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화 (9/1,794)

제4장

방심 유발자

<메로 상단과의 아이템 제작 승부!>

이 퀘스트의 난이도는 A다.

즉, 고난이도로 분류된다는 뜻이다.

21레벨의 플레이어가 A급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도 이번 퀘스트를 실패하는 거 아니냐고? 왜 무리해서 퀘스트를 수락했냐고?

무리가 아니다. 나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수락한 거다.

만약에 이번 퀘스트가 전투나 모험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겠지. 아니, 애초에 퀘스트를 거절했을 거다. 제아무리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라고 해도 현재 레벨로는 클리어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메로 상단과의 아이템 제작 승부!> 퀘스트는 제작으로 승부를 보는 내용이다.

메로 상단이 고용한 대장장이보다 더 뛰어난 아이템을 제작하면 승리하게 되는 퀘스트!

“이 몸은 무려 에픽 등급의 화살을 제작한 전설적 대장장이! 메로 상단에서 설사 고급 대장장이를 고용한다고 해도 내가 질 리가 없지! 크크큭, 이야말로 나를 위한 퀘스트… 아니, 이벤트가 아니던가!”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조명 삼아 선 나는, 마치 만화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아한 표정을 짓고, 멋진 독백을 날리며 고상한 미소를 흘렸다.

마침 창고에서 아이템 제작 도구들을 챙겨 나온 칸이 그런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까 먹은 저녁이 상했었나……? 표정이 어디 아픈 사람 같은데, 괜찮은 겐가? 약을 갖다 줄까? 아니, 내 당장 달려가서 의원을 모셔 오겠네!”

“…어딜 봐서 아픈 사람 같다는 겁니까?”

칸은 미적 감각이 형편없는 듯하다.

‘쯧쯧, 대장장이도 일종의 예술가이건만.’

칸이 만든 작품들은 성능은 둘째 치고 외관이 볼품없을 게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때에, 칸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같이 아름다운 검과 투구를 가지고 왔다.

“내가 만든 역작들인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나름 괜찮지 않은가? 내가 이래 봬도 전성기 시절엔 아름다운 무구들을 만들기로 이 북부에서 유명했거든. 내 미적 감각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늘 회자됐을 정도야. 허허.”

…이 양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내가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자, 검과 투구를 슬그머니 한쪽으로 치운 칸이 각종 제작 도구들을 앞으로 늘어놓았다.

“보다시피 도구는 제대로 갖춰져 있다네. 강철과 각종 광석,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나무도 창고에 쌓여 있지. 몇 달이나 장사가 안 되다 보니 재료가 남아돌더구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군. 이것들을 이용해서 자네가 수련을 쌓으면 되니까.”

씁쓸하게 웃는 칸에게 나는 계속 품어 온 의문을 던졌다.

“메로 상단이 영감님께 사기를 쳐서 큰 빚을 지게 만들고, 급기야는 깡패들을 고용해서 영업을 방해했잖아요? 협박과 폭행도 일삼았고요. 그런데 어째서 영감님은 영주나 치안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겁니까?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어요?”

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 또한 메로 상단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치안대에게 신고를 하고 영주에게 상소를 올렸다네. 치안대가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랐고, 영주가 내 억울함을 해소해 주길 바랐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 나의 요청을 모두 묵살해 버렸네.”

“…메로 상단의 입김이 작용했나 보군요.”

“맞네. 메로 상단은 북부에서 제일가는 거대 상단이며 최고의 부자지. 영주와 치안대는 이미 진즉에 메로 상단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던 게야. 나뿐만이 아닐세. 윈스톤의 수많은 주민들이 메로 상단에게 피해를 입어 거리로 쫓겨났지만 영주는 그들을 도울 생각을 손톱만큼도 안 한다네.”

결국 돈이 최고라는 거다.

돈의 위대함을 다시금 실감한 나는 반드시 부자가 되리라고 또 한 번 다짐했다.

“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윈스톤은 스테임 백작령에 속해 있지 않나요?”

“그렇다네.”

“그러면 주민들과 단체로 스테임 백작을 찾아가서 윈스톤의 영주를 고발하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스테임 백작이 영주를 처벌… 아니, 설마 메로 상단의 입김이 스테임 백작에게까지 닿는 겁니까?”

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듯하네. 우리는 자네 말대로 스테임 백작님을 만나 뵙고자 수차례 시도했지만, 눈치를 챈 영주가 매번 방해해서 윈스톤을 벗어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상소를 올려 봤자 윈스톤 내에서 소각되어 백작님께 전해지지도 않고……. 만약에 스테임 백작님께서 영주와 한패였다면, 영주가 우리를 막으려고 그렇게까지 발악하진 않았겠지.”

“감찰단이 오지 않나요?”

“감찰단은 이미 오래전에 영주에게 매수당했다네.”

그래, 결국 돈이 최고구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용광로에 불을 붙이면서 칸을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 마십쇼. 이제 당신에게는 제가 있으니까. 제가 메로 상단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게요. 믿죠? 믿으니까 제게 이런 중책을 맡긴 거죠?”

“당연히 믿고 있다네. 파그마의 후예라면 상대가 그 어떤 대장장이를 고용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그리드, 자네 정말이지 듬직하구먼. 내 늦둥이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자네와 비슷한 또래였을 터인데… 그 아이도 자네처럼 훌륭한 청년이 되었을 터인데… 크흑…….”

칸은 눈물이 참 많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책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만큼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는 뜻일 테지.

‘가여운 사람이다.’

…잉?

뭐지? 이런 감상은 나랑 거리가 멀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칸 앞에서는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면서 홍익대장장이 이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어진 탓인가?

‘그보다는 칸이 내게 복덩이 같은 존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호감을 갖게 된 거겠지.’

나는 은근슬쩍 술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칸을 붙잡아 와서 옆에 앉혀 두고 풀무질을 시작했다.

“영감님, 제가 일하는 걸 밤새 지켜보세요. 그러면 술 따윈 금세 잊을 겁니다. 다시 대장장이 일을 하고 싶어져서 몸이 근질근질해질 테니까요.”

“그, 그럴까?”

으악! 나 왜 이래? 왜 저 영감님만 보면 온화한 미소를 짓게 되지?

…아.

용광로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만 되면 찾아갔던 할아버지댁에서 나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따스한 사랑을 받은 덕분에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렇군. 칸은 우리 할아버지와 말투며 분위기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차 한 잔 들게. 르눌 잎으로 끓인 차인데 향이 아주 좋아.”

“뭐, 나쁘지 않군요. 이런 것보단 용돈이나 좀 주지…….”

“응? 뭐라고 했나? 소리가 시끄러워서 자네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군!”

“안 들렸을 리가 없는데요?”

“당최 뭐라는지 안 들리는군!”

“…역시 고단수야.”

까앙! 까앙!

마음에 드는 사람과 차를 나누며 불과 철을 다스리는 이 순간.

마음이 벅차오른다.

Satisfy를 현실처럼 소중하게 느끼게 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근데 자네… 망치질하는 폼이 어째 시원치 않은데? 내 기대가 너무 컸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건가? 아닌데? 영 별론데? 좀 이렇게 팍팍 해 봐. 아니, 팔꿈치를 조금 더 이렇게 좁혀 가지고……. 자네… 진짜로 파그마의 후예 맞는가? 소, 솔직히 말해 주게. 서, 서, 설마 사기꾼은 아니겠지? 이러다가 상단 놈들과의 승부에서 지는 거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라빗이란 놈의 제안을 받아들였구먼!”

…이 영감탱이가.

“좀 조용히 해 봐요! 하다 보면 나 실력 빨리빨리 는다니까? 아, 좀 냅둬 보라고, 이 양반아! 왜 망치를 뺏어 가는 거야?!”

“하다 보면 실력이 빨리 는다고? 어째 말이 좀 이상하잖아! 파그마의 후예라면 이런 것쯤 진즉에 마스터했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 사기꾼이군! 사기꾼이었어!”

아, 나… 정 떨어진다.

따앙! 따앙!

밤이 깊어 간다. 하지만 나는 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정의 컨디션이다. 이런 날이야말로 밤새 기술을 연마해서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날, 실제로 나는 밤새 솜씨가 크게 늘었고, 칸은 더 이상 사기꾼이란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수련이 본격화됐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리고 술에 대한 미련을 버린 칸은 금세 60년 경력의 대장장이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가 오랜 경험을 토대로 쌓은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내게 큰 도움을 줬다.

“갑옷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내구성만이 아닐세. 착용자가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야.”

갑옷의 제작법을 전수받아서 갑옷도 만들어 봤고,

“어허! 강약이 어긋나지 않았는가! 자세만 교정되면 뭐 하나? 집중을 해야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왜 이리 산만해!”

혼도 났고.

“대단하군, 대단해. 사람이 집중을 시작하자마자 이토록 달라지다니? 그 재능에는 끝이 없구만.”

혼난 이상으로 칭찬도 받았다.

“단조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종자들이 꼭 있지. 그들의 논리는 ‘시간에 쫓길 경우에는 단조 정도야 부득이하게 생략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이지만, 그들은 착각하는 걸세. 단조는 결코 부수적인 작업이 아니야. 단조를 생략해 버리면, 굳이 담금질과 뜨임 과정을 거치는 의미가 퇴색돼. 정녕 시간이 부족하다면 단조를 생략할 게 아니라 담금질 과정부터 생략했어야지.”

깊은 가르침을 받았고,

“저도 공감합니다. 애초에, 시간에 쫓긴답시고 어떤 과정들을 생략하고 불완전한 물건을 만드는 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시간이 걸릴지언정 보다 완벽한 물건을 만들고자 노력해야죠.”

“오오! 존경스러운 장인 정신일세. 그 젊은 나이에 그리도 고귀한 이념을 갖추다니, 역시 파그마의 후예답군!”

“그런 거창한 게 아닌데요.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한 말인데…….”

“하하하! 겸손이라는 미덕까지 갖추었으니, 정녕 훌륭한 젊은이일세! 존경스러울 지경이로군! 그리드! 내 자네를 만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야!”

“…….”

의견을 나누며 오해도 받았다.

어찌 됐든 행복한 시간이었다.

***

“음냐…….”

나는 시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기상했다.

커튼을 치고 보니, 바깥은 아직도 캄캄하다. 시간을 확인했다.

“4시밖에 안 됐네.”

너무 이른 기상이다. 최소한 30분 정도는 눈을 붙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평소의 나였다면 쓸데없이 일찍 일어났다고 투덜거리면서 다시 침대에 누웠을 터.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상쾌한 아침이로군.”

기분이 참 좋다.

전날, Satisfy의 시간으로 이틀 밤을 지새우며 대장장이 기술을 연마했는데, 그 성과가 매우 좋았다.

총 3개의 갑옷과 2자루의 검을 만들었고, 그중에서 무려 2개의 아이템이 레어급이었다.

덕분에 모든 스탯이 +4가 됐고,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의 경험치는 총 20퍼센트 가까이 올랐으며,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 경험치는 약 8퍼센트 올랐다.

작업할 때의 집중력과 정교함도 전과 비할 바 없이 상승해서 제작 속도가 크게 개선됐다.

칸이 정녕 큰 도움을 주었다. 바이란 마을의 스미스와 존재감 자체가 다르다.

“아직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실력이 온전히 돌아온 것도 아닌데 그 정도인 걸 보면, 하급 대장장이와 고급 대장장이는 하늘과 땅 차이의 실력과 견식을 가지고 있는가 보군.”

칸이 보고 싶어진다. 빨리 그와 함께 아이템을 제작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 레벨 업과는 또 다른 성장의 묘미다.

“헉.”

잠들기 전까지 함께 있던 양반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나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킁. 샤워부터 하자.”

나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온수로 개운하게 씻고 나오자 어머니께서 아침상을 차리고 계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우리 영우가 어제 하루 쉬었다고 피로가 싹 풀렸나 본대?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곰탕의 힘이죠! 좋은 걸 먹었더니 바로 효과가 나타나더군요. 컨디션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조만간 장어구이도 좀…….”

“애인도 없는 녀석이 장어는 먹어서 어디다 쓰게?”

안방에서 신문을 접어들고 나오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발끈했다.

“애인 없다고 무시하지 마시죠? 애인 없어도 힘 쓸 곳은 많고…… 아니, 애초에 제가 마음만 먹으면 여자 친구 따위야 금방 사귀거든요?”

“뭐? 호호호호호호~!”

어머니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아주 신 나게 웃으신다.

‘뭐지.’

내 말에 박장대소 하시는 어머니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무시당한 듯한 느낌이 든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어머니께 따졌다.

“엄마 왜 웃어요? 아들이 여자 사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어째서 그렇게 웃을 일인 거죠?”

어머니는 웃음을 그치지 못하셨다.

“오호호호호~! 26년 동안 살면서 애인 한 번 없던 애가 그렇게 당당하게도 말하니까 웃기잖니! 내 자식이지만 배짱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줘! 배.짱.하.나.만.큼.은. 호호호호호~!”

“…….”

이건 명백한 무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엄마한테 이토록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는 아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충격 받은 내가 휘청거리고 있는 사이,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거들었다.

“아들아, 말 나온 김에 부디 내년에는 마음먹고 애인 하나 만들어 봐라. 슬슬 장가갈 준비 해야지 않느냐?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까 무리지 싶군. 일단은 빚부터 갚아야하지 않겠냐? 요즘 세상에 어떤 여자가 빚 있는 남자랑 사귀려 하겠어? 네가 아무리 자신만만해도 세상일 쉬운 거 하나 없다. 변변찮은 남자가 자신감 하나만으로 애인 사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냥 한동안은 애인 만들기 포기해라.”

“…….”

이 또한 명백한 무시다.

그 어느때보다 기분 좋게 맞이한 아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최고였던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명경지수와 같았건만, 지금 이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다.

“두 분 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여태까지 애인 한 번 못 만든 이유가 뭔데요! 빚이 있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두 분이 저를 이 모양, 이 꼴로 낳아서 그런 거잖아요!”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내가 애인이 없는 건 다 아빠랑 엄마 탓이에요! 두 분이 나를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낳아만 줬으면 26년 내내 여자를 끊임없이 사귈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빌어먹을! 두 분이 나를 못생기게 낳은 바람에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안 주잖아요!”

“어머,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게 우리 잘못이니? 네 동생을 봐라. 너랑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그렇게 예쁘게 태어났잖니? 너도 세희처럼 알아서 예쁘게 태어나지 그랬어?”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거늘…… 대체 언제쯤에야 철이 들는지. 쯧쯧, 보면 볼수록 한심하기만 하구나.”

“이익…….”

아침부터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진지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 주워 온 자식인가?’

어쩌면 내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닌 게 아닐까?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쁘다고 하던데,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이러시지……? 나 정말로 주워 온 자식 아니야?’

나를 26년 동안 키워주신 두 분이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었다니!

그럼 내 진짜 부모님은? 내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는 건데?

……아니, 지금 나 뭐하는 거야?

출근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다. 되도 않는 설정극을 즐길 여유 따윈 없는 거다.

정신 차린 나는 진정했다. 그리고 식탁 앞에 앉은 뒤 화제를 전환시키고자 아버지께 여쭸다.

“그보다 아버지, 요즘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당연히 언제나처럼 건강하시죠?”

“음? 네가 웬일로 할아버지 안부를 다 묻는 게냐?”

“게임 속 NPC 중에 늙은 대장장이가 한 명 있는데, 왠지 우리 할아버지랑 닮았더라고요. 그래서 문득 할아버지가 생각났어요.”

……라고 대답하면 게임폐인이네 뭐네 또 한 소리 듣겠지?

아니, 한 소리 듣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간만에 매질을 당할 수도…….

“그냥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얼버무리는 내게 아버지가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러지 말고 다음 달에 할아버지댁 갈 때 너도 따라와라. 네가 벌써 1년째 할아버지를 찾아뵙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해 하고 계시는 줄 아느냐?”

7년 전부터 우리 가족은 굳이 명절이 아니더라도 할아버지댁을 자주 찾아가고 있다. 7년 전에 할머니를 여의시고 혼자가 되신 할아버지의 적적함을 달래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께 우리 가족과 함께 살자고 설득해보셨지만 할아버지는 완강히 거절하신다. 아마도 본인이 짐이 된다는 생각을 하시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나도 작년까진 매번 가족들을 따라 할아버지를 찾아뵈었었다.

하지만 Satisfy를 접하고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찾아뵙지 않았다.

할아버지댁을 오갈 시간에 게임을 좀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새끼도 참 불효막심한 놈이었네.’

우리 할아버지도 지금쯤 대장장이 칸처럼 외로워하고 계시진 않을까?

고독한 노인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지, 칸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탓에 걱정이 든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다시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해야겠다.

“잘 먹었습니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인력소로 출근했다.

그리고 도착한 인력소는 이미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지끈지끈.

담배 연기 탓에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다.

‘거 참, 백해무익하고 비싸기만 한 담배 따위를 왜 저리들 좋아하는 건지 원. 쩝, 나라면 담배 살 돈으로 현질을…….’

조금만 더 참자. 아이템 제작 환경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고 나면 인력소를 출근할 필요가 없어진다.

인력소 출근해서 노가다 뛸 시간에 아이템 제작해서 판매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때부터는 노가다 현장이 아닌 Satisfy가 내 직장이 될 터. 하루 종일 캡슐에 누워 있어도 부모님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날을 맞이하려면 우선 메로 상단과의 승부에서 이겨야만 한다.

‘칸의 대장간은 거점으로 삼기에 딱 좋아. 반드시 승부에서 이겨서 칸의 대장간을 지킨다.’

***

메로 상단 윈스톤 지부.

발몽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 라빗에게 실망감을 느낀 탓이다.

“어째서 이런 귀찮은 일을 기획한 거지?”

대장간을 건 아이템 제작 승부라니?

발몽은 라빗의 의도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칸이 내게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대장간을 담보로 넘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리고 칸에게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 즉, 대장간은 반드시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다만 그 시기가 빨라지느냐, 늦어지느냐가 관건일 뿐이었지. 그리고 나는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서 라빗 자네에게 일을 맡긴 걸세. 한데 자네는 자네의 임무를 망각한 듯하군?”

퍽!

발몽이 씹어 먹고 있던 사과를 벽에다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산산조각 난 사과의 파편이 라빗의 얼굴에 튀었다.

라빗은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어 더러워진 얼굴을 닦았다.

당당하게도 행동하는 그를 보고 발끈한 발몽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왜 쓸데없는 내기를 해서 칸에게 희망을 주었는가? 왜! 내가 대장간을 취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 뒀지? 설마 자네 칸에게 회유라도 당한 건가!”

어제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신뢰하던 최측근을 오늘 바로 의심한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발몽의 성품이 드러나는 단적인 예다.

라빗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제 우리 상단의 주 거점은 이곳 윈스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윈스톤 주민들에게 상단은 적으로 인식되어 있죠. 상단의 사업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해 보면, 상단은 윈스톤 주민들과 친화되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상단에게 호감을 가져야만 상단의 사업에 일조해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상단은 그들의 재산을 빼앗은 역적과도 같은 존재. 그들을 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단이… 내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고? 흥! 궤변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땅과 상권이 똥값이었을 때, 나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금액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땅과 상권을 매입했어! 그들 또한 환영했었고! 그런데 이제 이곳이 발전하고 땅값이 오르고 나니까 후회하면서 나를 역적 취급해? 그야말로 간사한 놈들이다!”

“주인님께서 그들로부터 매입한 땅과 상권을 통해 거둔 이윤 중 일부라도 그들을 위한 일에 사용하셨다면 일이 이 지경까진 안 됐을 테죠. 아니, 오히려 그들은 감사하였을 테고 상단의 사업 발전에 장기적으로 일조했을 겁니다.”

“즉, 내가 나쁘다 이건가? 흥! 자네, 윈스톤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안을 내가 묵살했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비난하는 거군?”

“‘사람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돈을 좇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 주인님께서는 이와 같은 지론을 가지셨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돈은 자연히 따르는 법이죠. 상단에 은혜 입은 사람들이 상단 사업에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발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네놈……!”

발몽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라빗을 죽일 기세로 노려봤다.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자네는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는가? 자네는 받은 돈만큼 내가 시키는 일만 잘 해결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어쩌다가 이런 헛소리가 나오게 된 거지? 본론으로 들어가라! 어째서 자네는 칸과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한 겐가!”

‘여기까지가 발몽의 한계다. 메로 상단은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려워.’

메로 상단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젊었던 발몽이 라빗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사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발몽은 오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서 라빗의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 일만 마무리 지으면 이곳을 떠나야겠군.’

결심한 라빗이 발몽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칸에 대한 윈스톤 주민들의 주목도는 매우 높습니다. 메로 상단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그를 영웅으로 여기는 무리들도 존재할 지경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단이 여태까지와 같이 비열한 방식으로 칸의 대장간을 취하게 된다면, 주민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할 테고 그 분노는 궐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민들이 단체로 상단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일삼아 결국 상단에 위해를 가하겠죠.”

발몽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를 확인한 라빗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승부를 통해서 상단의 나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당연히 빼앗아 갈 수 있는 칸의 대장간에 어째서 여지를 남겨 주는가?’ 주민들이 이렇게 의구심을 느끼고 있을 때 상단에서는 광고하는 겁니다. ‘상단은 칸이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칸이라는 대장장이의 실력을 인정하여 존중하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상단이 주민들에게 무조건적인 적이 아닌, 동료도 될 수 있음을 시사해 줄 겁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상단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하겠지요. ‘메로 상단은 무조건 돈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상단이 아닌,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사람을 위해서 움직일 수도 있는 상단이구나.’라고.”

“…그래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충성도 높은 고객이고 말인가?”

“예.”

“흠.”

발몽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왕 일이 진행 되가고 있는 것을 굳이 말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발몽은 라빗에게 지원해주기로 결심했다.

“뛰어난 대장장이를 고용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승부겠지?”

“물론입니다.”

“더군다나 상대는 칸 본인도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뜨내기 녀석이라고?”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직업이 대장장이는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명성이 빈약한 청년입니다.”

“좋아. 최고로 뛰어난 대장장이를 고용하게! 내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돈은 걱정하지 말고!”

발몽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으나 결단만큼은 빠르다는 장점을 가졌다.

애초에 뚜렷한 장점이 없다면 무슨 수로 거대 상단의 주인이 되었겠는가?

라빗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물색해 놓은 인물이 있습니다.”

칸의 컨디션이 아무리 최악일지라도, 치매가 걸린 게 아닌 이상 어중이떠중이를 자신의 대타로 내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라빗은 그리드라는 청년을 경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 만났을 때도 볼품없는 청년이었고, 자세히 조사해 보니 이렇다 할 경력도 없었다.

경계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싼값으로 적당한 대장장이를 골라서 출전시켜도 승부에서 패할 리 없다는 확신이 들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방심 유발자.’

하지만 라빗은 신중한 성격을 가졌다. 어떤 일이든지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의 대장장이를 고용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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