소리조차 들리질 않았다. 인기척도 없다.

“뭐, 뭐야?”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저 끝 구석에서 빈 술병을 베개 삼아 잠자고 있는 배불뚝이 영감이 보였다.

나는 숨은 쉬는 건지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