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2화 (18/1,794)

제3장

라빗의 제안

그리드와 유페미나는 혹시라도 기사들에게 따라잡힐까 염려하며 똥줄 타게 내달렸다.

지하 감옥의 1층과 2층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던 유페미나 덕분에 두 사람은 헤매지 않아도 되었고, 간신히 지하에서 벗어나 지상까지 도달했다.

찬란한 햇살! 푸르른 하늘! 녹색의 잔디밭!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악취가 진동하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과는 달리 밝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지면서 시야에 가득히 들어오자 그리드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으하하하하핫!! 탈출 성고옹~!!!”

그리드와 유페미나가 사투를 벌였던 지하 감옥은 동쪽 내성 벽을 등지고 세워진 타워에 설치되어 있다.

현재 두 사람은 그 타워로부터 빠져나온 것으로, 바로 머리 위 성벽에는 망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시끄럽게 떠들었다가는 망루의 보초병들에게 즉각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조용히 좀 해요. 우리는 아직 적진 한가운데에 있다고요.”

유페미나가 그리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지만, 그리드는 탈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던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키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맡아 보는 맑은 공기냐! 지하 감옥은 썩은 습기가 가득 차서 공기가 너무 나빴어! 심지어 코랑 폐가 썩어 들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공기란 참 중요해! 도시 사람들이 왜 시골 공기를 동경하는 건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좋다고 얼씨구나, 떠들어 대더니 급기야 잔디밭 위로 몸을 날려 뒹구르르 굴러다니는 그리드의 모습이 그야말로 발정난 개 같았다. 통제 불능인 것이다.

유페미나는 골치가 아팠다.

비록 대부분의 병사들을 해치우기는 했지만, 아까 전 기사들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보자면 영주의 친위대만큼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듯했다.

친위대라 하면, 기사보단 못해도 일반 병사를 초월하는 레벨과 실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유페미나는 그들과의 대면을 원치 않았다. 최악의 경우, 그들에게 발을 묶여 있다가 지하에서 뒤따라 나온 기사들에게 협공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 그리드,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곳을 피해야만 해요. 그러니까 좀 조용히…….”

“후아~~ 고작 잔디의 냄새가 이렇게 맑고 상쾌하게 느껴질 줄이야! 솔잎 향 부럽지 않네!”

“…….”

유페미나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것이다.

“…….”

결국 유페미나가 행동에 나섰다. 잔디밭에 코를 처박고 킁킁거리고 있는 그리드에게 성큼 다가가더니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버렸다.

그리고 당황하는 그리드의 귀에다가 바짝 입을 가져다 대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고함쳤다.

“내! 가! 조용히 하라고 했죠?! 당신은 뇌가 없나요?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라고요!! 당장 조용히 도망쳐도 위험한 판국에 언제까지 뒹굴거리면서 떠들어 댈 작정인가요!!! 네에?!”

“으아아악~!!”

바로 귀에다가 대고 앙칼지게 소리치자, 그리드로서는 고막이 파열한 듯한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몸부림치는 그리드에게 유페미나가 확실히 못 박았다.

“당신, 더 이상 바보인 척 연기하면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요. 저는 어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제대로 하라고요. 만약에 또 한 번 바보처럼 굴면 그때는 퀘스트고 뭐고 정말로 죽여 버릴 테니까.”

유페미나는 그리드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드를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자꾸 성질을 긁자 화를 못 이기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유페미나를 두려워하고 있던 그리드는 정말로 살해당하는 게 아닐까, 벌벌 떨던 중 문득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유페미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말이야… 역시 쟤들은 적이겠지?”

불길한 예감!

유페미나는 그리드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 좌절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무장한 16명의 친위대가, 마치 자로 잰 듯한 움직임으로 대열을 맞춰 등장한 것이다.

채채채챙!

일제히 뽑힌 16자루의 검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성안 곳곳을 번쩍이게 만든다.

그에 눈부심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투덜거렸다.

“계집애가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그렇게 크게 떠들어 대니까 적들이 몰려나오지.”

유페미나가 울컥했다.

“당신이 먼저 떠들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진심 어린 살기를 내뿜는 유페미나!

그에 잔뜩 겁먹은 그리드가 벌벌 떨었다.

“미, 미안. 내가 잘못했다. 말실수한 거니까 한 번만 봐줘.”

유페미나는 두통을 느꼈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콘셉트를 잡고 있는 거야? 왜 자꾸 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거지?’

그리드는 북부의 신성이라고까지 불린 기사를 일대일로 상대해서 해치웠다. 그리고 4명의 기사들을 존재감만으로 압도했다.

그 실력, 직접 견식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리드는 강하다. 그만한 남자가 Satisfy 내에서 두려워하는 게 존재할 리 만무하다.

그렇게 확신한 유페미나가 치를 떨었다.

‘이 남자는 그냥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거네.’

유페미나는 처음부터 그리드가 싫었다.

아이템 제작 승부 현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하였을 때, 그리드는 유페미나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도 현혹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유페미나에게는 충분히 굴욕적인 사건이었고, 그도 모자라 그리드에게 온갖 폭언까지 들었었다.

꼬맹이라느니, 여우라느니, 재수 없다느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욕을 먹다니? 그것도 남자에게서!

유페미나로서는 평생 잊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그때 친위대의 후위에서부터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중년인이 등장했다.

그의 정체는 로우 남작.

바로 그가, 메로 상단을 윈스톤으로 끌어들여 윈스톤 주민들의 삶을 피폐해지게 만든 장본인, 윈스톤의 영주였다.

“너희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너희에게 모조리 당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하… 하하하!! 믿을 수가 없군!”

로우 남작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고작 한 명의 침입자와 한 명의 탈옥범에게 모든 군사를 잃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군사가 없이는 백성을 통제할 수 없다. 이제 백성들이 스테임 백작을 찾아가는 걸 막을 방도가 없으니 머잖아 스테임 백작에게 내 악행은 모두 고해질 것이고, 그리되면 내 목숨과 가문은 끝이다.”

자신의 운명이 이로써 끝장났음을 깨달은 로우 남작은 극도로 분노했다.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 간 그리드와 유페미나를 결단코 용서할 수 없었다.

“놈들을 쳐라! 저놈들을 반드시 죽여서 사지를 찢어 놓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쩌면 최후가 될 수도 있는 영주의 명령을 받든 16명의 친위대가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설령 기사라 할지라도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영주 친위대의 필승 전략이다.

하지만 유페미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마왕의 꼬리 불.”

“윽?!”

친위대 전원이 일제히 신음을 터뜨렸다. 무장한 갑옷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탓이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화르르르륵!!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새파란 불길이 친위대원들의 몸에서부터 솟아났다.

“으아아악!!”

“이, 이게 무슨…………! 크악!”

끔찍한 비명 소리와 고통에 찬 몸부림은 잠시간만 이어졌다.

친위대원들이 갑옷째 잿더미로 화해 버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헐.”

“마, 말도 안 되는…….”

고작 마법 하나로 16명의 친위대를 전멸시키다니!

그리드와 로우 남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경악한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이때, 유페미나는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드 때문에 한계치까지 다다랐던 스트레스가 친위대를 해치우면서 해소된 덕분이었다.

‘과연 영주의 친위대다워. 경험치가 꽤 짭짤한걸?’

그녀를 보면서 그리드와 로우 남작은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귀신도 피할 미친년…….’

‘악마다. 저 계집은 악마야.’

그 후, 로우 남작은 유페미나에게 포박당했다.

포승줄에 묶여서는, 보신탕집 끌려가는 개처럼 바들바들 떨며 질질 끌려갔다.

그리드는 다시금 다짐했다.

‘세상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저 여자의 심기는 절대로 건드리지 말자. 자칫했다간 나도 저 꼴 당할라.’

후로이가 기사들의 발을 꽤 묶어 두었던 건지, 기사들의 추적은 아직까지 느껴지지 않았다.

유페미나는 서둘렀고, 세 사람은 무사히 성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 밖에서 의외의 인물과 조우했다.

다름 아닌 메로 상단의 2인자, 라빗이었다.

10여 명의 거구들을 거느린 그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었다.

영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오! 라빗이 아닌가! 소식을 듣고 날 구원하고자 달려온 겐가!”

그리드가 긴장했다.

‘이런… 메로 상단에서 파견한 원군인 건가?’

그리드가 속으로 낭패를 외치는 사이 유페미나가 성큼성큼 라빗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라빗의 부하들의 면면을 살펴본 뒤 물었다.

“이들이 아까 말했던 사람들인가요?”

라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들은 본래 발몽의 부하였지만 발몽의 포악한 성정에 실망하고 저를 따르게 된 인물들로, 검술과 창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의 발목을 붙잡을 일은 없을 겁니다.”

“한눈에 봐도 강할 것 같아요. 잘됐네요. 의지할 수 있겠어요.”

마치 친한 사이처럼 웃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

그리드는 극도의 불안을 느꼈다.

‘저 둘의 사이가 어떻게 저렇게 가까운 거지? 가만, 애초에 유페미나는 메로 상단에서 고용했던 계집이잖아? 그러면 뭐야? 유페미나가 날 구한 건 함정이었다는 건가!’

그리드의 추측은 이러했다.

1. 윈스톤 영주와 메로 상단은 한패다.

2. 메로 상단에게 고용된 유페미나도 결과적으로 영주와 한패다.

3. 1번과 2번을 통해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유페미나가 적이라는 사실이다.

유페미나가 정말로 영주와 한패였다면 영주의 병사들을 몰살시켰을 리 없다. 그리고 영주를 포박해서 개처럼 질질 끌고 다닐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 유페미나가 적이라면 그리드를 굳이 감옥에서 구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현금으로도 고가에 팔릴 유니크 등급의 단검을 되돌려줬을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너무 당황한 상태라 깊은 생각이 불가능했다.

그저 단순하게 유페미나가 적이라고 판단할 뿐이다.

‘엿 됐다……. 머리 검은 짐승을 쉽게 믿어선 안 되는 법이거늘! 나는 저 계집이 잠시 보인 호의에 속아 믿고 따라다니다가 결국 큰코다치게 생겼구나!’

언젠가 보았던 사극의 대사를 마음속으로 따라 해 보면서 그리드는 결심했다.

‘순순히 당할 순 없어. 스탯 분배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할 생각이었었지만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상태창.’

이름:그리드

레벨:45 (3,400/238,000)

직업:파그마의 후예

*아이템 제작 시 추가 옵션을 더하는 확률이 상승합니다.

*아이템 강화 확률이 상승합니다.

*모든 장비 아이템을 조건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 등급에 따른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상태 이상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일 때 잘 죽지 않습니다.

*쉽게 인정받습니다.

칭호:최초의 유니크 아이템 제작자

*손재주 +200

칭호:나이트 슬레이어

*체력 +100

*근력 +30

칭호:정의의 사도

*모든 능력치 +10

*정의의 사도는 용맹무쌍합니다.

생명력:2,964/2,964 마나:243/243

근력:166 체력:244 민첩:118 지력:91

손재주:391 끈기:82

평정:66 불굴:74 위엄:66 통찰력:66

용기:10

능력치 포인트:240

무게:842/4,960

그리드의 상태창은 비상식적으로 화려했다.

고작 45레벨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탯의 총합만 놓고 보자면 100레벨 중반대 유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끈기, 평정, 불굴, 위엄, 통찰력, 용기와 같은 레어 스탯을 무려 6개나 개방하고 있다는 점이 압권이다.

그뿐이랴? 칭호도 4개나 소유하고 있다.

본래 칭호라는 건 얻기가 굉장히 힘든 것으로, 칭호를 4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유저는 최상급 랭커들 사이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45레벨에 벌써 4개의 칭호를 가졌다.

Satisfy에서 유일한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다운, 그야말로 압도적인 상태창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족하고 기뻐하기는커녕 불만투성이었다.

‘밤낮 없이 망치질하면서 아이템 만들어서 스탯 노가다 하고, 터무니없이 어려운 고난이도 퀘스트들을 개고생하면서 클리어했는데도 고작 이 정도야? 심지어 21레벨 때 기사랑 일대일로 싸워야 했을 정도로 심하게 고생했다고? 근데 고생한 거에 비해서 결과가 너무 허접하잖아? 이런 염병. 지금쯤이면 모든 스탯이 300 정도씩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무슨 레전드리 직업이 이렇게 허접하냐. 빌어먹을……. 유페미나 저 계집은 고작 에픽 직업 가졌으면서도 온갖 마법을 쉴 틈 없이 난사할 정도로 OP인데 난 스킬도 죄다 제작 관련이고……. 아… 불행하다.’

그리드는 속으로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유페미나와 라빗 일행의 무장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유페미나는 마법사답게 로브 한 장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고, 라빗은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체인 메일과 한 손 검을, 라빗의 부하들은 레더 아머와 창, 검, 활 등의 각종 무기를 무장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사람이 없으니까 공격력만 높이면 유효타를 쉽게 넣을 수 있겠는데……. 하지만 난 지금 안 그래도 방어구가 없는 상태니까 체력을 높여서 생명력과 방어력을 높이는 편이 전투 지속력에 도움이 될 거고… 민첩성은 이상적인 단검이 있는 이상 충분하고…….’

한시가 급한 상황!

그리드는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능력치 포인트 150을 근력에, 90을 체력에 투자한다.’

그리드는 근본적으로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능력치 포인트를 손재주에 투자하는 편이 현명하다. 손재주가 높을수록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확률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태생은 전사였다. 전투력을 강화시키고 싶다는 기본 욕구가 그의 저변에 깔려 있었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근력과 체력을 높이는 게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어차피 손재주 스탯은 아이템을 제작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자연히 성장하기도 하니까, 굳이 능력치 포인트를 투자하기에 아까운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더군다나 유페미나와의 아이템 제작 승부에서 ‘최초의 유니크 제작자’라는 칭호를 얻은 덕분에 손재주 스탯이 무려 200이나 추가된 상태다.

그래서 그리드는 손재주 스탯에 대해서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능력치 포인트 150개를 근력에 투자합니다. 맞습니까?]

‘그래.’

[한번 투자한 포인트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대로 진행합니까?]

‘어.’

[능력치 포인트 90개를 체력에 투자합니다. 맞습니까?]

‘맞아. 되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빨리빨리 진행해라, 좀.’

[변경된 능력치가 적용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리드의 근력 스탯은 316이, 체력 스탯은 334가 되었다.

현재 대장장이 유저들의 평균 근력이 80가량이고 평균 체력이 100인 점을 감안해 보면, 그리드의 근력과 체력은 터무니없이 높은 것이었다.

아니, 굳이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투 계열 직업군과 비교하는 편이 그리드의 스탯의 위대함을 더 확실히 설명해 줄 수 있을 듯하다.

45레벨을 기준으로, 공격력을 중시하는 전투 계열 직업군의 평균 근력은 210이고 평균 체력은 100이다. 방어력을 중시하는 전투 계열 직업군의 평균 근력은 100이고 평균 체력은 230이다. 속도를 중시하는 전투 계열 직업군의 평균 근력은 120이고 평균 체력은 80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45레벨 전투 계열 직업군의 순수한 스탯 총합이 500 미만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일반 유저들과 비교하면 그리드의 스탯은 그야말로 굉장한 것이었다. 독보적임을 넘어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이 강하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슈르 백작과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도란과 유라, 그리고 레오와 유페미나.

레전드리 직업으로 전직하기 직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갖 사건에 휘말리면서 고난이도의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니 연달아 강한 존재를 만나온 탓에, 그리드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약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진실은 어떠한가? ‘이상적인 단검’까지 장착한 상태의 그리드는, 100레벨대 전투 계열 직업군보다 강력하다.

정비를 마친 그리드가 유페미나와 라빗에게 검을 겨누려 하는 순간이었다.

“이보게, 라빗! 그 악마 같은 계집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겐가! 어서 나부터 구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로우 남작이 외치자 라빗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겁니까? 저는 이곳에 당신을 도우러 온 게 아닙니다. 애초에 당신의 성에 유페미나 님을 침입시킨 장본인이 바로 저니까요.”

“뭐?”

“엉?”

로우 남작과 그리드가 동시에 놀란다.

라빗이 폭탄 발언을 했다.

“저는 더 이상 메로 상단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발몽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도움을 받아 윈스톤의 상권을 장악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후부터는 아예 눈에 뵈는 게 없어졌지요. 시국을 읽지 못하고 향음에 빠져 지내는 자의 최후란 불 보듯 뻔한 법. 저는 메로 상단의 미래에 암운이 끼었다고 판단하고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금일, 저는 당신과 발몽을 처단할 각오입니다.”

로우 남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놈! 배신자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구나! 네놈이 무슨 권리로 우리를 처단하겠다는 게냐! 고작 상인 나부랭이 따위가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겠다는 건가!”

“당신의 말대로 저는 상인입니다. 그렇기에 오로지 이윤에 따라서 움직이지요. 정의감 따윈 없습니다. 그런 제가 당신과 발몽을 처단코자 하는 이유는 모두 이분께 있습니다.”

라빗이 그리드를 가리켰다.

그리드로서는 영문 모를 일이었다.

“잉? 나?”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그리드에게 라빗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드 님. 유페미나 님께 이번 일을 맡긴 게 정답이었군요.”

“그보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메로 상단을 배신한 이유가 나라니?”

빙그레 미소 지은 라빗이 설명했다.

“저는 당신의 대장장이 솜씨를 목격하고 새로운 미래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미래?”

“그리드 님 스스로도 잘 아시겠지만, 당신의 대장장이 솜씨와 잠재력은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언젠가 당신의 작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큰돈을 벌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장사를 할지언정 사업은 하기 힘든 법. 버는 돈의 단위에 분명한 한계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상인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쌓아 온 경험과 구축해 온 인맥, 인프라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당신을 돕겠습니다. 이 북부, 더 나아가 에트날 왕국 전체, 또 더 나아가 타국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제작한 작품을 사용하게 되게끔 제가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라빗이 포부를 밝혔다.

“중소 상단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익을 올리는, 초우량 대장간을 우리 둘의 힘으로 만들고 이끄는 겁니다. 당신과 저의 힘이 합쳐진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윈스톤의 주민들에게 이미지를 쇄신하고 호감을 얻어야만 하지요. 하여, 저는 그 수단으로서 당신을 구출하고 메로 상단과 영주를 처단할 각오를 다진 겁니다.”

“에… 그러니까, 당신은 나랑 함께 일하고 싶어서 내게 호감을 얻고자 메로 상단을 배신했다는 거지? 유페미나를 보내서 날 구출하기까지 하고?”

“맞습니다.”

“그래, 그건 이해했어. 근데 왜 윈스톤의 주민들에게까지 호감을 얻으려는 거야?”

“우리의 사업은 칸 님의 대장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니까요. 규모며, 지리적 이점이며, 현재 시점에서는 사업의 거점으로 삼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 바로 칸 님의 대장간입니다. 즉, 제가 칸 님의 대장간에 취직을 해야 하는 건데, 윈스톤 주민들에게 원망을 사고 있어서야 취직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이해했어. 하지만 정확히 어떤 식으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거지? 영 감이 안 잡히는데?”

설명하려는 라빗에게 유페미나가 재촉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만큼 시간이 많던가요? 서두르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드 님, 아쉽지만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만나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저는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드에게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라빗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남자가 이제는 사업 파트너가 되자는 이야기를 꺼내다니……. 급작스러운 전개에 적응 못한 그리드는 혼란스러웠다.

“안 되겠다. 피곤해서 그런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가. 일단은 로그아웃해서 쉬자.”

떠나려는 그리드를 유페미나가 불러 세웠다.

“이봐요, 그리드, 뭐 잊은 거 없나요?”

‘저 계집, 날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퀘스트 때문에 날 구출한 거면서 더럽게 생색내내. 하지만 뭐… 쟤가 날 구해 준 건 사실이고, 유니크 등급의 단검까지 되찾아 줬으니…….’

유페미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리드는 후로이를 구출하는 퀘스트를 시도조차 못해 보고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리드가 유페미나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고마웠다.”

그에 유페미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고작 그런 말 들으려고 불러 세운 것 같아요? 당신 설마 잊은 건 아니겠죠?”

“뭘?”

“유니크 등급의 오브 만들어 주기로 했던 약속이요.”

“이, 잊을 리가 있냐?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사실은 잊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잊고 있었더라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페미나에게 원한을 사고 언젠가 살해당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리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들어 줄게. 대신 오브의 제작법이 필요해.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도.”

그리드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유페미나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오브를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유페미나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약속을 지키는 걸까?

아니다.

그리드가 유페미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공짜 제작법을 익힐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뿐이랴?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제작 관련 스킬의 경험치가 오르는데, 공짜 재료를 이용해서 스킬 경험치를 올릴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알았어요. 그러면 제작법을 구한 뒤에 연락하죠.”

그렇게 유페미나 일행과 그리드는 작별했다.

혼자가 된 그리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라빗과 손을 잡는다면, 정말로 중소 상단과 맞먹는 수익을 올리는 대장장이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리드는 자신의 직업이 충분한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빚쟁이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쩌면 외제차를 끌고 다닐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라빗이 말한 미래는 규모 자체가 다르다.

중소 상단의 수익을 현금으로 환산하면 잘나가는 중소기업의 수익에 못지않다.

만약 그에 맞먹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초우량 대장간을 이끌 수만 있다면, 그리드는 그야말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외제차가 문제가 아니야. 수십억대를 호가하는 저택에 살면서 수백만 원짜리 위스키를 마실 수도 있어. 그 정도 재력을 갖춘다면 아영이도 나에게 반할 테고!’

그리드는 전율했다.

한편, 그리드와 작별한 라빗은 유페미나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드 님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더군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뭐라고요? 저 남자가 저를 두려워하고 있다니, 그게 말이 되나요?”

유페미나가 실소했다.

“그리드는 북부의 신성이라고까지 불리는 기사를 일대일로 해치운 실력자예요. 한술 더 떠서, 네 명의 기사들을 존재감만으로 압도했죠. 그처럼 막강한 남자가 세상에 두려워할 게 있을 것 같나요? 저 남자는 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뿐이지 실제로 두려워한다거나 그런 게 절대로 아니에요.”

“호오… 아니?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라빗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드 님이 기사를 상회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요?”

“네.”

“그리드 님은 대장장이지 않습니까?”

“네, 대장장이인 건 확실하죠. 근데 강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정체가 뭔지 저도 모르겠어요.”

“…….”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대장장이이면서 동시에 강하기까지 하다?

라빗은 그리드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설마 그는…….’

전설 속 대장장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파그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저 뛰어난 대장장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그와 관련된 문헌들을 찾다 보면 사실 그의 정체는 대장장이라고 딱 잘라 규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라빗은 알고 있었다.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한 자라면… 뛰어난 대장장이 솜씨를 가졌음은 물론 전투 능력도 탁월할 테지. 그리드 님은 파그마의 후예인 것인가? 맞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설마 자신이 사업 파트너로 결정한 대상이 전설을 계승할 존재였을 줄이야!

라빗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이건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겠군. 설마 내게 파그마의 혼이 담긴 작품을 판매할 기회가 찾아오게 될 줄이야.’

파그마의 후예와 함께 일한다면 중소 상단의 수익 정도가 아니라 거대 상단의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었다.

라빗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걸음을 재촉한 그는 예정된 시간에 맞춰서 메로 상단으로 쳐들어갔다.

“라, 라빗! 네놈이 감히 날……!”

영주의 성이 침입자에게 궤멸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했던 발몽과 필립슨은 불의의 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붙잡혔다.

필립슨은 납치한 어린 여자아이를 능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한 유페미나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발몽과 로우 남작은 나란히 프론티어로 후송되었다가 스테임 백작에게 처형당했다.

한데 여기서 변수가 발생했다.

“라빗이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기로부터 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메로 상단의 2인자로서 긴 세월 활동한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라빗은 윈스톤의 주민들을 핍박한 중죄인 중 하나라 볼 수 있으니, 나는 그에게 10년간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스테임 백작이 고지식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과한 라빗의 실수였다.

라빗은 메로 상단과 로우 남작을 처단한 공헌을 인정받아 자신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예상과 달리 징역을 살게 된 것이다.

라빗은 안타까웠으나 백작이 친히 내린 판결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 님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하게 된 것인가……. 아쉽지만 그나마 공로를 인정받아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해야겠지.”

감옥에 들어간 라빗은 미소 짓고 있었다.

앞으로 새롭게 쓰이기 시작할 전설의 일대기 중 한 페이지를 자신이 장식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윈스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마을에서 도시로 격상되었고, 스테임 백작이 급파한 윈스톤의 새로운 영주는 메로 상단이 독점하고 있던 상권들을 주민들에게 공평히 나눠 주었으며 주민들이 지고 있던 무거운 빚도 변제시켜 주었다.

이로써 활력을 되찾게 된 윈스톤의 주민들은 윈스톤을 악몽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영웅들을 추대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라빗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알고 있나? 원래 그는 메로 상단의 2인자였으나, 발몽과 로우 남작의 악행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기에 궐기하여 메로 상단과 로우 남작의 몰락을 주도하였다네. 메로 상단원이었다는 이유로 현재는 징역을 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크나큰 은인이야.”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알고 있나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예뻤던 그녀는 윈스톤의 주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영주의 성에 홀로 쳐들어갔어요. 그녀야말로 윈스톤에 평화를 찾아 준 주역이죠.”

“젊은 대장장이가 있소이다. 정의감이 투철했던 그 청년은 전 영주와 메로 상단으로부터 윈스톤의 주민들을 지켜 주기 위해 용감히 싸웠소. 칸의 대장간을 지켜 주고자 했으며, 전 영주의 악행을 스테임 백작님께 고발하려다가 체포당한 사내를 구출하고자 스스로 지하 감옥에 뛰어들기도 했소. 내 나이가 올해 여든을 넘겨, 그 청년은 내게 손주뻘이나 다름이 없으나, 나는 나이에 관계없이 그를 매우 존경하고 있소. 그처럼 정의롭고 용맹한 사람은 참으로 드물 것이오.”

한때 메로 상단의 2인자였던 라빗과 이름 모를 미녀, 그리고 젊은 대장장이.

윈스톤을 찾은 여행자들은 주민들로부터 위 세 사람의 이야기(진실보다 미화된)를 끊임없이 접해 들었다. 이는 세 사람의 명성이 윈스톤 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윈스톤의 새로운 영주, 아이린 또한 이름 모를 미녀와 젊은 대장장이에게 큰 흥미를 보였다.

“어차피 그들의 공로는 치하하여야 해요. 되도록 빠른 시일 내로 만나 보고 싶군요.”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