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7화 (23/1,794)

제8장

최초의 레전드리 제작템!

지난 몇 달간 스테임 백작은 북부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야탄의 신전을 철저하게 수색해서 무력 철거시켰다.

야탄교는 처녀를 납치해서 제물로 삼는 사교(邪敎)였기 때문에 응당 처벌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으며, 몇 달 전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뿐인 외동딸 아이린을 납치했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아이린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구출 과정에서 가문 최강의 그림자였던 도란을 잃고 말았다.

격노한 스테임 백작은 야탄교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야탄의 신도들은 대륙 전체에 엄청난 수로 분포되어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같이 끝없이 번식하는 그들을 멸살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윈스톤 교외에도 야탄의 신전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최소한 이 북부만큼은 더 이상의 야탄의 신전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건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야탄교를 증오하고 있는 아이린!

그녀는 윈스톤에서 야탄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야탄의 신도들에게 납치당하여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했을 때 느꼈던 끔찍한 공포는 실로 엄청나서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속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하여, 며칠 전 그녀는 야탄의 신전을 토벌할 군대를 출병시켰다.

하지만 신도들의 거센 저항에 의해서 군대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만 해도 100여 명이었고, 특히 기사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이린이 선포했다.

“신전 토벌대를 재정비하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기필코 신전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세요!”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시키겠다고 결정한 아이린의 의지대로 확장된 토벌대는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출병했다.

아이린은 굳센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목걸이에 걸어 둔 청색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도란… 나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대를 기리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그대의 복수를 해낼 거예요.”

***

<여덟 번째 종>

난이도:SS

야탄 신께 가장 커다란 은총을 받은 존재 중 하나가 된 당신! 지금 당장 에트날 왕국의 북부로 향하여 그곳에서 억압받고 있는 신도들을 구원하라!

북부의 이교도들에게 야탄 신의 위대함을 널리 알린다면, 당신에게 여덟 번째 종의 자리가 내려질 것이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스테임 백작 가문의 군대가 북부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야탄의 신전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신전에 고립되어 있는 신도들 중 최소 300명 이상을 구출하십시오.

지금까지 구출한 신도의 숫자:0/300

퀘스트 클리어 보상:지위 ‘여덟 번째 종’.

*여덟 번째 종:스킬 ‘무한한 신앙’ 생성. 스킬 ‘교리 설파’

생성. 스킬 ‘신벌’ 생성.

퀘스트 실패 시:레벨 -5. 신앙심 -1,000.

윈스톤 왕국 북부의 병사들은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분명히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윈스톤 왕국으로 향하는 유라의 행보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더 강해져야 해.’

얼마 전 유라는 통합 랭킹 7위 아그너스와 대면했다. 그리고 에픽 직업의 위대함을 절감했다. 그리드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이러한 시점에서 획득한 SS급 퀘스트다. 그야말로 천금과 같은 기회인 것이다.

유라는 이번 퀘스트를 기필코 클리어해서 궁극의 목표인 통합 랭킹 1위를 차지할 발판으로 삼을 각오였다.

나는 칸으로부터 160레벨 제한의 한 손 검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제작법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제작에 필요한 재료 목록을 토대로 재료값을 계산해 보니, 검 한 자루를 제작하려면 최소 950골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음… 절묘하게도 맞아떨어지네.”

현재 나의 재산은 총 6,710골드다.

이 돈으로는 모두 7자루의 검밖에 만들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 수 있는 검의 개수도 딱 7자루다.

“딱 7. 7로 맞아떨어지는 거 보니까 예감이 좋은데?”

한국에서 7은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가 아닌가!

나는 행운의 숫자를 믿어 보기로 했다.

“한 방에 딱~! 하고 에픽템이 뜰 것 같군! 훗훗훗훗훗!!”

기분 좋은 예감에 사로잡힌 나는 힘든 줄도 모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20시간 동안 한 자루의 검을 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튼튼한 롱 소드>

등급:노멀

내구력:250/250 공격력:200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롱 소드입니다.

긴 시간 동안 단련된 검으로 쉽게 훼손되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60 이상. 근력 950 이상. 중급 소드

마스터리.

무게:600

“…7이 행운의 숫자라고 맨 처음에 말한 새끼 누구냐? 아오, 죽빵 갈기고 싶네.”

하루가 날아가 버렸다.

심정 같아서는 이 저주받은 노멀템 따위 부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재료값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 없는 게 가난뱅이의 현실이다.

나는 분노로 인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거 얼마에 팔릴까요?”

검을 한참 살펴본 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800골드쯤에 거래될 듯하네.”

“뭐, 뭐요?!”

나는 하마터면 칸의 멱살을 붙잡을 뻔했다.

재료값으로 950골드나 사용했는데 판매가가 고작 800골드라니!

이게 무슨 개소린가!

“본래 사용 조건이 높은 장비일수록 등급이 낮으면 잘 거래되지가 않는 법일세.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칸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160레벨 노멀템과 120레벨 레어템의 기본 성능은 비등하다. 그리고 노멀템에는 옵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반면 레어템에는 옵션이 작게나마 하나 붙어 있다. 그 옵션의 내용이 어떠냐에 따라서 120레벨 레어템이 160레벨 노멀템보다 기능이 더 뛰어날 경우가 많다. 두 아이템의 가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160레벨 노멀템 살 돈으로 120레벨 레어템을 산다.

“즉, 노멀템 따윈 갖다 버려라 이거군…….”

칸이 나를 위로했다.

“그나마 자네가 만드는 장비들은 등급이 낮더라도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큰 손해는 보지 않을 수 있는 걸세. 그 점을 위안으로 삼게나.”

‘그걸 위안이라고……. 하, 진짜 엿 됐다.’

앞으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검은 총 6자루다.

앞으로 무조건 2분의 1 확률로 에픽템이 떠야만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게 됐다.

“젠장, 이번엔 반드시!!”

독기를 품은 나는 극도로 정신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정성을 쏟아부어서 검을 만들었다.

20시간 후.

두 번째 결과물이 탄생했다.

<튼튼한 롱 소드>

등급:노멀

내구력:250/250 공격력:200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롱 소드입니다.

긴 시간 동안 단련된 검으로 쉽게 훼손되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60 이상. 근력 950 이상. 중급 소드 마스터리.

무게:600

“야, 이 씨#@!$%~! 운영자 이 @#$:) 새끼가! 조작질도 적당히 해라, 이런 씨[email protected]#넘아! 아니, 이런 개 거지같은 경우가 있냐, 무슨!!”

화를 못 이겨서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내게 칸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힘내게.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오는 법일세. 그 시련을 견뎌 내면 반드시 광명이…….”

“아, 말 시키지 마요! 지금 나 짜증 나니까!”

“…….”

칸을 밀쳐 내고 대장간을 뛰쳐나간 나는 하늘을 향해서 소리쳤다.

“운영자 이 쓰레기 같은 놈들아!! 너희들 이 이상 확률 조작질 해 대면 소비자권리센터에 고발해 버릴 테니까 적당히 해라!!! 이런 개#[email protected]!#!!”

난 최고의 재료들을 엄선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모든 제작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

운영자 놈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가 불쌍해서라도 언제까지고 노멀템만 나오게 조작질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3번째 검의 제작에 돌입했다.

따앙! 따앙! 따앙!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망치질만 하고 있다. 어깨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쳤지만 나는 망치질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젠 자존심 문제다.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언제까지고 노멀템만 만들어 댈 순 없다. 기필코 운영자의 농간에서 벗어나 에픽템을 만들어 내고 말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니크템이나 레전드리템을 만드는 게 목표였던 내가, 이제는 에픽템을 목표로 삼고 있다니.

하지만 어쩌랴? 에픽템은커녕 레어템도 잘 안 만들어지는 마당이니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지.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도무지 입맛이 없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멍한 얼굴로 깨작거리는 나를 어머니가 걱정하셨다.

“얘, 영우야,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엄마가 오래간만에 실력 발휘해서 갈비찜까지 만들었는데, 왜 고기는 안 먹고 5분째 뼈다귀만 빨아 먹는 거니?”

“저같이 한심한 녀석에게 고기를 먹을 자격 따윈 없으니까요…….”

현실 시간으로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Satisfy에서는 6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만든 검은 총 6자루였고, 그 결과물은 3개의 노멀템과 1개의 레어템, 그리고 2개의 에픽템이었다.

이제 퀘스트 기한까지 만들 수 있는 검은 단 1자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데, 에픽 등급의 검을 2자루밖에 만들지 못한 것이다.

‘망했어……. 나는 망했어…….’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 20시간 이상을 투자할 경우, 체감하기로 에픽템이 만들어지는 확률은 3분의 1에 가깝다.

즉, 남은 1자루 검을 만들어 봤자 에픽템이 뜰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는 뜻이다.

행정관과의 거래는 이대로 파기될 가능성이 높았다.

‘레전드리 직업을 갖고도 고작 에픽템을 못 만들고 있다니……. 나라는 놈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한심한 놈이다.’

좌절에 휩싸여 있노라니 세희가 내 밥그릇 위에 갈비 살점을 얹어 주고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오빠는 원래 항상 한심했잖아? 여태까지 밥만 잘 축내고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 약한 모습 보일 필요가 있어? 요즘 오빠가 어떤 역경을 겪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오빠의 유일한 장점은 포기를 모르는 끈기잖아? 그치? 오빠가 초등학교 6학년 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통틀어서 자기만 구구단 못 외운다면서 이틀 밤새더니 결국 구구단 완벽하게 외웠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좌절하지 말고 끈기 있게 해 봐. 그러면 오빠는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일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세, 세희야… 너 뭐 잘못 먹었냐?”

어울리지 않게 나를 위로해 주는 세희를 보면서 이질감을 느낀 나는 어머니께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아무래도 갈비가 잘못됐나 봐요. 이거 소갈비죠? 광우병 걸린 소로 만든 거 아니에요?”

“이거 돼지갈비거든?!”

빠악!

세희가 집어 던진 갈비뼈가 내 마빡을 강타했다.

콧잔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갈비뼈를 잡아 식탁 한쪽에 올려놓은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째서 나는 밥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폭행을 당하는 걸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나는 가족들에게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건가?

식사가 끝난 후.

곧장 방으로 돌아와 캡슐에 앉은 나는 Satisfy에 접속했다.

칸이 나를 반겨 줬다.

“잘 자다 왔는가? 푹 쉬면서 근심 좀 덜어 낸 게지?”

“칸 영감님, 저는 그냥 다 내려놓기로 결정했어요.”

“응? 뭘 내려놔?”

“마음을 비우렵니다. 집착을 버리렵니다. 어차피 제 미천한 실력으로 만든 물건들은 성에 납품할 가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고요.”

“아니, 자네 그 무슨 말인가? 파그마의 후예인 자네가 어찌 그리 나약한 말을 하는가!!”

칸은 진심으로 노여워했다.

남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실력과 재능을 가진 내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니, 그는 평범한 대장장이로서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질타해 오는 그를 무시한 나는 용광로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 7번째 검의 제작을 시작했다.

‘더 이상은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겠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봤자 결과물의 등급은 어차피 랜덤으로 결정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최고의 재료를 엄선하고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내가 바보 같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탄생하기를 바라 왔던 이전과 달리 그냥 묵묵히 작업에 임했다. 그동안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서 아이템을 제작했다.

검신이 번쩍번쩍 예리한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바깥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이다.

온갖 잡생각을 비우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경고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행정관과의 거래(1)>의 기한이 앞으로 2시간 남았습니다. 2시간 내로 퀘스트를 완료해 주십시오.]

이제 앞으로 2시간 후면 ‘퀘스트 실패!’라는, 사람 놀리는 듯한 알림창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냉소하면서 검의 마무리 제작 단계에 돌입했다.

잠시 후, 완성된 검의 정보가 떠올랐다.

<무아지경의 검>

등급:레전드리

내구력:365/365 공격력:356 공격 속도:+6% 명중률:+10% 공격 방어율:+10%

*매 공격 시 대상의 레벨 +200의 추가 피해.

*스킬 ‘무아의 경지’ 생성.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모든 욕망과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기술만으로 승부하여 제작한 검입니다.

장인은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을 완성시켰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60 이상. 근력 95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2레벨.

무게:400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5 영구적으로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칭호 ‘유일한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유니크 아이템을 만들었을 때 획득한 칭호는 ‘최초의 유니크 아이템 제작자’였다.

하지만 레전드리 아이템을 만들고 획득한 칭호에는 ‘최초’가 아니라 ‘유일’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Satisfy에서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나, 파그마의 후예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

나는 대장간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칸을 확인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원하는 아이템을 만들 수가 없어 분노에 차 있던 나는 매번 칸에게 화풀이를 했었다.

나에게 조언과 격려를 해 주려던 그의 모든 호의를 짓밟고 오히려 차갑게만 대했다.

그에 칸은 내게 엄청난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봐라. 지금만 해도 얼마나 외로워 보이는가?

칸은 내가 나쁜 놈으로 보일 것이다. 내게 이 대장간을 물려줘도 되는 건지 진지하게 의문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중노동으로 인해 근육이 잔뜩 뭉쳐 있는 그의 양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칸 영감님, 그동안 죄송했어요. 내게 많이 서운하셨죠?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외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그리드……?”

칸은 내가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자 매우 당황했다.

“설마 자네! 이번에도 낮은 등급의 검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프레일 강에 투신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응?!”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나는 절박하게도 외치는 그에게 내가 만든 검을 보여 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 이걸 보세요.”

“헉!”

칸이 전율했다.

“이건… 이건 희대의 역작……!! 커, 커허헉!”

“이, 이봐요! 칸 영감님!! 칸 영감님!!!”

너무 놀랐기 때문일까!

칸이 호흡을 곤란해하면서 고통 속에 쓰러졌다!

“안 돼! 죽지 마!! 죽으면 안 된다고!!!”

칸은 내게 전직 퀘스트를 준 장본인이다.

그리고 난 아직 전직 퀘스트를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전직 퀘스트를 클리어하기까지는 아마도 엄청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때까지 칸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한다.

“제기랄!!”

나는 칸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전력으로 질주해서 진료원까지 데려갔다.

잠시 후, 진찰을 마친 의원이 활짝 웃었다.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일시적인 쇼크에 의한 증상일 뿐이며 향후 활동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겁니다.”

“저, 정말이죠?”

“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이만 눈물을 거두시죠.”

“뭐, 뭣! 누가 울었다고 하는 겁니까!!”

내가 따지고 들자 의사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큭……!”

부끄러운 마음에 진료소에서 도망쳐 나온 나는 영주의 성을 향해서 힘껏 내달렸다.

“이런 염병!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내가 울었다고? 핫! 미친! 세상에 NPC 때문에 우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내 인벤토리에는 2자루의 에픽 검과 1자루의 레전드리 검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윈스톤 성.

1천 명의 병사와 8명의 기사로 구성된 신전 토벌대가 패배해서 돌아왔다. 사상자는 무려 400명에 육박했다.

아이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적의 숫자는 고작 150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요? 야탄의 신도들이 제아무리 강하다지만, 이 정도 참패는 비상식적인 거 아닌가요?”

이번 토벌에 참전하지 않고 아이린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단장 피닉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보고에 따르면, 야탄의 신도들 중에는 굉장한 실력자가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사들조차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고…….”

“설마 그는……?”

아이린의 의문을 읽은 피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마도 그… 아니, 그녀는 소문의 ‘일곱 종’ 중 하나인 듯합니다.”

야탄 신에게는 7명의 종이 있다고 한다.

야탄 신의 은총을 받은 그들은 매우 강력하여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였다고까지 알려져 있다.

“어떻게 그런 거물이 이런 변방에…….”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귀족들이 지레 겁먹고 혼란스러워했다.

“자칫 일곱 종과 적대하게 되었다간 이 윈스톤이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스테임 백작님께 원군을 청하는 것이……!”

그에 반해 아이린은 침착했다.

귀족들을 무시한 그녀가 피닉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곱 종에 대한 소문은 과장되었던 것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일곱 종이 정말로 소문대로 막강한 존재였다면 신전 토벌대는 전멸했었어야 정상이잖아요?”

피닉스가 공감했다.

“예. 일곱 종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강하지 못한 듯합니다.”

아이린이 청색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우리의 손으로 일곱 종 중 한 명을 해치우게 된다면 야탄교는 심대한 타격을 입겠죠. 도란의 넋을 기리기에 충분할 거예요.”

“무슨……!”

마치 일곱 종과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린에게 귀족들이 반발하려 했다.

한데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행정관님! 영주님! 두 분께서 꼭 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시급을 요하는 일이면 영주와 귀족들의 회의에 난입했겠는가?

회의실의 모두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를 따라서 이동했다.

성의 정원.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분수대 앞에 흑발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한 눈빛으로 분수대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주변을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분수대 속으로 다이빙했다.

“…저자는 누구죠? 뭘 하는 거죠?”

아이린의 질문에 행정관이 대답했다.

“바로 저 청년이 이번 경매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출품했던 대장장이 그리드입니다. 하지만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는 저 또한 도통 모르겠군요. 왜 분수대에서 헤엄을 치는 거지?”

행정관이 집사에게 시선을 돌리자 집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저분을 응접실로 안내하려고 했습니다. 한데 저분께서 정원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다며 이곳에 남으셨죠. 제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입니다. 저분이 어째서 분수대에서 헤엄을 치는 건지 저 또한 경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청년이 물속에서 나왔다.

“푸하! 역시 돈이었어!!”

청년의 손에는 1골드짜리 금화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는 홀딱 젖은 몸으로 춥지도 않은지 그저 기뻐하며 금화에 키스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내 생에 돈을 줍는 날이 올 줄이야……! 크으윽! 26년 살면서 처음 겪는 짜릿한 행운이다!”

그를 보면서 피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내가 며칠 전에 잃어버렸던 금화인 거 같은데…….”

“…….”

피닉스를 무시한 아이린이 집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급히 오라고 한 거죠?”

집사가 심호흡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분은 행정관님께 검 3자루를 납품하기 위해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한데… 저분이 납품할 검들의 수준이 저같이 미천한 자의 눈으로 보아도 가히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는 영주님께서 친히 확인해 보심이 좋을 듯하여 감히……. 크흠, 죄송합니다. 급한 일도 아닌데 제가 너무 흥분하여 회의 중에 난입하는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흠…….”

집사는 스스로를 미천하다 말하지만, 그가 영주 성의 집사가 된 것은 다재다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안목은 가히 수준급이다. 그리고 항시 침착했다.

그만한 인물을 앞뒤 분간 못하게 만들 정도로 흥분시킨 3자루 검이란 과연 무엇일까?

모두 다 큰 기대를 품고 그리드에게 다가갔다.

일행을 발견한 그리드가 행정관에게 인사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행정관이 그리드에게 눈치를 주었다.

“우선 영주님께 예의를 갖추시게.”

“영주님?”

그리드가 일행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이린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영주는 젊고 예쁜 처녀라고 했었지.’

그렇게 판단한 그리드가 아이린에게 예를 갖췄다.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윈스톤의 주민들이 말하길, 그리드가 주민들을 위해서 힘써 왔다고 한다.

그에 아이린은 그리드에게 포상을 하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야탄의 신전을 발견하고 거기에 신경을 쏟느라 일정을 미루고 있던 상태였다.

아이린은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금일 이렇게 만나게 된 김에 미뤄 뒀던 포상을 하사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그리드에게 포상을 내리기로 한 결정을 아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사소한 일들 따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놀라게 된 이유!

그것은 바로…

“제가 제작한 세 자루 검입니다.”

“…헉!!”

그리드가 3자루 검을 꺼내 보이자 모두가 경악했다. 집사는 물품을 벌써 두 번째 확인하는 것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또 놀랐다.

그것은 그리드가 제작한 검들이 너무나도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3자루 검 중 2자루는 보기 드문 명검이라 표현할 만했다.

하지만 나머지 1자루는 그 정도로 표현할 수준의 작품이 아니었다.

피닉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검이로다!”

모두 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그리드가 행정관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이거 얼마에 사실 거예요? 분명히 전에 말씀하셨죠? 좋은 물건을 만들어 올수록 훨씬 높은 가격을 쳐주겠다고!”

“으, 으으음……! 그게… 그것이…….”

행정관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번 작품의 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구매 가격은커녕 구매 여부 자체를 영주와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피닉스 경.”

“예, 주군.”

“경께 이 검이 쥐어진다면, 경께서는 일곱 종과 맞수를 펼칠 수 있겠나요?”

피닉스는 패전하고 돌아온 토벌대가 증언한 일곱 종의 실력을 자신의 실력과 비견해 보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비등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니, 제가 조금 더 강합니다. 물론 이 검을 사용할 경우의 이야기지만요.”

이는 과신이 아니다.

피닉스는 북부의 모든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했고, 에트날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그의 듬직한 대답이 아이린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좋아요! 행정관! 이 검을 구매하세요! 가격 책정은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예, 영주님.”

그리드는 아이린이 마음에 들었다.

‘통도 크군. 역시 귀족은 달라.’

과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잔뜩 기대를 품고 있는 그리드를 행정관이 인도했다.

“내 집무실로 가세나.”

“예. 그러면 영주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자주 봐요, 그리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그리드에게 아이린이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키스하라는 의미이며, 이는 귀족 여성이 상대방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그리드의 대장장이 실력에 경탄한 아이린은 그에게 존경심을 품게 된 것이다.

‘응?’

아이린의 손등에 키스하고 몸을 일으키던 그리드가, 그녀의 목걸이에 달려 있는 청색의 반지를 발견했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그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반지 디자인이라는 건 원래 다 거기서 거기지.’

아이린 일행과 작별한 후, 그리드는 행정관의 집무실에 입실했다.

“잠시 앉아 기다리면서 내게 구매 비용을 계산할 시간을 주시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수도 있으니 양해를 부탁함세.”

“네, 천천히 하세요.”

그리드를 한쪽에 앉혀 둔 행정관이 열심히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계산하기가 상당히 복잡한 것인지,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짓고 한참 동안 열중했다.

그리드가 따뜻한 차를 정확히 8잔 마시고, 그도 모자라 한참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서야 계산을 끝낸 행정관이 가격을 제시했다.

“음… ‘예기를 흘리는 검’은 자루당 7천 골드. ‘무아지경의 검’은 20만 골드에 구매하도록 하겠네.”

잠이 덜 깬 그리드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

“장난하십니까? 무아지경의 검을 20골드에 사겠다고요? 아니, 예기를 흘리는 검은 7천 골드에 산다면서 왜 무아지경의 검은 20골드에 삽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이 검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값만 해도 950골듭니다!”

행정관이 당황했다.

“아니, 자네가 내 말을 잘못 들었나 본데… 20골드가 아니라 20만 골드로 구입하겠다는 걸세.”

“20‘만’ 골드요?”

“그렇다네.”

“……?”

그리드의 심장이 한순간 멎고 말았다.

잠시 후.

“후우… 후욱… 후우욱!! 하… 20만 골드라니? 진심입니까!”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질문하는 그리드!

그에게 행정관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반문했다.

“혹시 액수가 너무 적게 느껴지는 겐가……? 나로서는 이 작품이 스테임 백작 가문에 대대로 가보로 전해질 것까지 염두에 두고 가치를 최대한 높이 매긴 것인데……. 근데도 정녕 적게 느껴지는 겐가? 으음… 2만 골드까지는 더 지불할 의향이 있네. 하지만 그 이상의 금액은 재정 상태에 심대한 타격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네. 부디 이해해 주시게.”

현재 인구 33만, 한 해 인구 증가율 22퍼센트를 자랑하는 윈스톤의 한 해 운영 예산으로 책정된 금액이 17만 골드다.

행정관이 무아지경의 검에 매긴 가치는 윈스톤의 한 해 운영 예산을 초과할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행정관이 그리드를 설득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나는 이 검이 스테임 백작 가문의 가보가 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높은 금액을 책정한 것일세. 자네가 이 금액으로 만족해 주지 못한다면 매우 곤란해. 단언컨대, 이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귀족이나 상인은 찾기 힘들 걸세.”

“…….”

그리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 행정관은 노심초사했다. 자신이 제시한 금액을 그리드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이다.

그리드는 만족을 넘어 감격하고 있었다.

‘내가 26년 동안 살면서 겪어 온 수많은 불행들이 모두 이 순간의 행운을 맞이하기 위해서 존재했던 거구나!’

22만 골드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2억 6천4백만 원이다.

‘빚 갚고도 2억 5천4백만 원이 남는다!’

그리드는 당장에 거래를 완료하고 로그아웃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 마음 행복 금융의 사무실로 당당하게 쳐들어가서 1천만 원을 현금으로 떡! 하니 지불하며 소리치고 싶었다.

“됐냐! 이제 됐지?! 이제 두 번 다시는 돈 갚으라고 전화하지 마라! 이 돈독 오른 자식들아!”

라고.

그리고 이어서 외제차와 명품 옷을 구입하고 싶었다.

바로 한 달 뒤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명품 옷을 두르고 외제차를 끌고 등장하는 거야.’

빚쟁이 게임 폐인에 불과했던 그리드는 그간 동창생들에게 무시를 당해 왔다. 동창회에 참석해 봤자 비웃음을 사거나 설교만 듣기 일쑤였기 때문에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첫사랑 아영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변한다.

그리드는 동창회에 당당하게 참석해서 ‘나 실은 능력 있는 남자야.’라고 동창들에게 과시할 예정이다.

‘아무도 날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난 아영이에게 멋지게 마음을 고백하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거야!’

사실 그리드는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고민했었다.

무아지경의 검을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올리면 어떻게 될까?

최초의 레전드리 아이템이라는 타이틀이 걸리면서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으로, 그리드는 행정관과의 거래 퀘스트를 포기하고 무아지경의 검을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등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현재 시점에서 무아지경의 검의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올려 봤자 순수한 구매자보다는 훗날을 대비해서 미리 매입해 두려는 장사꾼들만 모여들 가능성이 높다.

즉, 이상적인 단검을 판매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리드는 무아지경의 검을 거래 사이트에 등록하지 않았다.

애초에 행정관은 아이템을 높은 가격으로 구매해 주겠노라 단언하기도 했었고, 행정관과 거래할 경우 별도의 수수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행정관과의 거래가 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드는 2억 6천4백만 원이라는 돈을 손에 넣게 생겼다.

그리드는 매우 만족해하면서 거래에 응했다.

“좋아요. 그 가격에 팔도록 하죠.”

“오오, 현명한 결단일세! 자, 이건 거래 대금이고, 이건 내 작은 성의일세.”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성공!]

[23만 4천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 3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지위 ‘윈스톤의 귀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행정관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

그리드는 실패작의 제작법을 펼쳐 보았다.

<실패작>

등급:유니크~레전드리

유니크 등급 정보.

내구력 699/699 공격력:733~1,621 방어력:50

*민첩성 +30

*낮은 확률로 적의 공격을 차단.

*일정 확률로 ‘5연격’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절단’ 스킬 발동.

*착용자보다 레벨이 2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 효과.

*어두운 장소에서 공격력 +20퍼센트.

레전드리 등급 정보.

내구력 1,090/1,090 공격력:874~1,820 방어력:80

*민첩성 +50

*낮은 확률로 적의 공격을 차단.

*일정 확률로 ‘5연격’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절단’ 스킬 발동.

*스킬 ‘이등분’ 생성.

*착용자보다 레벨이 2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 효과.

*어두운 장소에서 공격력 +20퍼센트.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설계한 무기입니다. 대검으로 만들어졌지만 검신 특유의 생김새 때문에 절삭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바다의 포식자 상어를 닮은 모습이 적에게 공포심을 주며, 검등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작은 검날이 방어에 도움을 줍니다.

푸른 오리하르콘을 재료로 사용하여 가볍기 때문에 공격 속도가 하락하지 않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의 특성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 더욱 강한 면모를 보입니다.

사용 조건:레벨 300 이상. 근력 5,0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8레벨 이상.

무게:550

다시 봐도 압도적인 성능을 보유하였으며, 제작할 경우 최소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되는 이 사기적인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는 푸른 오리하르콘 15개였다.

‘숲의 수호자’라는 막강한 보스 몬스터가 드롭하기 때문에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그 진귀한 재료가 무려 3개나 굴러 들어온 것이다.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푸른색 광물에 넋을 빼앗겨 살펴보는 그리드에게 행정관이 미소 지었다.

“과연… 훌륭한 대장장이 장인답게 그 광물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는군. 그것은 과거 내가 어떤 이들을 도와준 답례로 선물받은 것일세. 매우 신비로운 빛깔이 아름다워서 장식품으로 애용하고 있었으나, 자네라면 나와 달리 그것을 보다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획득한 푸른 오리하르콘을 보고 기쁨에 빠졌던 그리드가 뒤늦게 다른 보상에 흥미를 느꼈다.

‘윈스톤의 귀인? 이건 뭐지?’

그리드가 새로운 지위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윈스톤의 귀인>

윈스톤의 영주가 친히 인정한 각 분야의 장인이나 명사에게 내려지는 지위입니다.

윈스톤의 귀인이 제작한 작품은 윈스톤 내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며, 윈스톤의 귀인은 윈스톤 내에서의

모든 세금이 면제됩니다.

‘오오… 칸을 보니까 사업을 운영하려면 영지에 각종 세금을 지불해야만 하던데, 나중에 내가 대장간의 주인이 되면 난 세금을 안 내도 되는 거군?’

그리드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다.

행정관과 거래하기를 참 잘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어떤가?

그리드는 이번 거래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어째서인가?

그리드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저들이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현재 통합 랭킹 20위권 최상위 랭커들의 웨폰 마스터리 스킬 레벨은 중급 후반대다. 몇 달 후면 고급 마스터리를 습득하는 랭커들이 속속들이 등장할 예정이다.

만약 이 시점에서 그리드가 무아지경의 검을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경매 물품으로 등록했다면, 경매 가격은 최상위 랭커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수억 원을 넘어 수십억대를 호가할 수도 있었다.

이는 결코 과장된 액수가 아니다.

Satisfy의 유저는 무려 20억 명 이상이다. 그들 중 돈이 썩어날 만큼 많은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그들 대부분은 현금을 투자해서라도 보다 뛰어난 아이템을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아이템 공급률은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레전드리 아이템이 경매에 올라오게 된다면 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다.

즉, 그리드는 전 세계의 수많은 갑부들을 대상으로 혼자서 장사를 해먹을 수 있는 입장이었단 뜻이다.

그리드가 레전드리 아이템을 만들어서 전 세계 유저들을 향해서 바가지를 씌워 주겠다던 초심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그리드는 언제 또다시 만들 수 있을지 기약 없는 레전드리 아이템 하나로 그야말로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이고 인생 대역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굴리다가 아이템을 NPC에게 팔아먹은 바람에 고작 2억 6천4백만 원밖에 벌어먹지 못하였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그나마 그리드가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윈스톤의 귀인이라는 지위를 얻은 점이다. 그리드는 무아지경의 검을 싸게 판매한 대신에 장기적으로 꾸준한 이득을 취하게 될 예정이다.

“어머니! 아버지!! 세희야!!!”

캡슐을 박차고 뛰쳐나온 나는 곧장 거실로 달려갔다.

밥만 축내던 아들놈이 큰돈을 벌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거실이 텅텅 비어 있었다.

“어라?”

어두운 거실.

기분 나쁜 정적이 흐른다.

“서, 설마 내가 캡슐에 있는 사이에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일단 전화를…….”

우선은 부모님께 전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데나 방치해 놨던 핸드폰이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도통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굳이 핸드폰이 아니어도 되잖아? 집 전화로 하면 되지……. 자, 침착하자. 침착해.”

나는 전화기 앞에 섰다. 그리고 제발 가족들이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소름 돋게 놀랐다.

“…새벽 3시였잖아?”

장시간 Satisfy에 접속해 있다 보면 현실 시각에 무뎌진다. 그래서 난 지금이 새벽이란 사실도 모르고 혼자 오버했던 것이다.

안방과 세희의 방문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 가족들은 모두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휴… 다행이다.”

나는 스스로를 멍청한 놈이라고 욕해 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빨리 아침이 밝아서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다.

그리고 아침.

눈을 뜬 나는, 새벽에 어째서 근원 모를 불안감이 날 덮쳐 왔었던 건지 알 수 있게 됐다.

“영우야… 세희야… 이건 농담이 아니니까 똑똑히 들어라. 아버지가 쫄딱 망했다.”

“…….”

10년도 더 전에 끊으셨던 담배를 입에 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가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사실은 너희 아빠가 친구한테 빚보증을 서 줬었는데… 그 친구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단다……. 아이고~~!! 우린 이제 어떡하니!”

이… 이럴 수가…….

치킨 한 마리 시키면 온가족이 세끼에 걸쳐서 먹게 할 정도로 자린고비인 아버지께서 친구한테 빚보증을 서 줬었다니!

내가 존경하던 나의 아버지가 이토록 어리석은 분이셨을 줄이야!!

아버지에게 실망하며 큰 충격을 받은 내가 좌절하고 있는 사이, 세희가 부모님께 침착하게 여쭤 보았다.

“그래서 떠안게 된 빚이 얼만데요?”

“8억……. 가게랑 이 집 정리하고, 그간 모아 뒀던 돈이랑 합치면 4억 정도는 갚을 수 있을 게다. 하지만 미안하구나, 세희야. 너를 대학 보내고 시집보낼 생각으로 모아 뒀던 돈인데…….”

뭔가 중간에 한마디가 빠진 것 같다?

“아버지… 세희 대학 자금하고 결혼 자금을 모아 뒀을 정도면 당연히 제 결혼 자금까지 모아 두셨던 거죠?”

“아닌데?”

“아, 아니! 어, 어, 어째서요?! 이 집안의 장남은 접니다! 근데 왜 세희 시집보낼 돈만 모아 두고 저 장가보낼 돈은 안 모아 둔 거죠! 애초에 여자가 시집갈 때 돈이 왜 필요합니까! 결혼식 비용과 신혼집 구매 비용은 모두 다 신랑 측에서 지불하는 이 불합리한 사회에서!!”

흥분해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를 세희가 붙잡아 다시 앉혔다.

그리고 부모님께 선언했다.

“저 대학 안 가도 돼요. 일단 아르바이트하면서 저도 함께 빚 갚는 거 도울게요.”

“너 그게 무슨……!”

나와 달리 세희는 얼굴도 잘난 데다 머리까지 똑똑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런 애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포를 하자 부모님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여태까지처럼 생활하면 되는 게다! 넌 그냥 공부만 하면 돼! 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만 기다리면, 이 아빠가 그때까지 빚을 전부 갚고 반드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주겠다! 그러니 얼토당토않은 말은 마라!”

“아이고, 우리 착한 세희한테 마음고생 시키고 미안해서 어쩌누…….”

한 편의 신파극을 찍는 세 가족!

혼자만 동떨어져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자각했다.

‘그래… 지금 우리 가족은 대위기를 맞이했다! 지금이야말로 능. 력. 있. 는. 장남인 내가 나서야 할 때야!’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돈이라면 제가 벌 테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요! 아버지! 가게랑 집은 일단 처분하지 말고 놔두세요! 어머니! 근심걱정 마세요! 다 잘될 테니까요! 세희! 너는 아버지 말씀대로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공부에나 전념해!”

“후… 당장 내일부터 일거리를 찾아봐야겠군…….”

“저도 식당에 나가서 설거지할게요…….”

“아빠, 엄마, 나도 주말 정도는 아르바이트할게.”

“…….”

이건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한 반응도 아니다. 가족들은 나를 아예 투명 인간 취급했다.

내가 가족들에게 아무런 신뢰감도 심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들, 오빠란 반증이다.

나는 우선 진정했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 똑바로 자세를 고치고 앉아서 가족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진작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저 열흘 전에 인력소 때려치웠어요.”

“뭐, 뭣……! 네가 기어이 철이 안 드는구나!”

나는 재떨이를 잡아 쥐는 아버지의 노기 어린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그 열흘 동안 게임으로 2억이 넘는 돈을 벌었어요. 앞으로는 제가… 이 집안의 장남인 제가! 두 분과 세희를 책임지겠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외제차? 명품 옷?

그딴 허풍을 몸에 두를 여유 따위 없다.

첫사랑 아영이?

기약 없는 짝사랑에 목맬 정신머리도 없다.

집이 다시 일어서게 될 때까지, 나는 오로지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Satisfy를 플레이하는 방식도 보다 신중하고 진중하게 바꿔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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